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의무방어전-84화 (84/235)

〈 84화 〉 물러날 수가 없는 이유

* * *

여화와 무카의 대결은 3시간이 넘는 난타전 끝에 여화가 승리를 가져가면서 끝이 났다.

그 무카를 상대로 설마 검을 놓고 난타전을 벌일 생각하다니...

황제는 여화의 배포에 놀라면서도 그녀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무카가 미련하게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아서 전에 부상이 남아 있었다고는 하나 그런 무카라도 격투에서 이긴 것은 놀라운 일이었으니까.

"이 말입니까. 굉장히 순하군요."

아무튼 경기가 끝나고 마방을 찾은 황제는 레오니가 말의 혀를 뒤집어보고, 뒷다리와 엉덩이를 만져 보며 말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발굽도 크고, 대칭이다."

"확실히 이렇게 예쁜 발굽은 처음 보는 거 같습니다."

말을 두고 이리저리 떠드는 둘을 보면서 여화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품에선 케르가 안긴 채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저게 뭔소리지?'

둘의 대화가 한참 동안 이어지자 여화는 자신의 품에 안긴 케르의 턱을 쓰다듬어주면서 살짝 어지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단 시합이 끝나고 폐하의 동행 제안을 받아서 따라오긴 했는데... 그녀는 말은 잘 몰랐으니까.

정확히는 말을 탈 줄은 아는데 저렇게 말의 근육이 어쩌고, 발굽이 어쩌고 할 정도의 지식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달리아 언니랑 돌아갈걸.

여화가 그렇게 후회하고 있을 때 황제가 여화에게 말을 걸었다.

"슬슬 어두워질 테니 말은 다음에 타보는 게 나을 거 같구나."

"네? 아, 예..."

"그래야겠네요. 폐하께선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레오니가 여화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케르를 한 번 쓰다듬고는 묻자 황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집무실로 갈 듯하구나."

오늘도 야근이구나.

레오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요새 늘 야근이라서 몇몇 비 사이에서는 불만이 조금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집무실로 찾아갈 비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레오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처소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녀는 지금 당장은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 더 급해서 잠자리가 급하진 않았으니까.

"그보다 내일은 드디어 결승이구나."

"...네."

여화는 황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그 리처드 고드프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도... 이기기 힘들 정도로 강한 상대였다.

"리처드는 그대가 짐의 비라고 해서 봐주진 않을 것이다."

황제의 말에 여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드라면 분명 여화를 상대로도 레오니를 상대하듯 힘을 줄였겠지만, 리처드는 다르다.

그는 결투에선 상대가 황제라도 전력을 다하는 자였으니까.

"그것이 제가 바라는 것이니까요. 오히려 바라던 바라고 해야 할까요?"

여화는 그것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결투에선 누군가가 자신을 봐주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훗! 그래, 그대도 그런 자였지."

황제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보다 강한지 증명하라고 말하던 그녀다운 대답이다.

그보다 케르 녀석은 여화를 황제의 비중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묘인은 아내 중에서 가장 강한 여인이 그 아내들 중에서 두목이 된다고 하던가? 즉 케르는 여화를 자신들의 두목으로 인식하고는 저리 애교를 부리는 것일 테니까.

물론 여화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지만 말이다.

"다음엔 마상 창시합을 열어봐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레오니가 말을 보면서 살짝 미련이 있는 얼굴로 제안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겠구나. 내년 만수절엔 그리 해 보지."

레오니의 제안에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고 황제는 그녀들과 헤어져서는 집무실로 들어왔다.

'새삼 이곳도 많이 변했구나.'

사실 황제가 되고 나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기도 한 이 집무실은... 예전과 비교하면 참 많은 게 변해 있었다.

간단한 차 정도만 들어 있던 찬장에는 각 지방의 과자와 차와 커피들이 가득 들어차 있고, 업무에 필요한 서류로만 들어차 있던 책장은 각종 주술 서적이나, 검술 서적, 심지어 연애 소설 같은 흥미 위주에 책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구석에는 마리아의 황금 동상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고, 집무실은 확장을 거듭해 이젠 비들이 전부 들어와도 황제의 업무 공간은 침해받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어느새 황제만의 공간이던 이곳은... 더 이상 그만의 것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그게 황제는 그리 싫지 않았다.

