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대회의 시작을 알리다
* * *
"무술 대회라... 나쁠 것은 없겠군요."
회색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의 남자는 느긋한 말투로 이야기하며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는 드문드문 흰머리가 나 있는 회색 머리카락을 2대8 가르마로 깔끔하게 정리했고, 그의 회색 눈동자는 날카롭게 반짝였다.
재상의 설명을 들으며 그는 갑작스럽다는 생각은 했으나 그 면면을 보니 자신이 선택된 건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폐하께서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서운했으리라.
"그렇다면 역시 참가하시는 겁니까?"
잔뜩 긴장한 얼굴의 재상이 질문하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명을 누가 거역하겠습니까. 참가하지요."
남자의 대답에 재상은 기뻐했다.
그 브레드 엔서니의 허락까지 받았으니 사실상 모두가 참가 의사를 밝힌 셈이었다.
브레드 엔서니.
지금까지 300전이 넘는 결투에서 무패.
그렇기에 결투의 대가라고도 불리는 프리아족 최강의 전사.
그 대인전 능력을 높게 사서 병부 상서에게 수도 방위 사령관이라는 직책을 받은 이 남자의 강함을 의심할 자는 없다.
"그럼 믿고 가 보겠습니다."
재상은 아무튼 이제 물어볼 사람은 다 물어 봤다는 생각에 잔을 비우고는 자리를 떠났다.
이제 참가자도 확정이 났으니 얼른 내일 대회 준비를 마무리 지어야 했으니까.
"...무술 대회라."
재상이 떠나자 와인을 가볍게 한 모금 마신 브레드는 자신이 자랑하는 사브르를 꺼내 들었다.
새하얀 검신을 뽐내는 아름다운 사브르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리처드...'
그 남자도 참가한다면 절대로 빠질 생각은 없다.
'드디어 결판을 내겠군.'
앵글족 최강의 검사와 프리아족 최강의 검사.
당연히 누가 강한지 결판을 내야 했으니까.
"허허, 무술 대회라."
환명호는 자신에게 내려온 폐하의 친서를 읽어보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검을 놓고 살진 않았으나... 그래도 이제 슬슬 자신은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폐하께서 주신 과분한 직책인 전장군이라는 직책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전장군은 훈련소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책임지는 역할이었으니 그곳에서 후임을 양성하는 게 자신이 일이라 여겼던 탓이었다.
그러니 사실 다시 검을 쥐고 싸우라고 하는 이런 제안은 거절해야 함이 옳았지만...
'우스운 것은 이 제안이 그리 싫지 않다는 것이지.'
이런 것도 천성이라고... 무인의 피가 강자와의 싸움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환명호 역시 어쩔 수 없는 검의 망령이었다.
어느새 벌써 내일 있을 무술 대회가 기대되니 말이다.
모처럼 환명호는 자기 검을 꺼내 들었다.
그야말로 매끄러운 모양에 코등이가 없는 직도였다. 그는 그 직도를 꺼내서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차가운 감촉이 환명호의 정신을 맑게 만들었다.
'금위대장이 없는 건 아쉽지만...'
그 유명한 금위대장의 검기를 보지 못 하는 게 참으로 아쉽지만... 다른 이들도 하나하나 쟁쟁한 맹자들뿐.
환명호는 밤하늘 아래서 검을 휘두르면서 차분하게 기를 정돈했다.
내일.
무술 대회에서 상대가 누구든 그는 참가를 결정한 이상 질 생각이 없었다.
"허허... 무술 대회라."
대장군 김유선은 먼지가 묻은 자신의 검을 꺼내서는 열심히 닦았다.
검은 놓고 살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대장군은 무관 중 유일하게 조정 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 무관이다 보니 할 일이 많았으니까.
그런데도... 그가 검을 쥐는 동작은 더없이 익숙했다.
마치 그 정도의 세월로는 그에게서 그 기술을 빼앗을 수 없다고 말하는 듯이.
그는 잘 닦아낸 검을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후웅!
부드럽게 허공을 베어낸 그의 검은 매끄럽게 칼집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런 느낌은 참으로 오랜 만이군.'
이 감각.
피가 끓는 기분.
정말이지 그는 오랜만에 무인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폐하께 감사드려야겠구나.'
이런 감각을 다시 느끼게 해준 폐하께 감사드리며 김유선은 검을 다시 벽에 걸어두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래, 모두가 참가 의사를 밝혔다니 다행이구나."
황제는 미령의 보고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만약 거절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어쩌실 생각이었습니까?"
미령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황제는 달필로 답장을 적으면서 대답했다.
"어쩌긴. 빈자리는 백부장 중에 아무나 집어넣었을 테지."
