〈 73화 〉 열네 번째 합궁카미나리 세이나
* * *
"...사냥을 가고 싶다고? 그래, 금위대 몇 명을 붙여줄 터이니 잘 다녀오거라.'"
완전 초췌해진 얼굴로 황제는 달리아의 요청을 들어 주었다.
"저기... 괜찮아요?"
달리아는 그런 황제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폐하의 모습은 정상은 아니었으니까.
"...괜찮다. 좀 쉬면 금방 괜찮아지니."
황제는 어젯밤을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대체 몇 번이나 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솔직히 그는 교접 중에 잠시 의식을 잃었을 정도였으니까.
오죽하면 오늘 조정에 출근하는 걸 늦을 뻔했다면 믿겠는가?
황제는 앞으로 다신 오르테가 녀석과 외출하지 않을 것을 결의하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어제는 다른 의미로 여성 혐오가 걸릴 뻔했다.
황제는 그리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조금 잠을 자긴 했지만 몸은 여전히 썩 좋지 못했다.
'오늘은 딱히 신경 쓸만한 상소는 없구나.'
달리아가 떠나고, 황제는 느긋하게 상소문을 읽었고, 자신에게 올라온 보고서를 읽었으며, 주술부대 편성에 대한 서류를 처리했다.
최근 주술파에서 왜 금위대에 마법부대는 있는데 주술부대는 없는지에 관련한 장문의 상소들이 올라왔다.
그 문제에 대해선 딱히 필요성을 못 느꼈다가... 맞겠지만, 그들의 불만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기에 이번 기회에 황제는 주술부대를 편성하기로 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우선 그 대장을 임명해야 했다.
조건은 우선...
'크라이스와 비슷한 수준의 주술사.'
아무래도 군사라는 것이 유지하는 목적이 무력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전투에 특화된 주술사.
그런 사람은 드물었고, 황제는 여러 인물들의 추천서를 훑어 보다가 결정을 내렸다.
'이 녀석이 좋겠군.'
꽤 다양한 분야의 실력자들이 있었지만, 황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이 남자였다.
"콰오콴이라..."
애초에 성도 없는 미천한 신분으로 이곳에 추천되었다는 것이 이 남자의 실력을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무엇보다...
'소환 계통 주술의 대가라.'
흥미로운 분야가 아닌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많은 분야다 보니 관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이 자를 대장으로... 나머지는 알아서 뽑겠지."
대원을 뽑는 건 대장의 재량으로 놔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황제는 대충 일을 마무리 짓고는 밖에서 대기하는 미령을 불렀다.
"할 말이 있으면 들어와라."
"...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왜 머뭇거린 거지?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미령에게 물었다.
"합궁인가?"
"그렇습니다."
역시 그녀가 찾아올 일은 그것밖에 없을 거라고 황제는 예상하였기에 그리 놀라지 않고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합궁 문제를 완전히 그녀에게 떠넘긴 재상이지만, 그래도 다른 중요한 안건은 그가 들고 왔었으니까.
"상대는?"
"쿠류족에서... 그러니까 이름이 카미나리 세이나군요."
미령은 영 생소한 곳인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고 황제는 그 단어가 귀에 익었다.
저기 동쪽의 먼 섬나라 출신이군.
황제는 예전에 천황제 때 하즈미 소야라는 녀석이 말한 쿠류 지방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쿠류 지방은 쿠류족이 사는 곳을 말하는데 수 천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다.
한때는 그곳에 황금이 잠들어 있다느니, 불로불사의 묘약이 있다느니 하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그냥 물고기를 잘 먹는 사람들이 사는 약소 부족이었다.
아무튼 카미나리라... 쿠류 왕국이라 자칭하며 대모를 왕으로 삼아 신권 통치를 펼치는 무녀 가문이었던가?
"쿠류족의 무녀 가문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은 모계 중심 사회다 보니까... 이번 합궁 상대는 그 무녀 가문의 삼녀로 간단한 주술 정도는 사용할 줄 모양입니다."
"흐음..."
무난하구나.
딱히 신경 쓸 점은 없었기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밤인가?"
"그렇습니다."
"최근 쌍둥이들과 자주 어울리는 모양이더구나. 뭔가 알아낸 정보가 있느냐?"
갑작스러운 황제의 말에 미령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폐하께서 그런 움직임까지 파악하고 계실 줄은 몰랐으니까.
"알고 계셨습니까?"
"황궁에서 짐이 모르는 건 없다. 모든 내관들이 짐의 눈이니."
그 태연한 대답에 미령은 과연...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네, 황실의 유물 중 시기가 특정되지 않은 것들의 감정을 의뢰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나쁘지 않은 일이구나. 쌍둥이들에겐 따로 상을 내려야겠어."
