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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97화 (97/235)

"늘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이제 막 즉위한 사촌 동생의 말에 모용진은 그를 보았다.

단언할 수 있었다.

지금의 즉위식은 역사를 따져봐도 가장 끔찍한 즉위식일 테니까.

주변엔 시체가 가득했다.

이번에 황위에 오른 황제는 온몸에 피를 묻히고, 손에는 남자의 목을 들었다.

그 남자가... 황제의 숙부라는 건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고, 주변에 시체들은 그런 재상을 따르던 무리의 시체라는 것 역시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야말로 피의 즉위식이었다.

"짐이 즉위하면 그대가 가장 먼저 죽을 것이라고."

이젠 대답할 수 없는 재상의 머리를 대충 던지면서 황제는 말했다.

"거리에 걸어두거라."

"네!"

황제를 따르기로 한 무사가 그런 재상의 머리를 들고 사라지자 황제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폈다.

"바쁘겠구나. 새로운 재상도 뽑아야 할 테고, 관리들도 싹 물갈이를 해야 할 테니."

순식간에 황제에게 반발하던 관리들이 목숨을 잃었다.

모용진은 이 압도적인 잔인함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당장의 안정을 위해서 필요한 행위라는 것을 인정했다. 당장 야만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빠른 내부 정리가 필요했다.

"가장 위협적으로 군사를 모은 곳이 이쪽이던가?"

황제는 덤덤하게 말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다른 숙부인 대장군 진만은 자기 요새에서 병력을 모으고는 내전을 준비 중이었다.

그 군세가 물경 5만에 이르렀으니 그야말로 대군이요. 이대로 방치해두었다간 기나긴 내전의 시작을 알릴 지도 모를 위험 요소였다. 그러니 빠르게 뿌리를 뽑아야했다.

"다녀오자."

"..."

덤덤하게 그 많은 병력이 모인 요충지로 향하는 황제를 보면서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상대의 병력이 아무리 많아도... 모용진은 걱정하지 않았다.

황제의 강함을 믿었고, 또...

"제가 곁에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자신의 강함을 믿었으니까.

모용진의 확언에 황제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래, 그대가 있지."

그렇게 향한 요새에서... 정작 모용진은 별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할 필요도 없었다.

황제가 단신으로 성벽을 부수고 진만의 목을 베어오는 데는 일다경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

"사, 살려주십쇼. 앞으로는 절대..."

서걱.

황제는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이들의 목을 자르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다.

"진작 그리 했어야지."

황제는 바닥을 뒹구는 친족들의 목을 보며 중얼거렸다.

"진작 그리 엎드렸다면 살았을 것이 아니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을.

황제는 그리 중얼거리면서 모용진에게 물었다.

어느새 황제의 손에 죽은 혈족들의 수가 두 손으로 다 헤아리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짐이 너무해 보이나?"

"너무한 건 저들이 아닐까요?"

그 대답에 황제는 침묵했다.

그러고는 이젠 대답할 수 없는 자기 동생들을 가만히 보았다.

그들은 가장 먼저 군사적인 움직임을 보인 이들로, 비록 큰 위협은 되지 않는 움직임이라 해도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 본보기로 삼을 수밖엔 없었다.

"그들에겐 짐이 너무하고 말이지."

황제는 그리 대답하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그들과는 절대 평화로울 수 없는 운명이었던 모양이었으니까.

"어렵구나."

분명 속이 후련할 거로 생각했는데...

후회는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속이 후련한 것은 아니었다.

"얼마나 더 피를 묻혀야 할지. 정말 지긋지긋한 자리야."

오히려 이 자리에 환멸을 느낀다. 그렇기에 황제는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버리고 튈까요?"

모용진이 태연하게 말하자 황제는 순간 머뭇거렸다.

그 제안은 솔직히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황제는 몇 번이나 대답을 망설여야 했다.

"...솔직히 엄청 끌리긴 하구나. 하지만 아버지가 저지른 일은 자식이 치우는 게 맞겠지. 나라 꼴이 말이 아니구나."

솔직히... 정말 끌렸다.

그냥 이대로 나라따위 알아서 하라고 던져 버리고, 어딘가 멀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나라 꼴이 너무나도 엉망이었다.

외척들이 설치다 보니 세제가 문란해졌고, 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자연히 황실의 재정은 빈약해지고, 야만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 군사들의 무장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그런 제국의 몰락 조짐을 느낀 다른 민족들도 독립의 움직임을 보이니 제국은 언제 찢어질지 모를 정도로 위태로웠다.

그야말로 무너지기 직전의 망국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엉망인 나라.

자신이 버리고 도망친다면... 그 엉망인 나라라도 먹겠다고 다툴 생각이 넘치는 형제들. 새로운 제국을 건국하려는 야심찬 민족 지도자.

황제가 사라진 순간 새로운 황제가 되기 위해 그야말로 전란의 시대가 펼쳐질 것은 자명해보였다.

그리고 그런 전란의 시대에 가장 피해를 입을 것은 당연히 아무런 죄 없는 양민들이기에 황제는 이 자리를 버리고 도망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 제국이 갈가리 찢어져 전란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은 막아야 했으니까.

"머리가 아파. 일단 세제 개혁을 해 줄 재상을 뽑아야 하는데 좋은 자가 있느냐? 모용철 그 머저리 말고."

자꾸만 재상 자리를 달라고 징징거리는 외숙부를 떠올리며 황제는 골머리를 앓았다.

이런 상황에서 모용철 같은 무능한 머저리에게 재상의 자리를 주면 그 순간 이 나라가 끝이라는 건 갓난 아기도 알만한 사실이었으니까.

