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욱!
황제는 검을 찔렀다.
주변엔 온통 시체로 가득했고, 황제는 피를 뒤집어쓴 채 그 참상을 묵묵히 감상했다.
"얼마나 더 죽여야 끝이 날까."
이렇게 유지하는 제국에 의미가 있을까?
황제는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었다.
물론 이번 건 꽤 날카로웠다.
"금위대장이 없었다면 죽었겠군."
이미 알고 있는 습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이 위험했다.
무려 검기를 사용할 줄 아는 50명에... 알려지지 않은 검강 사용자까지 있었으니까.
오페아 가문의 밀고가 없었다면 분명... 바닥에 뒹굴고 있는 건 저들이 아니라 황제였을 것이다.
애초에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면 이곳에는 황제 혼자 왔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황제의 죽음을 의미했다.
당장 여기 누운 무사 중 대부분이 지금...
파직. 파직.
저 앞에서 전류를 흘리고 있는 남자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 금위대장의 합류가 이번 암살 계획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역시 누님이군. 숨겨둔 패가 있었어."
황제가 자신을 위협했던 강자를 떠올리며 중얼거리자 모용진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확실히 강하긴 하네요? 아직 폐하 실력으로는 조금 벅찼을 겁니다."
리아가 숨겨둔 패.
검강 사용자의 목을 들고 모용진은 그리 말했다.
"..."
황제는 부정하지 못했다.
실제로 모용진이 저 남자를 맡아주지 않았다면 죽는 건 자신이었을 테니.
"그대에겐 늘 목숨을 빚지는 구나."
"저기... 저 일단 금위대장입니다? 빚지는 게 아니라 폐하를 지키는 게 제 역할이거든요?"
그 말에 금위대장은 능청스럽게 대답하면서도 충격에 굳은 표정인 리아와 그녀의 동생인 리안을 쳐다보았다.
"이 둘은 어쩔까요?"
금위대장의 질문에 황제는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위, 위 형님! 이 모든 건 누님이..."
"흠..."
황제는 덜덜 떨면서 리아를 팔아먹는 리안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어쩌는 게 좋을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황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푸아악!
"뭐, 짐의 검은 답을 알고 있는 듯 하구나."
"리안!"
리아는 황제의 검에 목이 날아간 자기 동생을 보면서 비명을 질렀다.
"리안... 리안... 어찌 이렇게..."
한참 그 시체를 매만지며 떨던 그녀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며 외쳤다.
"이 괴물!"
"...괴물을 적으로 돌리면 죽을 건 각오를 했어야지."
황제의 덤덤한 대답에 리아는 눈을 감았다.
이제 저 검이 자신을 죽일 거라는 걸 직감했으니까.
철컥.
그러나 황제는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애초에 황제는 그녀를 죽일 생각이 없었으니까.
"왜, 왜! 나도 죽여라! 죽이란 말이다!"
그 모습에 리아가 발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죽고 싶었다.
적어도... 황족으로 죽고 싶었다.
"그대에겐 죽음조차 자비다. 곱게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황제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그녀를 황족으로 둘 생각이 없었으니까.
우득!
"커억!"
그녀의 단전을 부순 황제는 싸늘하게 말했다.
"넌 이제 오페아 가문으로 팔릴 거다. 그곳에서 황족이 아닌 일개 전리품으로, 그저 자신이 예전엔 황족이었다는 자부심을 위안 삼아 버티며 살아가겠지. 그게 짐이 그대에게 내리는 처벌이다."
"죽여... 제발 죽이란 말이다."
리아는 그 말에 차라리 죽이라고 발악하듯 외쳤으나 황제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피를 토하는 그녀를 조롱하며 황제는 검에 묻은 피를 닦았다.
행사는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중단해야 할듯 싶었다.
"민간에 첫 모습을 드러내는 행사부터 이런 꼴이라니 상황이 우습구나."
