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동류
* * *
"훈련이요? 힘들죠. 폐하께선 워낙 엄격하게 훈련시키니까요."
세이나의 질문에 아비는 그렇게 답하고는 대흘에게 물었다.
"그렇지?"
"뭐, 그렇지. 그보다 너 좀 풀어졌다?"
세이나에게 너무 편하게 대하는 아비를 보면서 대흘이 눈을 흘기자 아비는 당황했다.
"어? 선배 그건..."
안절부절못하는 녀석을 보면서 한숨을 쉰 대흘은 그 근육으로 팽팽한 두 팔로 활을 정비하며 말했다.
"됐다. 뭐, 비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도 같고, 미친왕 전하께서도 내버려 두시는 데 내가 뭐라 하는 것도 우습고..."
대흘은 그러면서도 계속 돛대에 몸을 기댄 채 활을 정비하고 있었다.
심안으로 그것을 보고 있던 세이나는 그 거대한 활에 감탄하며 말했다.
"준비가 철저하시네요."
"아마도 그곳에서 비 전하의 호위는 아비가 맡을 겁니다. 같은 여성이 호위해주는 편이 비 전하께도 나을 테니까요."
그런 그녀의 말에 머쓱한 표정을 지은 대흘은 그곳에서 호위를 어떻게 할 것인지 대충 설명했다.
"나는?"
그 말에 한참 선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미친왕이 다가와서는 질문하자 대흘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미친왕 전하의 호위는 기본적으로 제가 맡을 겁니다. 물론 마법사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지켜 주긴 할 테지만... 만약에 상황에선 우선순위가 낮다는 것만 기억해 두도록."
"그야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 참 불쾌한 섬이군요."
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직급이 높아 보이는 노인이 허허 웃으면서 대답하고는 섬을 노려보았다.
마법으로 이동이 불가능한 섬이라니... 참 쿠류는 알 수 없는 곳이었다.
"하하! 번개신께서 노하시면 폭풍이 몰아칩니다. 그런 불순한 말은 자제해주세요!"
그 말을 들은 선장은 호쾌하게 웃으면서 경고했고, 마법사는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일단은 침묵했다.
"우선순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와 비중에선 누가 우선순위가 높지?"
자기 몸은 끔찍하게도 아끼는 미친왕이 진지한 얼굴로 질문하자 대흘은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히 비 전하십니다. 우리 일행의 총책임자시니까요."
"끄응... 그것도 그러네."
미친왕은 그 말에 부정하진 못한 채 불안한 듯 눈을 굴렀다. 세이나는 그 말에 난처한 듯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걱정할 건 전혀 없어요! 저랑 선배면 쿠류의 전부가 적이 된다고 해도 문제없으니까요."
그런 미친왕의 걱정을 읽은 아비가 당당하게 가슴을 두드리며 말하자 대흘은 시위를 만지작거렸다.
"...전부는 좀 부담스럽긴 한데."
대흘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부정하지 않았다.
"네가 안 뚫리면 불가능은 아니지."
"절대 안 뚫리거든!"
"새삼 느끼는 건데요. 둘이 사이가 굉장히 좋네요?"
어느새 유치한 싸움을 시작한 둘을 보며 세이나가 의외라는 듯이 묻자 대흘은 달려드는 아비를 밀어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같은 민족 출신이라 그렇습니다. 저희 둘 다 오랑카이족 출신이거든요."
오랑카이는 예전엔 야만족으로 분류되었던 민족으로 야만족을 뜻하는 다른 말인 오랑캐가 바로 저 민족을 이르는 멸칭에서 나왔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뛰어난 전사들로... 그 유명한 활의 명수 야흘지가 환운 공과 함께 싸우면서 제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야흘지라면 아주 유명한 영웅이죠? 기마궁술의 창시자라고도 불리는..."
세이나가 들어본 적이 있다는 듯이 말하자 대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선조십니다."
대흘의 말에 세이나는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고, 미친왕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니 저런 커다란 활을 간단하게 다루는 것이겠죠. 그보다 바람이 찹니다. 비께선 몸을 챙기시지요."