미령의 보고를 들으면서 황제는 감탄했고, 미령이 어제 감정 받은 책을 보여줬을 땐 깜짝 놀랐다.
"...그게 사실이냐?"
"네, 시기로 봐도 신빙성이 높은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 두고 가거라."
그 말에 미령이 책을 두고 집무실을 떠나자 황제는 자기 앞에 놓인 책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요괴에 대해 기록되어 있던 책은 그 내용이 너무나도 세세하여 황제는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게 전부 사실이라고?
그렇다면...
'요괴는 살아 있다.'
적어도 요괴 중에서 거두라 불리는 셋은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분란의 씨앗.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적어도 내 대에서 끝내면 좋겠는데."
황제는 작게 중얼거리면서도 딱히 방도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힘을 되찾기는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자신이 죽고 난 다음에야 활동할지도 모르고.
아무튼 당장은 손 쓸 방도가 없다.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책을 덮었다.
일단 이 책은 크라이스가 돌아오면 그에게 맡겨서 좀 더 조사해 보라고 지시할 생각이었다.
"북부... 생각보다 훨씬 넓은 거 같습니다. 대장."
크라이스는 부하 마법사가 추위로 덜덜 떨면서 중얼거리자 고개를 끄덕였다.
"넓지요. 하지만 그 금위대장을 찾는 일입니다.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지만요."
기운을 숨기고 있기라도 한 건지 도저히 탐색을 할 수가 없었다.
크라이스는 생각보다 자기 임무가 오래 걸릴 거 같다는 생각에 함께 온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전부를 끌고 온 건 아니라서 10명 정도였지만... 그래도 탐색을 하는 데는 과분할 정도의 숫자였다.
"2인 1조로 탐색을 계속하세요. 전 혼자서 저쪽을 찾아볼 테니까요."
"넵!"
부하들이 조를 짜서 빠르게 사라지자 크라이스는 다시 탐색 마법을 사용하면서 모용진을 찾아 해멨다.
'기를 숨기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그럴 상황이라는 건데...
금위대장 기를 숨길 정도의 상황이라... 크라이스는 불길한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얼른 찾아야 할 텐데...'
그렇기에 크라이스는 조급함을 숨기지 못한 채 분주하게 하늘을 날아다녔다.
당장 마력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보단 얼른 금위대장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이 더 강했으니까.
"여기서 이렇게 있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모용진은 고기를 굽던 중 뜬금없이 입을 여는 세르나를 보면서 물었다.
"무슨 생각?"
"그냥 여기서 이렇게 둘이서 사는 것도 괜찮..."
따악!
헛소리를 하고 있어.
모용진은 세르나의 머리에 혹을 만들어 주고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 있다 보면 시간 감각도 이상해지는군.'
모용진은 감각이 이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지 지독한 진법이다.
이런 곳에서 태평한 소리나 해대는 저 녀석의 심줄이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욕구 불만이면 제가 풀어드릴게요. 그런 폭력으로 풀지 마시고요!"
"...더 맞고 싶다는 의미야?"
뭔 욕구 불만이야.
부하의 헛소리엔 적응되지 않는 모용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모, 몸은 작지만 가슴은 제법 있다고요!"
"헛소리할 정신은 있는 거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세르나는 이런 끔찍한 곳에서도 나름 잘 적응하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금세 기운을 차려서는 고기를 뜯고 있었으니까.
'이러다 정이라도 들겠어.'
이 자식이랑 이렇게 지내다가 미운 정이라도 들어버릴 거 같다.
모용진은 그런 생각에 고기를 씹으면서 얼른 근원을 찾아서 진법을 해제할 궁리를 했다.
그런 정신 나간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이곳을 나가고 싶었으니까.
"딱히 필요 없던 너에게도 할 일이 생겼구나."
차가운 인상의 중년 여성이 싸늘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여인에게 말했다.
쿠류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가문인 카미나리 가문.
그 카미나리 가문의 대모인 카미나리 유사쿠는 지금 황제에게 보낼 여인을 정하고 있었다.
그 여인으로 선택 받은 눈앞에 여인은 대모의 말에 몸을 애처롭게 떨었다.
무녀복을 입었음에도 도드라져 보이는 몸매가 인상적인 그녀는 검은색 긴생머리의 미인이었다.
다만... 그녀의 눈은 감겨 있었다.
"조금... 하자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미색은 제일 괜찮으니. 저 먼 황제의 마음에 차겠지. 그곳에서 살다가 죽거라. 그것이 네가 우리 가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잔혹한 황제에게 이런 하자가 있는 물건을 보낸다는 것은 대모에게도 조금 불안하긴 하였지만, 그래도 미색이 미색이니 크게 흠을 잡진 않으리라.