"후후, 멋지지 않더냐? 본녀가 정성을 다해서 만든 동상이 이곳을 빛내주니 이젠 야근해도 외롭지 않을 게다."

"..."

갑자기 나타나선 동상을 보면서 자랑을 하는 마리아를 보며 황제는 싸늘하게 말했다.

저 동상만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아팠으니까.

"저것 때문에 간이 떨어지면 떨어지지 짐이 안 외롭진 않을 거 같다만."

그렇기에 절로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왔으나 마리아는 오히려 그 대답에 더욱 기뻐했다.

"어머? 진짜 외로웠던 게냐? 그러면 말하지 그랬느냐."

스윽.

관능적으로 황제를 껴안으며 마라아가 귓가에 속삭이자 황제는 그녀를 떼어내려고 했다.

"떼어내면 앞으로 본녀의 협조를 받기 싫은 것으로 알겠느니."

"..."

그녀의 엄포에 황제는 순순히 그녀에게 안겨 있었다.

그녀의 유능함은 이젠 황실에서도 주요 자원으로 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마리아의 손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설마 여기서 하자는 건가 싶어서 조금 어이가 없었다.

"침소도 아닌데."

"그러니 더 흥분되는 게 아니냐. 본녀는 얼른 목적을 달성하고 싶어서 애가 달았거늘. 그대는 최근 합궁을 하거나 합궁이 없는 날엔 야근하면서 피하지 않더냐."

"..."

어쩐지 이 밤에 찾아왔다 했다.

몸이 목적이었나?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손길을 저항하지 않았다.

"호오? 역시 그대도 할 마음이 있긴 한 모양이구나. 벌써 이리도 커졌으니 말이다."

마리아가 옷 위로도 느껴지는 황제의 그 묵직한 물건을 쓰다듬으면서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황제는 마지막으로 저향했다.

"...누가 들어오면 뭐라 할셈이지? 지금이라도 멈추는 편이..."

누군가 들어올 가능성을 언급하며 황제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마리아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황제의 입술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만. 이미 마법으로 주변을 봉해 두었으니 누가 들어올 걱정은 안 해도 괜찮다. 아니면... 그런 상황을 바라고 있는 것이냐?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마법을 풀..."

"그걸 바라는 건 아니다."

"그럼 문제 될 건 없지 않냐? 남녀가 밤에 하는 일을 하자꾸나."

마리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로브를 들췄다.

그러자 검은색 가터벨트와 부드러워 보이는 그녀의 새하얀 다리가 그 모습을 살며시 드러냈다.

사실 그녀는 지금 몸이 달아 있는 상태였다.

나르타가 회임을 하였고, 들은 바로는 세헤라자드도 그 정황이 의심되어서 지금 검사를 받고 있다 들었다.

그런데 자신은 아직...

그런 생각하니 마리아는 조급해졌으니까.

"...그래."

황제는 이건 피할 수 없을 거 같단 생각에 그녀의 로브 안에 손을 넣고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후후, 그래, 드디어 할 마음이 든 모양이구나."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던 마리아는 눈을 감고는 황제에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 행동에 의미를 알고 있던 황제는 순순히 그녀에게 입을 맞춰주었다.

쪽.

쪽.

처음엔 가벼운 입맞춤으로 시작했으나 곧 마리아가 입술을 벌리더니 황제의 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서로의 입을 포개어 혀를 섞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몸을 탐하기 시작하면서 집무실에서 밤의 업무가 시작되었다.

­­

"응? 이 대디 완전 멀쩡하지. 응, 그래. 만나 봤지. 이 대디 폐하랑 진짜 친하다니까?"

통신 마도구를 들고 리처드는 열심히 통신을 하고 있었다.

"그래, 만수절 선물이라고 폐하께 서프라이즈 할 예정이지. 뭐? 선물이 아니라고? 노노노, 이 대디 슬퍼요. 그런 말 하면?"

한참 웃는 얼굴로 누군가와 대화를 이어가던 리처드는 잠시 후 통신을 끊었다.

"딸?"

그 모습을 보고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던 할바르가 물었고 리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약속대로 술을 사기 위해서 리처드를 데리고 주점에 와 있었다.

"하여간 비싼 술을... 자식아 나 돈 없어."