백부장들한테 미안한 이야기지만 자리라도 채워서 구색을 맞추던가 했을 거다.
물론 황제는 그들이 거절할 거란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거절할 경우를 대비해두지 않은 건 아니란 이야기였다.
"그보다 밤이 늦었는데 슬슬 처소도 돌아가야 하지 않느냐?"
"...폐하께선 어째서 밤이 늦었는데도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그 말대로 원래라면 황제는 이미 침소로 돌아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오늘은 야근이었다.
"재상에게 일을 시켜 놓고 홀로 자버리는 건 몰상식한 일이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재상에게 모든 걸 떠맡기고 편히 쉴 정도로 양심이 없진 않았기에 황제는 야근으로 어느 정도 재상이 못 다한 일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저 동상은..."
미령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집무실 구석에 자리하는 동상은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마리아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해낸 물건이었다.
"선물이라고 가져 왔더구나."
마리아가 이걸 두고 가던 상황을 떠올리며 황제는 혀를 찼다.
드물게 황제가 필요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구석에 장식까지 해 두고 가 버렸다.
"저걸 어디다 쓰라는 건지. 하사품으로 줘버릴까?"
확 치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쓸모 없는 선물이다. 어쩌면 보복성 선물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황제는 마음 같아선 그냥 다른 놈들에게 줘서 치우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기엔 너무 닮지 않았습니까?"
"흐음..."
황제는 미령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정말 소름 끼치게 닮아서는 마냥 누구에게 주기도 애매했다.
"애초에 이거 안 움직이는데요."
그때 미령이 동상을 움직여 보려고 시도하고는 당황한 얼굴로 말하자 황제는 놀랐다.
"뭣? 아니, 그 여자가!"
황제는 드물게 당황해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상을 움직이려고 해봤다.
제법 힘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
황제는 이 흉물을 노려보며 한숨을 쉬었다.
억지로 움직이려면 움직일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집무실이 무너질 거 같았기에 황제는 체념한 얼굴로 동상을 내버려 두었다.
"하여간..."
이게 선물인지 짐인지.
황제는 깊은 한숨을 쉬고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자정이 되어가는구나."
어느새 자정이 다가오는데도 재상이 대회를 준비하느라 처리하지 못한 일은 쌓여 있었다.
황제는 새삼 재상의 업무량에 감탄이 나왔다.
"3... 2... 1..."
그때 갑자기 시계를 보면서 초를 재기 시작한 미령을 보면서 황제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정확히 시계가 자정을 넘기자 마자 미령이 품에서 선물을 꺼냈다.
"만수절 축하드립니다."
"...그걸 위해서 이러고 대기하고 있었느냐?"
왜 일이 끝났는데도 남아 있나 했더니...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선물을 열어 보았다.
"이건 또 신기하구나."
황제는 그녀가 건네준 손목시계를 차보고는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시계가 이리도 작을 수 있다니...
"프리히 대학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인연이 있던 마법공학자에게 부탁해서 만들었습니다."
"마법공학이라... 앵글족에서 최근 발달하고 있는 기술 말이지."
마법공학에 대해선 황제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마법공학이란 마법을 이용해 기술의 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마법사들에 의해서 탄생한 학문으로, 그 기술로 이것저것 만들긴 하는데... 황제는 크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앵글족이 사는 브리탄 지역에서 꽤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성과가 제법 놀라웠다.
"네, 조금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잘 쓰도록 하마."
황제는 그 말에 손목시계를 살펴보고는 감사를 표했다.
자주 시간을 맞출 필요는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꽤 유용해 보였다.
"이건... 조금 투자해보는 것도 좋겠어."
아무튼 이 정도의 발전을 이루었다면... 황실에서도 투자할 가치는 있는 학문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황제가 슬쩍 미령을 보며 말하자 미령은 바로 반응했다.
"그렇죠? 제 친구도 그 말을 들으면 기뻐할 거라고... 죄송합니다."
한참 신나서 입을 열던 미령은 황제의 표정을 보고는 그제야 황제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역시 그런 의도도 있었군.'
황제는 자신의 유도 심문에 제대로 걸려든 미령을 보면서 웃었다.
일단 그녀의 생각을 엿보고 싶어서 떠보긴 했지만... 투자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는 말은 진심이기도 했다.
"아니, 나쁜 생각은 아닌 거 같구나."
그렇기에 황제는 솔직하게 말했다.
솔직히 예산이 좀 더 주어진다면 좀 더 괜찮을 걸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어 보이긴 했다.
그렇기에 황제는 진지하게 이 문제는 재상과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다.
"만수절 기념 무술 대회의 개막을 알리노라!"