황제가 자신을 겁에 질린 얼굴로 보고 있는 시민들을 보면서 중얼거리자 모용진은 웃었다.
"폐하와 잘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비꼬는 것도 많이 늘었어. 이 건방진 녀석."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딱히 금위대장을 처벌하진 않은 황제는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길을 걸었다.
"모용진."
황제는 그런 시선들을 감당하면서 금위대장의 이름을 불렀다.
원래는 이 거리에서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야만족에게 빼앗긴 영토를 빠르게 수복하고, 제국을 안정시키겠다는 연설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숙청의 칼을 뽑아 이곳저곳 바쁘게 돌아다니는 틈에 제국을 선전포고도 없이 쳐들어온 야만족들은 이미 제국의 영토 일부를 점령하여 무자비한 약탈을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금위대는 전부 뽑았느냐?"
"네, 백부장은 폐하께서 요청한 인물들로, 나머지는 자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크라이스...? 이쪽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만..."
마법부대는 또 뭐고? 크라이스는 처음 들어 보는 마법사였다.
그렇기에 모용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고 황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짐이 보기에 쓸 만하여 그자는 따로 뽑았다. 불만이냐?"
그건 우연한 만남이었다.
즉위식을 보러 온 어느 마법사 하나가, 그 잔혹한 광경을 보고도 눈을 반짝이고 있기에 관심이 갔을 뿐이었다.
그 마법사가 뜻밖에 실력도 빼어났으니 안 쓸 이유가 없었을 뿐.
"겔만에서 소외된 마법사들을 규합해 하나의 부대를 만들 정도니 그 능력은 입증한 셈이지."
마법을 쓰는 방법이 과격하다 하여, 혹은 그 출신이 미천하다 하여, 소외된 마법사들을 규합해 하나의 부대를 만들어 낸 수완만 봐도 크라이스는 한 부대의 대장을 맡기엔 충분한 자였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모용진은 머리를 긁적이고는 말했다.
"야만족의 군세를 상대하기에 적은 수입니다."
이렇게 뽑은 금위대는 급하게 뽑아서 그런지 훈련 상태는 엉망이었고, 솔직히 그 수도 너무 적었다. 그렇기에 모용진은 걱정스러운 반응이었다.
"짐과 그대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그러나 황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모용진도 그 말을 부정하진 못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황제와 자신이 있으면 수의 차이 정도야...
"모용진."
그때 황제가 공포로 떨고 있는 백성들을 보면서 말했다.
"혹... 짐이 완전히 피에 먹힌 폭군이 된다면 말이다."
황제는 덤덤하게 그의 검을 자기 목에 가져가며 말했다.
"그대의 검으로 짐을 치거라."
"...폐하."
모용진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그 검을 그대로 다시 회수하려고 했다.
꾸욱!
그러나 황제는 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확답을 바라는 듯이 모용진을 보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꽈악!
그걸 본 모용진은 황제가 잡은 검을 손으로 꽉 잡았다.
손에선 피가 흘렀으나 모용진은 자신의 검에서 손을 떼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폐하. 전 폐하의 검입니다. 설령 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 자신을 잃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눈엔 한 치에 흔들림도 없었다.
"폐하를 베는 일은 없습니다."
그 말에 황제는 기가 막혔다. 누구는 짐을 죽이고 싶어서 난리거늘.
이 녀석은 죽이기 싫다고 아우성이었다.
"...하여간 고집쟁이 같으니. 알았다. 알았어."
결국 황제가 두 손을 들었다.
"과잉 충성이다."
"당연한 걸 그리 말하는 폐하가 이상한 겁니다."
투덜거리는 모용진을 보면서... 황제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인데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이 삭막한 곳에서 그대가 있어서 다행이야."
생각해 보면 황제가 완전히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뒤에서 자신을 믿어 주는 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를 보면서 미쳐가면서도 끝내 원래의 목적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가 뒤에서 묵묵히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에게 모용진은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이정표였고, 광기 속에서도 바른길을 갈 수 있게 도와주는 등대였으니까.