할바르가 지갑을 보여주며 엄살을 부리자 리처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폐하께서 금위대 백부장에게 샐러리를 짜게 줄 리가 없을 텐데?"

"너 봉급은 어떤데?"

그 말에 할바르가 대답을 회피하며 묻자 리처드는 술을 마시고는 대답했다.

"대충 이 정도?"

"이야, 확실히 국경 방위 사령관은 쌔네?

할바르는 자기 봉급과 비교해 보고는 감탄했다. 세 배?

"거기다가 위험수당까지. 플러스."

리처드가 으스대자 할바르는 질투로 몸을 떨었다.

"전쟁도 없는데 뭔 위험수당! 젠장. 나도 그냥 국경 방위 사령관이나 시켜달라고 할걸."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할바르를 보면서 리처드는 웃었다.

정말이지 여전히 놀리는 맛이 있는 친구였다.

"안주도 시켜도?"

"시켜. 시켜."

리처드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바로 점원을 부르고는 주문을 시작했다.

"여기 오징어구이 4개, 오리 훈제 2마리, 그리고 닭꼬치 20개. 감자 구이 4인분으로."

엄청난 양이었다.

할바르는 그 양에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걸 다 먹냐?"

입이 떠억 벌어진 할바르의 질문에 리처드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대답했다.

"조금 부족하면 더 시키지."

"..."

미친 대식가 새끼.

할바르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술을 마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에게 술을 사주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

"하앙!"

철퍽! 철퍽!

마리아의 입에서 교성이 흘러나오면서 로브가 흘러내렸다.

그러자 그녀의 풍만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가슴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철퍽! 철퍽!

황제는 벽을 잡고 엉덩이를 내밀고 있는 마리아의 육덕진 엉덩이를 잡고는 열심히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물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정말이지! 하앙!"

황제가 양물을 거칠게 박을 때마다 그녀의 몸이 흔들리면서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도 출렁였다.

그걸 본 황제는 몸을 숙여서는 그 가슴을 움켜쥐고는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읏! 얼른 씨를...!"

푸슛!

그녀가 애원하자 황제는 다시 한번 시원하게 그녀의 안에 사정하고는 자기 물건을 빼냈다.

"하아... 하아..."

그대로 황제의 의자에 쓰러지듯 앉은 마리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걸로 벌써 6번째. 슬슬 그녀는 체력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이 정도면... 회임이 되었으려나? 본녀는 모르겠구나."

마리아는 자신의 조금 살집이 있는 배를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녀는 얼른 회임하여 자신의 후계자를 낳고 싶었다.

터억.

그 말에 황제는 그녀를 그대로 들고는 발기된 양물을 가져다대었다. 그 행동에 마리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황제의 목을 꽈악 껴안았다.

"모르겠으면 알 때까지 하면 되겠지."

푸욱!

"그, 그만! 이제 한계... 흐아앙!"

찌걱! 찌걱!

그녀의 애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그대로 황제가 그녀를 들고는 거칠게 박아대기 시작했다.

"제발! 그만! 그만! 하아앙!"

황제는 처음으로 그녀의 입에서 그만하자는 말이 나오자 오히려 그만둘 생각이 없어졌다.

"짐이 그럴 때도 그렇게 그만둬주지 그랬느냐."

예전에 마리아는 그만둬 달라고 했을 때 그만두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황제의 사소한 복수였다.

"흐읏! 너무 짓궂... 흐아아앙!"

찌걱! 찌걱!

자신에게 안겨오는 그녀를 들고는 그대로 양물을 박아넣으면서 황제는 그녀의 애원을 들으면서도 교접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은 황제의 단단한 가슴과 닿아서는 형태가 마구 뭉개지고 있었다.

찌걱! 찌걱!

"그만! 흐읏! 제발 그, 그만...!"

간절하게 사정하는 그녀를 가볍게 든 채로 황제는 그대로 사정했다.

"이 정도면... 만족하느냐?"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리아는 입을 열 힘조차 없는지 황제에게 그 부드러운 몸을 기대왔으니까.

'확실히 효과가 있구나.'

탈진한 그녀의 몸에서 난 땀을 천으로 닦아주고 옷도 제대로 입혀준 황제는 미친왕에게 받았던 그 마법 식물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음을 깨닫고는 조금 안도했다.