미친왕은 그런 그녀를 걱정해주었다. 그녀가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었으니까.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세이나가 의외라는 듯이 묻자 미친왕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야 비께서 감기라도 걸리면 제가 형님에게 큰일이 날 테니까요."
솔직히 미친왕은 그녀를 걱정한다기 보단 그녀의 몸이 상해서 형님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게 더 걱정이었다.
"...저한테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요?"
그런 걱정을 이해하지 못한 세이나가 자신 없는 얼굴로 말하자 미친왕은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비께서 폐하의 비인 이상, 이 쿠류의 전체를 비께서 죽이기로 결정하셔도 형님께서는 지지해주실 테니까요."
미친왕은 알고 있었다.
세이나는 분명 폐하께서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던 그녀를 지지해주겠다는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은 즉...
이 쿠류에서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황제는 용인하겠다는 이야기이며, 그녀의 뜻을 거역하는 자나 방해하는 자는 황제가 직접 나서서 그녀의 뜻대로 처리해주겠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다.
그야말로 이 순간 그녀는 황제의 권한을 위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며, 그 가치는 실로 엄청났다.
세이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쿠류에서 그녀는 이들이 믿는 허상인 번개신보다 더 높은... 진짜 신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미친왕은 그녀에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흘과 아비는 잘하고 있겠지.'
일단 오늘 경기는 모두 끝났기에 황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쿠류로 향한 대흘과 아비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 채 앞에 놓인 차를 마셨다.
경기가 끝나기 무섭게 황태후가 만남을 요청했으니까.
"내일은 드디어 4강전이구나. 생각보다 경기의 수준이 아주 높았어."
황태후가 그런 황제를 보면서 말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특히 리처드와 여화의 성장이 두드려졌더군요. 김유선은 확실히 조금 녹슨 모양입니다. 검을 놓고 오래 살았으니 어쩔 수 없다면 없지만... 환명호는 여전히 날이 서 있더군요."
김유선은 전보다 확실히 퇴보한 모습이었고, 무카는 여전했으며, 바아간은 최선을 다했지만 상대가 나빴다.
"그렇지. 그보다 브레드란 남자도 대단한 실력이더구나."
"그렇지요."
황태후의 말대로 브레드는 굉장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황제가 보기에도 그는 여전히 상황에 따라서 우승이 가능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개인적으로 이 어미는... 여전히 리처드란 남자를 가까이 두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잔인한 자다. 속을 알 수도 없고."
슬슬 황태후가 본론을 이야기했다.
애초에 경기가 끝나고 따로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으니까.
황태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야만족들에게 했던 그 끔찍한 짓을 말이다.
야만족의 아내와 그 가족이 보는 앞에서 야만족 전사의 가죽을 벗겨 죽이는 잔악한 짓은 선제의 분노를 샀고, 결국 그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군을 떠나야 했다.
그런 천륜을 저버린 끔찍한 짓을 하는 남자를 어찌 신용할 수 있을까?
황태후는 그런 잔인한 자를 곁에 두는 황제가 참으로 걱정되었다.
"...잔인한 자는 맞으나 속을 알 수 없는 자는 아닙니다."
그런 황태후의 말에 황제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확실히 잔인한 자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솔직하게 자기 슬픔을 표현하고 있었다.
소중한 것을 잃고, 그것을 해소할 방법조차 찾지 못해서, 그저 미쳐 버린 가여운 자.
그래... 그런 의미에서 리처드는 자신과 동류였다.
그래서 황제는 그를, 그는 황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저와 그자는 동류입니다. 우린 같은 곳에 증오를 품었고, 같은 곳에... 소중한 자를 잃었습니다."
"...황상."
황태후는 그 말에 놀란 듯이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말했다.
"그는 불쌍한 자입니다. 전 그를 곁에 두며 야만족들을 전부 죽여 버리겠다고 약속했으나, 지금은 그들을 받아들이기로 하였으니... 오히려 그자에겐 죄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황상! 말을 삼가시지요, 그런 말은...!"
아무리 그래도 황제가 자신을 죄인이라 칭하는 건 문제가 있다.