"아,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거라. 당장 출발해야 할 터이니. 아이들아 얼른 세이나의 짐을 챙겨 주거라."
그렇게 그녀를 내쫓은 대모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합궁이라니..."
말이 합궁이지 사실상 주요 식솔을 볼모로 보내라는 협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몹시 불쾌하였지만, 그 제국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국과 척을 지면 미래가 없다는 걸 모를 정도로 그녀는 미련하지 않았으니.
'부디 황제가 이 일로 꼬투리를 잡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저 아이의 하자를 황제가 문제 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대모는 그렇게 빌면서도 다른 아이를 보낼 생각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전부 신을 모시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아이들이었으니까.
'신기해...'
그렇게 배를 타고, 마차를 타서, 마법사들의 도움까지 받아 도착한 황궁에서... 세이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극진한 대접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곳에선 자신이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도 흠을 잡지 않았다.
궁녀들은 친절했고, 재상이라고 자신을 밝힌 사람도 잠시 놀라긴 했으나 정중하게 자신을 대했다.
재상이라니!
사실상 제국의 2인자가 아닌가!
그런 사람까지 자신을 극진히 대접해주니... 세이나는 지금 상황을 믿기가 힘들었다.
"이제부턴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사무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재상은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령 비 전하. 폐하께 보고는 끝나셨습니까?"
비 전하...?
세이나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비, 비 전하를 뵙습니다."
"? 어차피 같은 비가 될 텐데 그렇게 저자세일 필요는 없는데요. 그리고 간단한 조사만 할 예정이니까 크게 긴장할 필요 없이 편히 있으세요."
조사라...
그 말에 세이나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했던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그녀의 말대로 조사는 간단했다.
가벼운 신체 검사에, 특기 같은 자잘한 것, 가족 관계, 병력 같은 걸 점검하고는 끝이 났으니까.
"좋습니다. 눈은..."
"아, 안 보여도 생활하는데 지장은 없답니다. 기로 대충 형태는 파악할 수 있거든요."
세이나는 미령의 걱정스러운 말에 덤덤하게 말했다.
그녀는 미력하게나마 주술을 쓸 줄 알았고, 기를 다루는 법도 알고 있었다.
세이나는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자신의 눈을 원망한 적도 있지만... 덕분에 다른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서 지금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처녀성에 관해서는... 확실히 그쪽에서 제출한 증거는 사실인 거 같네요."
"아, 예..."
이상한 도구를 사용해보며 미령이 말하자 세이나는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작은 다락방에서 지금까지 인생의 대부분을 생활한 세이나는 남자를 별로 만나 본적도 없었다.
당장 방금 이야기한 그 재상이라는 남자가 인생에서 2번째로 이야기해 본 남자일 정도였으니까.
"저, 저 같은 게 감히 폐하의 합궁 상대가 되어도 되는 걸까요?"
세이나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은 미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사실 쿠류족 같은 약소 민족에선 합궁 상대를 정하는 데 크게 미련을 두지 않거든요. 그런 건 이미 제국에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으니 세이나 씨가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쿠류족은... 이 제국에서 약소 민족일 뿐이구나.
세이나는 신기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쿠류 왕국이라 부르며, 쿠류 왕국의 영광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던 대모님의 말을 들으며 자라왔기에... 세이나는 무의식적으로 쿠류가 제국에서도 제법 힘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정작 제국에서는 그곳을 왕국으로 쳐주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세이나는 새삼 자신이 살아온 세상이 참으로 좁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저기... 그러면 대모님은 이곳에서 어느 정도 위치로 보면 될까요?"
그래서 궁금해졌다.
사실상 쿠류의 신이나 다름없는 대모님은 이곳에선 어느 정도의 위치일지 말이다.
"솔직히 그리 높은 위치는 아니겠지요. 이런 말하면 조금... 그렇긴 하지만 그 정도의 소수 민족의 지도자는 사실 황궁에 들어오는 것조차 힘이 듭니다."
미령의 말에 세이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대모님이 고작 그 정도 위치라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나 같은 건...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자신이 정말 비라는 높은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긴 할까?
세이나는 그런 생각하면서 그대로 멍하니 미령에게 이끌려 준비를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마음속에 불안을 지우지 못한 채, 궁녀들의 손에 치장되어서는 황제의 침소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폐하께서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되는 걸까?
돌아가게 될까?
만약 돌아간다면... 대모님은 나를 과연 받아주실까?
이런 도움도 안 되는 자신을... 치워 버리려고 하지 않을까?
세이나는 그런 두려움을 느끼면서 얌전히 페하를 기다렸다.
그 시각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길고, 또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