이걸로 적어도 복상사로 죽은 황제로 기록될 일은 없어진 거 같았으니까.

"저 때문에 이렇게 먼 곳으로 사람들이 가게 되는 게... 맞는지 아직도 의문이 들기는 해요."

선상에서 차려진 조촐한 식사.

간단한 생선과 해조류, 그리고 보리밥으로 이루어진 그 식단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이나가 누린 식단 중에선 호화로운 편에 속했다.

미친왕은 딱히 음식은 가리지 않는지 그 조촐한 식사를 불평 없이 먹어 치우면서 그녀의 소심한 말에 반응했다.

"그곳에선 비께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전 자세히 모릅니다만... 이젠 저보다도 높고 귀한 사람입니다. 그런 겸손한 말은 이젠 비 혼자를 낮추는 게 아닙니다. 황실을 낮추는 일이고, 그 일원을 낮추는 일입니다."

미친왕은 진심을 담아서 충고해주었다.

저런 나약한 마음가짐으로 쿠류에 갔다간 그대로 잡아먹힐 것이다.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면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정말 낮게 볼 테니까.

특히 이미 그녀를 그런 취급하며 살아온 대모는 그녀가 약한 모습을 보일수록 더욱 방자하게 나올 것이다.

그런 점에선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는 게 차라리 낫다.

적어도 미친왕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스스로를 높이는 게 좋습니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선 그게 나으니까요."

"...네!"

진지한 미친왕의 충고에 잔뜩 얼어붙은 세이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모습이 미친왕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불안하군.'

모든 명령권은 그녀에게 있다.

만약 그녀가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다가 그들이 적대적으로 나올 때 저항마저 포기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황제는 분명 그녀에게 이 일행을 통솔할 모든 권한을 주었다.

즉 그녀가 저항을 포기하면 백부장들도 저항 없이 순순히 그들에게 죽어줄 거란 이야기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은 살 수 있을까? 미친왕은 생각해보았다.

'죽어야지 뭐.'

결론은 없었다.

'그러면 나도 쿠류에서 죽던가 하겠지 뭐. 그러면 형님이 복수해 줄까...? 해주겠지. 그래도?'

미친왕은 그런 실없는 생각하면서 식사를 끝냈다.

어느덧... 쿠류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

드디어 결승전 당일.

황제는 대기실로 친히 내려와선 리처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엔 '그걸' 쓸 건가?"

그 질문에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대검을 만지작거리던 리처드는 웃으면서 말했다.

"글쎄요? 폐하께서 띵킹해 보시는 건?"

황제는 생각해보았지만 녀석의 의도는 알 수가 없었다.

"뭐, 상관없겠지. 그보다 뭔가 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던데..."

결국 생각하는 걸 포기한 황제가 화제를 돌리자 리처드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에스. 있습니다. 폐하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미한테만 관심을 보이시면 비 전하께서 새드 하실 듯한데요?"

"아, 아뇨! 딱히 슬프거나 서운하진..."

여화는 바로 부정했으나 대기실에 오자마자 리처드랑만 대화하는 황제에게 조금 섭섭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얼굴엔 조금 섭섭함이 묻어나오고 있었으니까.

"미안하구나."

"아, 아뇨... 그렇죠. 저보다도 더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니까요."

그런 그녀의 감정을 읽은 황제의 사과에 여화는 손사래를 쳤다.

"이길 자신은 있느냐?"

황제가 그녀에게 질문했다.

리처드를 상대로 한 그녀의 각오를 들어보고 싶었다.

"질 생각으로 결투에 임하는 법은 안 배웠거든요."

여화의 대답에 황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를 조심하거라."

황제의 충고에 여화는 고개를 갸웃했고, 리처드가 투덜거렸다.

"그런 어드바이스는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그대가 질 정도라면 그것도 실력이지."

황제가 그 말에 피식 웃으면서 말하자 리처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군요. 자, 그러면 식전 쇼도 끝나가니까 폐하께서도 돌아..."

어느새 대기실에서 사라진 황제를 보고는 리처드는 눈을 끔벅거렸다. 황제는 어느새 상석에 앉아서는 관중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상석으로 돌아갈 줄이야.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아무리 봐도 그냥 몬스터인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부정하긴 힘드네요."