그런 생각에 황태후가 화를 내려는 순간이었다.
"황태후께서 무엇을 우려하는지는 알고 있으나. 선은 지키는 편이 좋겠습니다. 제 인선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명백한 월권인지라."
멈칫.
이런 사적인 공간에선 어머니라 부르던 황제가 다시 황태후란 호칭을 입에 담자 황태후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황상! 이 어미가 잘못..."
이대로 보내면 다시 멀어질 거 같다.
그런 생각에 황태후가 손을 뻗었으나 황제는 그 손을 가볍게 무시하며 그대로 그녀의 침소를 떠나버렸다.
"이런 실수를..."
그제야 자신이 황제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황태후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아무래도... 이번 건 조금 오래 갈듯했으니까.
"저 때문에 싸우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황태후의 침소에서 조금 벗어나자 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던 리처드가 그 이상한 말투도 집어치우고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그의 초인적인 청력은 저 멀리에서 한 이야기도 다 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대에겐 미안하다. 짐은... 그대와의 약속을..."
황제는 그런 리처드에게 진심을 담아서 사과했다.
그와 약속했던.
함께 야만족의 피로 대지를 물들이고, 복수를 이루자는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사실 알고 있었으니. 이런 복수... 부질 없다는 걸 말입니다. 개인의 잘못이 민족의 잘못일 수는 없겠지요."
리처드는 대검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복수는 진작에 했다.
그런데도 풀리지 않는 분노와 원한을 그들이 속했던 민족에게 풀었다.
그야말로 괜한 화풀이었다. 그저 잔인하고 끔찍한 짓이었다.
이젠... 선제 폐하의 판단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자신은 멈춰야 했고, 그 잔혹한 학살을 그만둬야 했다.
다만... 그때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멈출 수 없었을 뿐.
그렇기에 오히려...
"그 무분별한 복수를 이젠 완전히... 끝낼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폐하께서도 이제 스마일하시죠."
지금 완전히 끝난 야만족과의 전쟁은 오히려 그를 안심하게 만들었다.
이제 자신의 다음 세대는 그런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될 테니까.
끊을 수 있다면... 복수의 굴레는 끊는 편이 좋았다.
"그런가..."
황제는 그 말에 눈을 감았다.
그는 이미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를 끝냈다. 하지만 자신은?
자신은 그 무의미한 복수를 끝낼 준비가 되었나?
솔직히 모르겠다.
하지만...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이 남자와 자신은 동류이기에... 황제는 자신도 그런 준비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역시 알고는 있었으니까.
이젠 끝내야 할 때라는 것을 말이다.
"오늘 저녁은 뭐야?"
화려한 군복을 입고 검은 대검을 챙기면서, 붉은 기가 감도는 금발이 인상적인 남자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물었다.
그런 그의 붉은 눈동자엔 아이를 안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비쳐졌다.
"오늘은 비프 슈트. 그보다 오늘도 야근이야?"
"이곳에 배치된 이상 어쩔 수 없잖아. 야만족의 무력 도발이 이어지고 있으니까. 조금만 참아. 1년만 더 복무하면 다른 곳으로 배치될 거니까."
그때는 아마도 금위대장이지 않을까?
남자는 그리 말하면서 웃었다.
"어후 잘생긴 얼굴로 웃으니까 훨씬 보기 좋네. 자주 웃어요. 그리고?"
"남들한테는 내 얼굴이 무서우니까 장난스러운 말투. 오케이. 미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굿바이."
장난스럽게 말하는 남자를 보면서 그녀는 해맑게 웃었다.
그 아름다운 미소가,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이, 상냥한 빛을 담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남자의 눈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우리 딸 잘 웃네.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부아!"
여자가 품에 안긴 아기를 향해 말하자 아기는 남자를 보며 환하게 웃고는 손을 흔들었다.
"이 파덜 다녀오는 동안 마덜 말 잘 들어야 해요?"
웃는 얼굴로 그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드는 귀여운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설거지를 하고 있던 여자에게 말했다.
"헬렌을 잘 부탁한다. 시스털."
