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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94화 (94/235)

"..."

황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모두를 물렀다.

음식을 가져온 마리프와 미르예프, 주설화도 만나지 않았고, 검으로 풀어보자고 찾아온 여화와 레오니도 돌려보냈다.

미령과 쌍둥이에게도 만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고, 세헤라자드와 마리아의 방문 역시 거절했다.

케르가 꼬리를 만지게 해주겠다는 이상한 제안을 해왔음에도 거절했고, 기분을 풀기 위해 사냥을 같이 가자는 달리아의 제안도 거절했다.

로라는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되는 허브를 주고 사라졌다.

황제는 그 허브를 피워둔 채, 홀로 침소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모용진은... 정말 죽은 걸까?

'시체는 없었다.'

황제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모용진을 살려둘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시체가 없는 거지?

그리고 왜 그들은... 갑자기 숨지 않고 정면 승부를 택한 걸까?

모용진을 죽이고, 인간의 전력이 약해졌다 믿은 건가?

하지만 황제가 볼 때 그걸로는 부족하다.

뭔가...

'모르겠군.'

그들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모용진이 무사할 리는 없다는 것뿐.

그것만으로도 황제는 미칠 거 같았다.

"내가..."

황제는 후회되었다.

자신이 그에게 명령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가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면...

"이딴 거나... 남겨두고, 뭐 하자는 거냐."

세르나가 자신에게 전해준 모용진의 유서를 꽉 쥐고 황제는 중얼거렸다.

"읽지 않을 거다. 나쁜 녀석 같으니."

무슨 유서란 말인가.

황제는 아직 그 녀석의 죽음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다.

죽지 않은 녀석의 유서를 읽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까...

'제발 어떤 모습이어도 좋으니까...'

살아만 있어 다오.

황제는 그리 빌면서 그대로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깊은 후회와 죄책감이... 황제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똑똑.

"폐하. 나르타입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르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 지금은 아무도 보고 싶지 않구나."

나르타의 목소리에도 황제는 거절 의사를 밝혔다.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잠시...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오르테가도 같이 왔는데요."

"..."

오르테가도 모용진의 소식을 들은 걸까?

황제는 그 말을 듣고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 짐을 혼자 있게 해다오."

오르테가의 얼굴을 보면 울어버릴 거 같았기에 황제는 이번에도 거절했다.

그 녀석의 얼굴을 보면... 모용진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를 거 같아서.

자신의 죄책감이 더욱 커질 거 같아서... 황제는 그녀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나르타는 설마 모용진과 가까운 사이인 오르테가도 거절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황제는 지금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친구이자, 부하였으며.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던 자신의 형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는 죄책감이... 황제를 강하게 짓눌렀으니까.

"무겁구나..."

황제는 작게 중얼거렸다.

사람의 목숨이 이리도... 무거웠구나.

지금까지 이토록 무겁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병으로 죽었을 때도, 야만족에게 전우를 잃었을 때도... 이토록 버거울 정도로 무겁게 여겨지진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죽음이 이토록 버겁고, 또 무거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폐하께서 상심이 많이 큰 모양이네요."

명백한 거부에 걸음을 옮기면서 나르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모든 비들이 황제를 보고 싶어 했으나 전부 거절 당했다.

그래서 모용진과 친하던 오르테가라면 다르지 않을까 했는데... 소용이 없던 모양이었다.

"괜찮아. 그 녀석도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걸 테니까."

오르테가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그녀의 얼굴로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그녀에게도 그만큼 모용진은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

"난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거든. 그 녀석이 절대 어디서 죽을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오르테가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모용진의 강함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런 그가...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녀는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르테가..."

나르타는 그런 오르테가를 안타깝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오르테가의 몸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한 사람의 실종이 가져온 여파가 너무나도 컸다.

황궁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고, 매일 아침 진행되던 조정 회의는 무기한 연기되었으며...

황제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모든 게 한 남자의 실종이 불러온 결과였다.

--

"이, 이건 말도 안..."

대모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 보이는 것은 죽거나 크게 다쳐서 전투 능력을 상실한 무사들.

그리고...

"무기를 들고 고작 50명이라니. 단련이 부족하잖아."

"그쪽이 괴물이거든! 무식하게 힘만 쌔선. 활쟁이 아니랄까 봐."

그런 무사들을 전부 제압한 두 명의 괴물을 보면서 대모는 그제야 황제의 힘을 알았다.

이게 바로 그 황제의 힘을 상징한다는 금위대의 백부장인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강함이었다.

"그러나 현실이네요."

세이나는 차갑게 조소했다.

그런 그 모습에 오히려 미친왕이 오한이 돋을 정도였다.

이게... 그 소심하던 비와 동일 인물이 맞는 건가? 가족이 아니라는 말에 세이나의 태도가 그야말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모두가 놀랄 정도의 변화였다.

"눈을 감고 있으라는 충고 너무 좋았어요. 감을 눈도 없지만요. 대흘."

"아! 죄, 죄송합니다."

대흘은 자기 실수를 깨닫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해서 자꾸 까먹는 사람이 많은데... 그녀는 애초에 감을 두 눈이 없었으니까.

"아쉽긴 하네요. 지금은... 그 모습을 직접 이 두 눈에 담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요."

세이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대모에게 다가갔다.