여화는 리처드의 말에 공감했다.

그녀도 리처드도 황제가 어느새 저 높은 상석으로 올라가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신체 능력.

리처드는 자기 감각마저 속이는 황제의 속도에는 감탄만 나왔다.

"그럼 페어플레이 합시다."

리처드는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경기장 위에 올라갔다.

'드디어...'

그 모습을 보면서 심호흡을 한 여화는 경기장 위에 올라섰다.

관중의 환호성.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

그런 것들은 여화에겐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사소한 것들.

지금의 그녀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한 남자의 강한 압박감이었다.

'무거워...!'

경기장 위에서 사람들에게 호흥해주고 있는 리처드를 보면서 여화는 생각했다.

엄청나게 무거운 기운.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무거운 기운이 이 경기장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럼... 시작!"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시작 신호를 보내자 여화는 바로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리처드의 대검이 바로 그녀의 눈앞까지 왔으니까.

"!"

놀랍게도 먼저 움직인 것은 리처드였다.

시작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어느새 천 밖으로 튀어나온 대검이 여화를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으니까.

휘익!

바로 코앞까지 닥쳐온 대검을 여화는 뒤로 몸을 젖혀서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다.

설마 그 리처드가 먼저 움직이다니?

지금까지 대진 중에서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모두가 당황하고 있었다.

'성가신 기운.'

리처드는 황제와의 일전을 대비해서라도 얼른 여화를 끝내고 싶었다.

금기란 것이 변형되기 쉬운 성질을 지녀서 그런지 그 변화무쌍함은 가장 변수를 만들기 쉬웠으니까.

무카와 그녀의 일전이 그러했다.

초반의 공방에서 극도로 단단해진 그녀의 기운은 갑옷이 되어 그녀를 때린 무카의 주먹을 분쇄했고, 그 순간 이미 그 난타전의 승자는 정해진 상태였다.

이미 망가진 주먹으로 그 정도의 난타전을 이끌어낸 것이 오히려 무카의 극에 달한 타격 기술을 증명해줬다고 평가해도 될 정도였다.

'미의 기운을 알아차리면 성가셔지니까.'

그녀에게 시간을 주면 줄수록 성가셔진다.

어떤 기운이든 최적의 성질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게 금기의 가장 큰 장점이니까.

그러니까 리처드는 속공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그녀와 싸움을 길게 끌고 가는 건 좋을 게 없었으니까.

황제와의 결전을 위해서라도 리처드는 최대한 힘을 비축해두고 싶었다.

후웅!

'왜 조급하지?'

여화는 리처드의 대검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하면서 의문을 품었다.

누가 보아도 그가 더 강한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 이렇게 조급하게...

'아.'

여화는 그제야 리처드의 눈이 계속 누구를 보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리처드의 눈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는 위에 있는 폐하를 보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제야 여화는 그가 조급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얼른 자신을 끝내고 폐하와 겨루고 싶어서 조급해진 것이다.

"..."

여화는 그런 리처드의 행동에 화가 났다.

그렇기에 리처드의 공격을 피하던 여화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공격적으로 변했다.

푸아악!

순식간에 리처드가 검을 휘두르면서 벌어진 틈새를 찌르고 들어간 여화는 그대로 찌른 검을 그어서 옆구리에 치명적인 검상을 만들었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리처드는 대응조차 못하고 빈틈을 허용해야 했다.

"지금 당신의 상대는 저라고요."

여화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고,  리처드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거 참."

할 말이 없군.

리처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옆구리를 잡았다.

그의 커다란 손을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붉게 물들였다.

"쏘리."

짤막하게 여화에게 사과한 리처드는 손에 묻은 피를 대검에 묻히면서 기를 끌어올렸다.

"...!"

그 모습을 보고 여화는 경악했다.

지금까지 리처드가 쓰던 검기는 무색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모든 인간은 오행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게 상식이다만... 간혹 그 오행에 포함되지 않은 소수가 있지.]

리처드의 기를 보면서 여화는 황제가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제대로 가지요."

쉐에엑!

그 순간  검기가 그대로 여화를 덮쳤다.

'막아야...!'

쩌어어엉!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그 검기를 막아 낸 여화는 저릿한 충격에 몸을 떨었다.