--
"..."
뇌천왕은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을 보았다.
요괴에게 인간은 적... 그런데...
'베고 싶지가 않군.'
뇌천왕은 우습지만 그들이 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황제를 베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황제를 베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 하는 자신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뇌천왕은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혼란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무엇이지?
과거의 기억이 전혀 없다.
그저 자신은 혼천대성이자, 뇌천왕이며, 황제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황제..."
어딘지 모르게 몹시 그립고, 그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속 혼란은 더욱 커져만 갔다.
대체 어떤 자일까?
그의 흔적을 쫓으며 그 경지를 헤아려보면... 일단 무시할 수 없는 강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
무엇보다도 전혀 기를 숨기지 않았기에 느낄 수 있었다.
극도로 제어하고 있지만, 딱히 숨기지 않고 그 존재감을 과시하는 거대한 기운을 말이다.
저게 인간의 황제가 내뿜는 기라는 건 바로 알았다.
그런데... 어찌 알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리 거대한 기라고 하나. 그게 황제의 기라는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뇌천왕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기를 황제의 기로 받아들였다.
그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뇌천왕은 그리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럼 직접 확인해 보면 안 될까?
"..."
무의식적으로 관도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춘 뇌천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곧 있을 전쟁에서 확인하면 될 일이다.
그 전에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었기에 뇌천왕은 검은 구름을 만들어서는 그대로 올라탔다.
"뇌천왕 모용진... 모용진..."
그대로 이동하면서 뇌천왕은 자기 이름을 몇 번이고 중얼거리고는 그런 자신의 이름보다도 먼저 떠올랐던 이름을 중얼거렸다.
"진위..."
진위는 대체 누구지?
모용진이 자신이라는 건 이해했다.
그런데 진위는? 모르겠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하나 확실한 것은 있었다.
'중요한 사람.'
자신보다도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것.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것.
그렇기에...
"진위..."
뇌천왕은 그 이름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더 이상... 그 무엇도 잊고 싶지 않았으니까.
--
"그래... 어느새 때가 다가왔구나."
그 후로 시간이 흘러, 흘러. 어느새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내일 평원으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던 황제는 마리아를 보며 말했다.
"굳이 그대가 짐의 이동을 도와주지 않아도 될 텐데."
"본녀가 회임한 몸이라 걱정이 되느냐? 걱정 말거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본녀 몸 하나 정도는 지킬 힘은 있으니."
그 말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태교에 안 좋을 거 같아서."
황제가 뭐 하러 그녀를 걱정할까? 그녀가 작정하고 몸을 지키려고 하면 황제도 뚫기 어려운데.
그가 걱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거였다.
"이번엔 짐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거 같거든."
모용진에 대한 소식은 그 뒤로도 여러 번 나왔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가 발견된 곳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곳이라서...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 결과 황제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요괴들이...
"짐은 화가 많이 나서 말이다."
모용진의 시체를 이용하는 게 분명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황제는 그의 강함을 잘 알았다.
그 정도의 강자를 살아 있는 채로 요괴로 만들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요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쌍둥이가 찾아낸 책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용진이 그들의 손에 떨어졌다면 아마도 시체로 만드는 강시가 가장 유력했다.
"...그들에겐 재앙이겠구나. 그대의 화를 재촉했으니. 알았느니. 본녀는 그대를 이동만 시키고 빠지면 되는 거 아니냐."
"언제나 신세만 지는구나."
황제는 솔직하게 감사를 표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의 유능함에 많이 기대고 있었으니. 당장 이미 대평원에 이동한 병력도 전부 그녀가 옮겼다.
솔직히... 고마운 일이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이동이 조금 더 번거로워졌을 것이다.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필요가 없지 않느냐? 아무튼 조심하거라. 그대가 다치는 모습은 상상조차 가지 않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마리아의 걱정스러운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죽지 않고 돌아올 것이다."