"...그 말투. 하아!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와. 요새 야만족들이 국경도 넘어오는 거 같더라."
그런 남자의 장난스러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푸념하던 그녀는 그를 닮아 붉은 기가 감도는 머리카락을 올려 묶으면서 말했다.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그녀는 그 사나운 붉은 눈으로 남자를 보면서 당부했다.
"오빠가 다치기라도 하면 언니가 걱정하니까. 꼭 무사히 돌아와. 알았지?"
"넌 걱정 안 하냐?"
남자는 그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니 동생이라고 있는 것이 하여간...
"얼른 결혼이나 해라. 언제 독립할래? 너도 이제 나이갸 20..."
"...하여간 잔소리는! 곧 하잖아! 그이가 돈 벌면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까 기다려달라고!"
투덜거리는 여동생이 도시락을 챙겨 주며 그를 내쫓자 남자는 도시락을 받아들고는 깔끔하게 면도한 턱을 만져 보며 말했다.
"면도는 굿."
빠각!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남자의 머리를 툭 쳤다.
"뭐가 굿이야. 그 말투 좀 그만해. 사납게 생긴 놈이 그런 말투하니까 백부장의 위엄이 안 서잖아."
"할바르... 유는 참 건방진 부하야."
자기 부대 소속 병사이자 같이 입대한 동기이기도 한 할바르를 보면서 남자는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혹이 난 거 같았다.
"동기 사랑 내리 사랑이다. 아껴줘."
"...유가 미를 안 아끼는데 무슨."
할바르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남자는 투덜거리면서 일단은 그 무례한 행동은 넘어갔다.
"최근에 마을까지 야만족 병사들이 내려온다더라. 조심해."
"국경을 넘어온다고? 심각한데?"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자 할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이지. 가뜩이나 폐하께서 군비 감축을 시작했잖아. 이 평화로운 시기에 너무 과하다고. 과하긴... 당장 야만족이 국경도 마구 넘어오는 구만. 그 자식들은 여자도 약탈해 간다고 하니까 조심해. "
할바르는 진지한 얼굴로 충고했다.
"너희 집에 여자만 둘이잖아. 여차하면 오늘은 쉴래? 느낌이 영 안 좋거든. 내가 사령관한테는 대신 보고해둘 테니까."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리고 그런 거로 일을 안 할 수는 없잖아."
고작 느낌만으로 출근을 안 해? 직업 군인 실격이다.
그렇기에 남자는 할바르의 제안을 단호하게 잘랐다.
"아무튼 고! 오늘은 즐거운 외벽 리페어가 있다고."
오늘 남자의 부대에 배정된 업무는 바로 야만족의 공격으로 무너진 외벽을 보수하는 일.
일을 하다가 가끔 화살도 날아오기에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게 뭐가 즐거워! 너 자꾸 그딴 일 받아올래? 하극상 당하고 싶어? 어이! 이 자식아!"
화난 얼굴로 쫓아오는 할바르를 가뿐하게 따돌리며 남자는 웃는 얼굴로 달렸다.
그래 별일은 없을 거다.
이곳은 제국의 국경이긴 하나 그래도 국경 안쪽이다.
설마 야만족이 여기까지 내려오진 않을 거다.
그렇게 믿었다.
"...헬렌?"
그날 저녁.
외벽 수리를 끝마치고 돌아온 남자는 엉망이 된 집을 보면서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문은 부서져 있고, 가구는 엉망진창.
"으아아아아앙!
바닥에는 발자국이 가득했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로라.... 우리 귀여운 로라. 어째서 울고 있니. 괜찮아. 이 아빠가 왔어."
아기 침대에서 울고 있는 로라를 안아 들면서 남자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대체 누가...
"그만! 이러지 마!"
찌걱. 쩌걱.
그때 침실의 안쪽에서 불쾌한 소리가 남자의 귀에 들려왔다.
애원에 가까운 여인의 목소리는 남자의 귀엔 매우 익숙한 목소리였다.
"..."
"그만둬! 제발..."
여자는 애원하듯 말하면서 여전히 남자의 아래에서 발버둥쳤다.
짜악!