이 무슨 묵직한 일격이지?

방금 전 공격과는 차원이 다른 묵직함이었다.

"...저건 대체."

오행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 기운.

여화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의심될 정도로 놀랐다.

그만큼 리처드의 기는... 이질적이었으니까.

--

"저건 대체..."

황제의 옆에서 경기를 보고 있던 레오니는 리처드의 기운이 바뀌기 시작하자 놀랐다.

저토록 선명한 붉은색이라니... 화기와는 확실히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그런 레오니의 의문을 황제는 완전히 풀어주진 않았지만 대충 실마리는 주었다.

"간혹 오행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기운을 품은 자들이 있지. 리처드가 그런 부류 중 하나다."

사실 엄밀하게 보면 오행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지만...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레오니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늘은 상석엔 황제와 레오니 단둘 뿐이었다.

그 외에 다른 비들은 전부 불참했고, 황태후 역시 오늘은 오지 않았다.

마리아는 의원들이 대기하는 곳에 같이 대기하고 있긴 했지만 뭔가 바쁘게 이야기라도 하는지 통신 마도구를 들고는 누군가와 열심히 이야기 중이었다.

"결승엔 정작 흥미가 없는 모양이구나."

관중들은 여전히 꽉 차 있었지만, 비들에겐 별로 관심이 있는 분야가 아닌 듯했다.

"오늘 비들은 무슨 회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황태후 폐하께서도 참석하신다고..."

"회의?"

황제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마리아도 저기서 통신으로 회의에 참가 중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그대는?"

그럼 왜 레오니는 그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거지? 황제가 그런 의문을 가지고 묻자 레오니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전 이걸 보고 싶어서 불참 의사를 밝히고 왔습니다."

하긴 무인이면 결승은 못 참겠지.

그보다 대체 무엇을 정하기에 황궁에 있는 비들이 전부 모여서 회의를 하는 걸까? 그것도 황태후까지?

황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뭐..."

상관없나?

지금은 당장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결투의 결과가 더 궁금했기에 황제는 금방 그 회의에 대한 관심을 꺼버렸다.

당장 급한 건 결승의 결과지 비들의 회의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

"그게 사실이라면 확실히 좀 더 숫자를 늘려도 괜찮을 거 같네요."

나르타는 마리아의 설명을 들으면서 바쁘게 깃펜을 움직였다.

그녀들은 지금 모여서 황태후의 허락 하에 합궁이 없을 때의 잠자리 순번을 정하고 있었으니까.

황제가 좀 더 밤에 적극적이고 왕성하게 되었다면 그녀는 찾아가는 비의 수를 늘려도 지장이 없을 거란 판단이 섰다.

"저 여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이 정도도 괜찮을 거 같구나."

황태후의 동의까지 떨어지자 나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회임 중이고, 세헤라자드 비도 회임이 의심되니 제외한다면..."

나르타는 가만히 계산해 보았다.

15명에서 멀리 나가 있는 세이나 비와 회임 중인 자신, 회임이 의심되는 세헤라자드를 뺀다면 12명...

"딱이네요. 4명씩 나누면 될 거 같은데...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그렇게 조를 짜는 게..."

짝수로 딱 맞아떨어졌다. 그렇기에 나르타가 조를 짜려고 할 때 오르테가가 손을 들었다.

"맞다! 나도 검사 받고 있는데."

그때 오르테가가 자신도 회임이 되었는지 검사를 받는 중이라는 걸 깨닫고는 말하자 나르타는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11명... 모호하네요. 나누기가."

나르타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숫자에 난색을 표하자 황태후가 말했다.

"이번 무술 대회가 끝나면 바로 다음 합궁이 있을 테니 그 아이를 더해서 12명으로 하면 되지 않겠니?"

다음 합궁 상대도 이미 정해졌고,  그 상대는 이미 출발했다고 하니 무술 대회가 끝나면 바로 다음 합궁이 있을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황태후가 그리 말하자 나르타는 반색을 했다.

"아! 그러네요. 그러면 숫자는 맞아떨어지네요."

나르타가 그제야 걱정을 덜었다는 듯이 안도하면서 다시 펜을 들자 황태후는 웃으면서 그녀들이 잠자리 조를 짜는 것을 지켜보았다.