재상은 그야말로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능한 자로 뽑아야 했다.

"아버지가 노골적 싫어하던 관리가 하나 있던데 유능하단 평가더군요."

모용진의 추천에 황제는 가만히 그 이력을 살펴보았다.

"장원을 세 번이나 한 자가 이런 한직을 맡았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군."

황제는 그 이력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마방 출입부 기록원은 대체 뭐 하는 직종이지? 이딴 게 있다는 것도 황제는 처음 알았다.

그 밖에도 마당 청소 관리원, 소고기 관리원...

무려 장원을 세 번이나 한 인재가 별 의미 없고 이런 게 있었나 싶은 직위만 전전한 게 황제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말했잖습니까. 아버지한테 단단히 밉보이는 사람이라고요. 저것도 대충 만든 직책일 테죠."

모용진은 그리 말하면서 아무튼 이자가 현재 이 황실에서 살아남은 관리 중 가장 유능한 자라면서 추천을 아끼지 않았다.

"김명한이라... 그래, 나쁘지 않은 느낌이구나."

황제는 고민을 했으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닌 금위대장이 추천한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 모용철이 싫어한다면 그만큼 곧은 인물이라는 증거.

"직접 보는 편이 좋겠지. 불러오거라."

그리 말했던 황제는 정작 김명한을 보고는 결단을 내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그야말로... 진흙 속에 숨어 있던 여의주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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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떨떨합니다. 갑자기 불려가선 재상이 되었으니까요."

모처럼 황제와 업무가 아닌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재상은 그때를 생각하며 웃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한직을 전전하리라 생각했던 그에게 황제는 다짜고짜 재상의 자리를 맡겨주었으니까.

그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지금 생각해도 재상은 황제에겐 늘 감사한 마음 뿐이었다.

"...그래."

어딘지 모르게 초췌한 황제는 차를 마셨다.

재상은 황제가 어제 고생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부분은 딱히 건드리지 않았다.

"쌍둥이들의 상단은 잘 운영되는 모양이구나."

황제가 그녀에게 차려 준 상단의 재무제표를 살펴보며 미소를 짓자 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능한 분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콰오콴이 로라 비 전하와 자주 의견을 주고받는 모양이더군요."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던 둘은 이야기를 몇 번 나눠보더니 금방 의기투합했다.

콰오콴은 마법사를 싫어했지만, 마법공학 자체에는 흥미가 있었고, 로라는 주술사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콰오콴의 소환 주술엔 관심을 보였다.

어느새 둘이 서로를 인정하고는 연구로 열을 올리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모두가 평화롭구나."

황제는 덤덤하게 말했으나 재상은 그 말이 평화롭게 들리지 않았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황제가 조금 슬퍼 보였으니까.

역시 금위대장의 실종에 대한 슬픔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걸까?

재상은 그렇기에 망설여졌으나... 그래도 이건 말해야 할 것 같았기에 재상은 슬슬 운을 뗐다.

"금위대장에 대한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봐라."

황제는 큰 기대가 없는 눈으로 말했다.

솔직히 뜬소문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관남에서 금위대장과 닮은 남자가 길을 걷는 걸 본 자가 있다고 합니다."

멈칫.

그러나 재상의 말에 황제는 바로 반응했다.

관남에 금위대장이...?

"...저도 믿기 어려웠으나 그걸 본 화백이 그린 초상화를 보고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재상이 초상화를 펼쳤다.

황제는 그 초상화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건."

황제는 놀랐다.

초상화에 그러진 인물은 확실히 모용진이었다.

물론 머리색과 눈색이 다르긴 했지만... 이 얼굴은 누가 봐도 모용진이었다. 착각할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림이라고 해도 이건 모용진이 분명했다.

하지만...

"머리색이 다르다면 다른 자가 아닌가?"

금발의 금안이라... 모용진의 원래 모습과는 다르다.

그렇기에 황제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확실히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으니 모용진이 살아 있어도 이상할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 거지?

관남에서... 대체 무얼 하는 거지? 머리색과 눈색은 왜 바뀐 걸까?

황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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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기로 온 거지?"

제천대성은 뜬금없이 관남으로 향한 뇌천왕에게 질문했다.

왜 하필 이곳이지?

뇌천왕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저 멍하니 허물어진 요새를 쳐다보았다.

이곳은 예전에 황제가 대장군 진만을 참한 곳으로 그 본보기로 이 요새는 여전히 복구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뇌천왕은 작게 입을 열었다.

그런 그는 조용히 무너진 요새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보고 싶어서."

'...인간일 때의 기억이 남은 건가?'

제천대성은 그런 뇌천왕의 모습에 불안 함을 느꼈으나 곧 털어 넘겼다.

세뇌는 완벽하다.

주술은 여전히 제대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천대성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렇군... 이게 인간의 황제인가."

파괴의 흔적을 살펴보며 그리 중얼거린 뇌천왕은 검을 뽑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길 수 있나?"

"...반반이겠지."

제천대성의 질문에 덤덤하게 대답한 뇌천왕은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제천대성은 반반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 괴물을 상대로 승산을 반이나 점칠 수 있다는 것이 충분히 만족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때 뇌천왕이 말했다.

"간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놈이군."

그 말만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진 뇌천왕을 생각하면서 제천대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자니까. 조금은 멋대로 굴어도 괜찮겠지.

제천대성은 그런 생각하면서 뇌천왕을 따라 걸었다.

이번엔 그가 어디로 갈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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