사실 두 눈이 멀쩡했어도 그 상황에서 눈을 감지는 않았을 거 같았다.

두 눈이 있다면 직접 보고 싶었다.

대모의 표정을 말이다.

"저, 저기... 난 네 어머니잖니. 이쯤에서 용서해..."

대모가 바로 의자에서 일어나선 비굴하게 바로 머리를 조아리자 세이나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전 아무래도 어머니가 없이 태어난 거 같아요."

싸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한 세이나는 가볍게 그녀의 머리를 밟았다.

자신의 머리에 세이나의 신발이 닿자, 순간 대모의 몸이 움찔했으나 그녀는 여전히 비굴한 태도를 유지했고 세이나는 차갑게 말했다.

이미 그녀는 스스로가 악귀가 되어 버린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족이 아닌데... 굳이 자신을 괴롭게 한 그녀의 사정을 봐줄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어디로 추방했죠?"

"...말해주면 살려줄 거니?"

세이나의 질문에 대모가 비굴한 어조로 묻자 세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순순히 말하면 살려줄 생각이었다.

"그럼요."

세이나가 목숨을 보장해주자 대모는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

"그 남자는 제국으로 추방했다. 아마도 살아 있다면 군으로 가지 않았겠니? 예전부터 무사가 되고 싶어했으니..."

길에서 객사니 뭐니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선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지만 세이나는 그 말에 희망을 품으며 되물었다.

"군으로... 말인가요."

"그, 그래! 군으로 갔을 거다. 검 하나 정도는 쥐어줬으니까."

세이나는 그녀의 대답에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 아버지를 찾는 건 폐하께 부탁해야 할까?

그럼 이 여자는 정말 필요가 없는데.

세이나는 그런 생각하면서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당신은 이곳의 신이라면서요."

움찔!

그 말에 대모는 몸을 움찔하고는 덜덜 떨었다.

"당신은 신이 아니야. 그걸 이제 깨달으니 어떤 기분이지?"

세이나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녀의 속에서 타오르는 분노는, 대모를 날카롭게 겨누고 있었다.

'이리도 간단한 것을.'

그런 말에도 아무런 대꾸도 못 하는 대모를 보면서 세이나는 허망함을 느꼈다.

이리도 나약한 여자를 두려워했던 과거의 자신이 참 한심했다.

별것도 아니었는데.

이토록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진짜 신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인간이었는데...

자신은 왜 그녀를 두려워했던 걸까?

세이나는 이제 진짜 신을 알았다.

이런 거짓된 신이 아닌 진짜 신을 말이다.

그리고 그 신은 자기 뒤에 있었다.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지지해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세이나는 이젠 더 이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아비. 대흘."

"네."

세이나가 백부장 둘을 부르자 대모는 애처로울 정도로 몸을 떨면서 말했다.

"사, 살려 준다고 하지 않았니!"

"살려줄 거예요. 다만 그대로 두면 아무래도 저항하거나 도망치겠죠? 대흘, 단전을 부수세요."

단전은 체내에 기를 모으는 저장소 같은 곳.

주술사에게도 중요한 건 다르지 않았다.

마법사는 다른 곳에 보관하는 것 같긴 하지만... 어차피 대모는 주술사니까.

세이나의 명령에 바로 다가온 대흘이 주먹을 쥐고 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자, 잠깐! 그건..."

우득!

대흘의 무자비한 주먹이 대모의 복부를 강하게 때렸고, 그 주먹에서 방출된 기가 확실하게 그녀의 단전을 부쉈다.

"쿨럭!"

그 충격으로 피를 토해낸 대모를 보면서 세이나는 그녀의 처벌을 결정했다.

죽이진 않기로 했으니까.

"살려주기로 했으니까 이 여자는 미친왕께서 쓰세요."

"오! 진짜요?"

미친왕은 그 말에 바로 반응했다.

세이나는 그 반응에 별 감흥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회를 치든, 아니면 가지고 놀던 이제 세이나에겐 관심 없는 일이었다.

"죽이지 않기로 했으니까 제가 딱히 처리할 방법이 없네요. 풀어 주고 싶진 않고, 감옥에 넣어 두는 것도 괜찮지만. 그래도 미친왕께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선물로 저거라도 드리죠."

저거.

한때는 그래도 어머니라고 생각했던 여인을 한낱 물건 취급하며, 세이나는 걸음을 옮겼다.

미친왕은 세이나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대모의 머리채를 잡고는 질질 끌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일단 쿠류를 안정시켜야겠죠. 새로운 대모... 아니다. 대모 같은 건 이젠 필요 없겠죠. 새로운 쿠류의 통치자도 뽑아야겠네요."

세이나는 그래도 자기 고향인 쿠류를 방치해 두고 싶진 않았다.

그대로 제국에서 직접 관리해도 되겠지만...

애초에 그게 번거로워서 제국이 쿠류의 통치를 카미나리 가문에게 맡겨두고 조공과 공납만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어차피 제국에선 다시 비슷한 체제를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럴 거면 그녀는 모처럼 권한을 얻은 김에 이 쿠류를 제대로 다스려줄 사람을 골라볼 생각이었다.

'아버지도 찾아야 하고. 바쁘네요.'

세이나는 처음으로 바쁘다는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일단 그녀는 이곳을 바꿔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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