[난 남는 이들과 붙여주어도 괜찮느니.]

"..."

그때 통신 마도구에서 마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황태후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시겠지. 그 위대한 대마법사께서 무엇이 그리 신경 쓰이겠니?"

[어라? 아직도 그 일로 꽁해 있느냐?]

마리아는 황태후의 날이 선 반응에 실실 웃는 목소리로 말했고, 그게 황태후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저런 식으로 여유로운 태도도, 선제의 고백을 거절한 그녀의 당당함도, 황태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난 그쪽이 황상하고는 어울리지 않다고...!"

발끈하듯 말하는 황태후에게 마리아는 노골적으로 도발했다.

[후후, 어제 폐하께서는 너무나도 뜨겁더구나. 본녀는 그만하자고 하는데도 계속하는 통에 본녀의 몸이 남아나질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젯밤의 일을 말하면서 마리아가 후후 웃자 황태후는 분노로 몸을 떨었고, 나르타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얼굴을 붉혔다.

오르테가는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으며 세헤라자드와 쌍둥이, 그리고 미르예프는 난처한 웃음을 흘리며 황태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미령은 여전히 덤덤하게 조를 짜는데 집중했고, 마리프는 혼자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긋하게 졸고 있었다.

달리아는 '그냥 나도 대회나 보러 갈걸...' 하고 중얼거리며 둘의 기 싸움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고, 설화와 케르는 그 와중에 과자를 먹느라 둘의 신경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황상은 어쩌다가 저런 늙은 여우에게 홀려서는."

황태후는 작게 한탄했고, 마리아는 그 말에 발끈했다.

[늙은 여우라니!]

여자에게 늙었다는 말만큼 기분 나쁜 말이 있을까? 적어도 마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그녀는 마음만은 여전히 이팔청춘이었으니까.

"세기를 넘게 살아왔으면 늙었다는 표현도 과분하지."

[이익!]

황태후가 비웃듯이 말하자 마리아는 부들거렸으나 딱히 부정할 말은 찾지 못했다.

적어도 나이 부분에선 반박할 말이 없었으니까.

"겉이 아무리 젊으면 뭘 하겠니. 속이 이처럼 늙어 문드러졌는데. 황상이 가여울 따름이야.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그대는 이제 회임을 할 수 있나?"

[있다네! 그대보다 몸은 훨씬 젊으니 말이다!]

빠직!

그 말에 황태후가 발끈했다.

"100살 넘은 할멈이 젊어봐야 얼마나 젊다고!"

[흥! 그대는 마법을 모르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또... 시작이네.'

싸움이 길어질 거 같자 나르타는 난처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마리아는 분명 비이긴 하지만 그 나이와 대마법사라는 신분 때문에 조금 특별한 취급받는 사람이었다.

당장 이렇게 황태후와 투닥거릴 수 있는 유일한 비가 그녀였으니까.

[가슴은 본녀가 더 크니라!]

"크다고 꼭 좋은 게 아니라 자고로 형태가..."

'오래 걸리겠구나.'

이젠 서로의 몸매를 가지고도 싸우기 시작한 둘을 보면서 나르타는 다른 비들을 데리고는 조를 정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나르타에겐 둘의 싸움은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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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악!

여화는 어깨에서 피를 뿜어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가볍게 스치기만 했는데도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스으윽!

'피를 빨아들이고 있어...'

여화는 자기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빨아들이는 리처드의 붉은 기운을 보고는 경악했다.

놀랍게도 리처드의 기는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의식이...'

이 이상 피를 빼앗기면 위험하다.

그런 판단을 한 여화는 자기 기를 이용해 상처 부위를 막아 출혈을 멈췄다.

"스마트하네요."

그걸 본 리처드는 칭찬하면서 대검을 내리쳤다.

정확히 여화의 정수리를 노리고 내려오는 대검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압박감을 주었으나 여화는 차분하게 몸을 뒤로 굴려서 피해냈다.

"하아... 하아..."

지친 얼굴로 몸을 일으킨 여화가 거친 숨을 몰아쉬자 리처드는 웃었다.

"블러드가 부족하죠? 그만큼 빨렸으면 보통은 움직이기도 벅찹니다."

리처드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여화를 추격하지 않았다.

그대로 추격해서 공격했다면 죽었을지도 모르니까.