드디어 찾아온 대회 당일.
황제는 단상에 서서는 가볍게 선언했다.
와아아아아아!!!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은 그 선언에 환호성을 내질렀고, 황제는 덤덤하게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대기실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참가자의 이름을 호명했다.
"김유선."
"네, 폐하."
황제가 호명하자 화려한 붉은색 비늘 갑옷을 입은 김유선이 경기장 위로 올라와서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의 허리에는 환도가 달려 있었다.
"환명호."
"이곳에 있습니다."
환명호는 천제국의 군복을 입고는 허리엔 직도를 찬 채 황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카."
"냐!"
무카는 큰 소리로 기합을 내지르고는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그런 그는 검은 도복을 입고 있었고, 가지고 있는 무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자리에 당당하게 서서는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바아간."
"준비 되었습니다."
경기장에 올라온 바아간은 황금색 삼지창을 땅에 찍으며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푸른색 천 갑옷을 입고 있었다.
"레오니 비렌체."
"이런 기회를 주신 폐하께 감사드립니다."
레오니는 경기장에 올라서기 무섭게 꾸벅 고개를 숙여 황제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들고 온 검과 원형 방패를 내려놓았다. 베이지색 버프 코트를 입고 있는 그녀는 확실히 황제의 비보단 기사에 더 가까워 보였다.
"환여화."
"네."
환여화는 짧게 대답하고는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그냥 움직이기 편한 한복을 입고는 황제에게 받았던 검을 차고 한쪽 무릎을 꿇는 예법을 선보였다.
"..."
저건 무관들의 예법인데.
황제는 그걸 지적할까 하다가 내버려 두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무관이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를 일이니까.
황제는 그리 생각하며 다음에 나타난 인물의 이름을 호명했다.
"브레드 엔서니."
저벅. 저벅.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의 남자가 그 말에 경기장 위로 천천히 걸어올라왔다.
"!"
그 순간 주변 공기가 바뀌었다.
모두가 이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세에 경계심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강렬한 기세를 뿜어내며 경기장 위로 올라온 검은 정장의 사내는 웃는 얼굴로 가볍게 한쪽 무릎을 꿇고는 사브르를 자신의 앞에 박아두었다.
"브레드 엔서니. 지금 폐하의 앞에 도착했습니다."
'...과연.'
황제는 소문만 들었지 그를 실제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남자...
'강하군.'
상상 이상의 실력자였다.
어쩌면... 그 남자와 비견될 정도의 강자일지도 몰랐다.
"오우! 제가 마지막입니까?"
그 순간.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
모두가 그를 본능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황제도 그의 이름을 호명하는 걸 잠시 잊고는 그가 경기장에 올라서는 걸 묵묵히 보고 있었다.
"리처드... 고드프리."
마침내 정신을 차린 황제가 그 이름을 호명하자 리처드는 웃으면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예스! 폐하."
리처드는 갑옷은 입지 않았다.
그냥 두꺼운 회색 코트를 걸치고는 사람의 키만 한 커다란 흑색 대검을 옆에 낀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상이 참가자이며 대진표는 추첨을 통해서 결정하겠다."
모든 참가자가 경기장 위에 올라오자 황제는 그리 선언하고는 추첨을 시작했다.
그리고...
제비를 뽑는 황제의 손에서 그 대망의 개막전을 담당할 사람들이 결정되었다.
"첫 번째 경기는... 브레드 엔서니."
시작부터 거물이 튀어나왔다.
하긴 애초에 거물이 아닌 자가 없는 대회긴 했지만...
황제는 그 브레드의 상대가 된 인물의 이름을 보고는 잠시 움찔하더니 그대로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레오니 비렌체."
개막전을 담당할 두 사람은 그대로 경기장에 남았고, 나머지는 순순히 대기실로 내려갔다.
"비 전하를 상대해야 하다니. 이 무슨... 무례를 용서하시길."
브레드는 난처한 얼굴로 레오니를 보며 머리를 긁적이더니 사브르를 겨눴다.
"지금은 폐하의 비가 아닌, 한 명의 검사입니다."
브레드의 사과에 덤덤하게 대답한 레오니는 검을 뽑았다.
한 발은 앞으로 사브르는 찌를 듯이 세워둔 그의 자세를 보면서 레오니는 원형 방패를 팔에 찼다.
그녀는 원형 방패를 앞세우고는, 다른 손으로는 검을 내리칠듯한 자세를 잡았다.
"그럼... 시작!"
황제가 시작 신호를 알리는 순간 레오니가 그 자세 그대로 서서히 앞으로 다가왔고 브레드는 그대로 검을 찔렀다.
본격적인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첫 공방이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