"닥쳐! 저항만 안 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 빌어먹을 년들."
저항하는 여자의 뺨을 후려친 남자는 여자가 잠시 잠잠해지자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번에 물건을 뺴내고는 여인을 엎드리게 하고는 다시 물건을 박아대기 시작했다.
찌걱! 찌걱!
남자는 침실에서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의식을 놓을 뻔했다.
야만족 전사들 셋.
얼굴에선 피를 흘리면서 수치심에 눈물을 흘리는 동생.
그런 동생의 옷을 찢고, 거칠게 뒤에서 박아대고 있는 털북숭이의 더러운 야만족 새끼와 아래에 깔려서는 가슴을 빨고 있는 야만족 새끼의 모습.
그리고...
"...헬렌."
시체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야만족의 물건을 받아내는 자기 아내의 모습.
아니... 시체처럼이 아니었다.
그녀는 죽어 있었고, 야만족 전사는 그런 그녀의 시체를 능욕하고 있었다. 얼굴에 묻은 정액과 입가에 묻은 침과 정액, 침으로 번들거리는 유두와 그녀의 몸에 굳어져 있는 정액이 그 짓거리를 얼마나 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혐오스러웠다.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제발..."
제발 그런 헬렌만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빌면서 그 남자의 우왁스러운 손길과 물건에 희롱당하는 동생의 모습.
"너도 좋잖아. 이제 즐기라고. 쯧! 저 여자도 먹음직스러웠는데...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자살해버려선 반응이 없단 말이야. 그거 재밌냐? 적당히 하고 너도 살아있는 여자를 즐기라고. 여기 위쪽 구멍이 비어있단 말이지. 크하하하!"
"흑흑!"
"우는 모습도 사랑스럽네. 하여간 제국 여자들이 곱긴 곱단 말이야."
눈물을 흘리는 동생의 얼굴을 핥으면서 아래 있던 야만족이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만지며 중얼거리자 남자는 머리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
그 순간 남자가 움직였다.
그제야 남자를 발견한 남자의 동생을 희롱하던 야만족은 급하게 남자의 무기를 빼내고는 다른 무기를 꺼내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뭐야! 너 누구..."
서걱!
"!"
순식간에 야만족 전사 셋의 다리를 잘라버린 남자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보았다.
화가 났다.
뭐가 군인이냐.
뭐가... 전사냐.
가족 하나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남자에겐... 이 일에 슬퍼할 자격조차 없었다.
"너희... 가족에게 안내해."
분노로 머리가 하애지는 것을 느끼면서 남자가 말했다.
"싫..."
우득!
공포에 질린 얼굴로 저항하는 야만족의 손가락을 밟아서 으깨버린 남자는 으르렁거리면서 말했다.
"안내해."
"아, 알았어. 안내할게 그러니까 목숨만은..."
그제야 완전히 굴복한 야만족 전사가 덜덜 떨면서 빌자 남자는 구역질을 참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
남자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왜 자신은 이런 나약한 놈들에게서 헬렌을 지키지 못했지? 동생의 순결을 지키지 못했지?
왜?
[장난스러운 말투. 잊지 마세요?]
꽈득.
남자는 입술을 꽈악 깨물고는 그 남자들의 머리카락을 묶어서는 그대로 셋을 동시에 들었다.
그래, 장난스러운 말투는 잊어서는 안 되겠지.
무서워할 수 있으니까.
"안내해. 팔로우할 테니까."
이 와중에도 그녀의 말을 기억하는 자신은 미친 걸까?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이 꿈이길 바라는 걸까?
남자는 자신도 알지 못한 채 그들에게 말했다.
"얼른. 미의 검은 참을성이 부족하거든."
그녀와 함께 구상했던 장난스러운 말투.
그것만이라도 지켜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바보 같은 남편이니까.
적어도... 그는 그녀가 사랑했던 이 말투만이라도 지켜 주고 싶었다.
"고. 네놈들의 빌리지 탐방하러 갈 거니까."
그렇게 말한 남자의 검이 그들의 목에 닿자 그들은 다급하게 자신들의 마을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들을 들고는 이동했다.