"당신의 그 기운... 혈기라고 해야 할까요? 피죠?"

잠시 숨을 돌린 여화가 말했다.

피를 빨아들이는 저 기운... 분명 피와 연관이 있는 건 분명했다.

"댓츠 라이트. 혈기라고 합니다. 피와 관련된 성질을 지닌 이질적인 기운이지요."

리처드는 순순히 자신이 무슨 기운을 가졌는지 이야기했다.

"정확히는 수기에서 조금 이질적인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요? 미는 조금 특별한 휴먼인 셈이죠."

리처드의 기운은 혈기.

피를 강하게 응축하고, 결속시키는 성질을 지녔다.

즉...

"미와 유가 피를 흘릴 수록 기운은 강해집니다."

피를 흡수하여 점점 강해지는 성질을 지녔다는 이야기였다.

"..."

그래서 폐하께서 피를 조심하라고 하셨구나. 여화는 그제야 폐하의 충고를 이해했다.

'머리가 어지러워.'

여화는 현기증에 잠시 비틀거렸다.

숨을 쉬기가 버겁다.

빈혈 때문인지 머리는 어지러웠고, 눈은 흐릿했다.

그런데도...

여화는 여전히 검을 잡고는 자세를 잡고 있었다.

아직 승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자신은 서 있었으니까.

'수기와 비슷하다면...'

여화는 자기 기운을 정제하기 시작했다.

상대의 충격을 흡수하고, 발산하는 느낌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준비가 끝난 여화가 달려들자 리처드는 눈을 감았다.

분명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혈기는 결국 수기와 비슷한 성질. 토기와 비슷한 성질로 대응한다면 훨씬 유리하게 싸울 수 있다.

그 선택이 좀 더... 빨랐다면 확실히 좋은 선택이었을 거다.

우득!

"커헉!"

리처드의 대검이 어느새 여화를 깔끔하게 후려쳤다.

복부를 크게 맞은 여화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그녀가 기로 억제했던 출혈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미 저런 중상을 입은 순간 그녀의 패배는 정해져 있었다. 그 뒤에 어떤 좋은 선택을 하던 의미가 없을 뿐.

"잘했어요. 이제 레스트해도 됩니다."

혈기까지 꺼내게 했으니 그녀는 분명 최선을 다했다.

리처드는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며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왜 끝난 것처럼 말하나요?"

부들. 부들.

놀랍게도 여화는 다시 일어서서는 자세를 잡았다.

눈은 이미 빛을 잃었고, 다리와 팔은 제대로 된 기능을 못 하고 후들거렸으나 여화는 여전히 자세를 잡고 서 있었다.

"...이건 대체."

리처드는 놀랐다.

그녀의 출혈량은 사실 치사량에 가까울 정도였다. 솔직히 죽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출혈이었으니까.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는 거 자체가 기적이다.

'출혈이...'

리처드는 놀랐다.

그녀의 출혈은 어느새 멎었고, 여화는 여전히 검을 쥐고 서 있었다.

그게 리처드는 믿어지지 않았다.

"...죽는 게 위시입니까?"

리처드는 대검을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의 비를 죽이고 싶지 않아서 방금은 검면으로 때렸다. 물론 그런데도 이미 피를 많이 흘린 그녀에겐 치명적인 일격이었을 거다.

그런데도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데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런 그녀의 행동은 리처드가 보기엔 죽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러서야 할 때라는 건 알고 있는데요."

여화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에... 다시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물러설... 수가 없어요."

"왜죠?"

리처드는 순수하게 궁금해서 질문했다.

그 말에 여화는 리처드에게 서서히 다가오면서 말했다.

"여기서 물러서면... 정말 많은 걸 잃어버릴 거 같았으니까요."

물러서야 할 때라는 건 안다.

부질없는 발버둥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물러선다면... 정말 많은 것을 잃어버릴 거 같은 느낌을 받았으니까.

"그러니까 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출혈이 멎는다.

그녀의 몸에 상처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고속 재생.

리처드는 그제야 그녀가 자신의 몸을 자가 치유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기가 막혔다.

금기를 저런 식으로 쓴다고?

재생하는 성질로 변화시켜서?

그야말로 대단한 재능이다.

리처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는... 정말 천재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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