앞을 막아서는 야만족 전사들은 전부 벴다.
성별도, 나이도 구분하지 않고 그저 막는 자들을 전부 베어서 도착한 마을은 작은 마을.
남자는 자신이 끌고 온 전사들을 그들의 가족 앞에 세우고는 울면서 비는 그 전사들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제발 그만해 달라며 그 전사의 아내들이 빌고,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렸으나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왜 내가 멈춰야 하지? 이들은 그만해 달라는 내 동생의 말에 그 행동을 멈췄나? 내 아내의 말은 들어 주었나?
그런데 왜 나한테?
대체 왜 나한테는 자비를 바라지?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남자는 도저히 그들의 애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끄아아악!
가죽이 생으로 벗겨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돼지들을 처참하게 도륙해도, 남자는 도저히 분노가 풀리지 않았다.
너희들이 앗아갔어.
이 더러운 목숨을 아무리 바쳐도 돌아오지 않는 그녀를 너희들이 나에게서 빼앗아갔어.
다 너희들의 죄고, 너희들의 업보다.
너희들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으니까.
남자는 그리 생각하면서 증오와 공포가 공존하는 기묘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다... 죽어라."
남자는 분노를 담아 검을 휘둘렀고, 그곳에 있는 전부를 죽였다.
그럼에도 남자의 분노는 도저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남자는 무작정 걸었다.
그 뒤로도 남자는 계속 야만족을 죽여갔다.
숫자는 세지 않았다.
너무 많아서 도저히 셀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더욱 피를 갈구하며 날뛰었다.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폐하의 명이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야만족을 베고, 베고, 또 베어가고 있던 중... 남자는 어느 날 병사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폐하..."
폐하란 말에 움직임을 멈춘 남자는 생각했다.
그 폐하는 무얼 했지?
대체 무엇을 지켰지?
지키지 못했다.
지킨 것은 그저 황제 스스로의 자리 뿐이었다.
증오스러웠다.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런데도 남자는 그 황제의 신하였기에... 남자는 황명에 순순히 검을 내려놓고는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본 국경 방위 사령관은 남자의 앞으로 나오더니 황제의 친서를 읽었다.
"리처드 백부장은 들으라. 아무리 상대가 야만족이라 하나 그대의 잔혹함은 도를 넘었고, 그대가 흘리게 한 피는 강을 이룰 정도이니. 그 죄를 물어서 그대의 백부장 직위를 박탈하고 군에서 제대를 명한다."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하며 국경 방위 사령관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리처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보다 강하고 인망도 좋은 리처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 말을 들으면서... 남자.
아니 리처드는 순순히 군복을 벗었다.
바라던 바였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 하는 황제.
나약한 황제.
야만족 하나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 하는 그런 황제는 섬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리처드는 순순히 처벌을 받아들이고는 군을 나왔다.
"미안하다. 내가 제대로..."
군을 떠나는 리처드를 보면서 할바르가 머뭇거리며 말하자 리처드는 잠시 표정을 관리하고는 웃어 주었다.
그런 그의 품에는 그가 없는 동안 할바르가 돌봐주었던 딸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유의 잘못이 아니야. 미는 괜찮아. 이제부터 리프레쉬하면 되겠지."
그가 죄책감을 가질 일은 아니었다.
모든 건... 무능한 자신의 잘못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리처드는 괜히 이 친구가 죄책감을 가지지 말았으면 했다.
"너... 그래, 건강해라."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할바르는 이내 체념하고는 그를 보내주었다.
리처드의 동생은 얼마 후 수치심에 목숨을 끊었다.
결국 리처드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게 되었지만...
'괜찮아.'
리처드는 품에 안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또 사랑스러운 딸을 보면서 말했다.
"이 파덜. 열심히 할 테니까 잘 자라주면 됩니다. 오케이?"
이 아이는 부디 건강하게 자라서 좋은 남자를 만나기를.
자신처럼 아내도 지키지 못 하는 무능한 남자가 아닌...
모든 걸 지킬 수 있는 뛰어난 남자를 만나 행복하기를...
리처드는 진심으로 바라면서 고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