"그건... 조금 힘들지 않겠느냐?"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요괴다.
사실상 제 2의 인마 대전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대전쟁일 텐데...
황제가 그런 요괴를 상대로 가용한 병력은 최근 포함된 주술 부대 500명을 더한 금위대 2천 명이 전부다.
요괴의 병력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는 없으나... 아무리 못해도 몇 만은 될 것이 자명할 터.
다른 것도 아닌 요괴를 상대로 인간이 어느 정도 잘 싸울 수 있을지도 예상이 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마리아는 걱정스러웠으나 황제는 걱정하지 않았다.
"짐은 금위대를 믿는다."
그리 답한 황제는 눈을 감았다.
비록 이젠 금위대장은 없지만...
그래도 황제에겐 금위대가 남아 있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황제는 이길 생각이었다.
[폐하를 베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이 말이 떠오르는 걸까?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역시... 그대를 베고 싶지 않다.'
그 어떤 상황이라도, 황제는 그를 베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로 인해서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말이다.
--
먼 옛날이다.
하늘은 맑았고, 인간들은 시끄러웠다.
"제국인가... 그게 가능할 거로 생각하나?"
그 시끄러운 인간 중에서도... 유독 시끄러운 남자가 있었다.
"이봐 원숭이 친구. 꿈은 크게 가지라 하지 않나."
"누가 원숭이 친구야! 미후왕이다. 미후왕! 뭣하면 제천대성이라 부르라 했잖아!"
미후왕.
제천대성의 말에 남자는 맞은 머리를 어루만지며 웃었다.
윤기 넘치는 흑발에, 천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증표인 금안을 반짝이는 이자가 바로 천왕국의 왕.
얼굴은 그야말로 한 폭에 그림 같거늘. 그 진지하지 못한 성격과 저주받은 주둥아리는 사람의 속을 긁어 놓는데 소질이 있었다.
"이딴 게 인간의 왕이니까 그 모양이지."
"곧 황제가 될 거라니까?"
천왕국의 왕이 투덜거리면서 말하자 제천대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는 여인에게 따졌다.
"이 녀석이 맞아? 잘못 고른 거 아니야? 인간 통합은커녕 분열만 일으킬 거 같은데? 어이! 늙은이! 대답을 하..."
따악!
그 순간 허허 웃고 있던 금발의 여인이 제천대성의 머리를 후려쳤다.
"누가 늙은이야! 네놈은... 하아! 정말이지 신에 대한 공경심이 없구나."
여인이 그 말에 화를 내면서 그 금안을 반짝였다.
주변에서 흐르는 뇌기는 그녀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신은 얼어 죽을. 천신. 천신. 하니까 자기가 진짜 신인 줄 아네."
투덜거리면서 퉁퉁 부어오른 머리를 매만지던 제천대성은 그녀의 뇌기로 살짝 탄 자기 금색 털을 가리키며 따졌다.
"이거 봐! 탔잖아! 내 자랑스러운 털 어쩔 거야!"
"흥! 알게 뭐란 말인가? 아무튼 싸우지 말거라. 모처럼 내가 선택한 두 아이가 싸우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구나."
선택.
그렇다.
제천대성과 지금 앞에 있는 이 인간의 왕은 저 여자에게 선택받은 존재였다.
"요괴를 통합하여 이끌 아이와 인간을 통합하여 이끌 아이. 둘이 힘을 합쳐야 평화로운 세상이 되지 않겠느냐."
바로 요괴를 통합하여 이끌 왕과, 인간을 통합하여 이끌 왕으로...
천신이라 불리게 되어서 신성을 손에 넣은 존재에게 선택 받았으니까.
"평화... 참 달짝지근하네. 그게 되겠어?"
제천대성은 여전히 그들의 의견에 회의적이었다.
요괴와 인간은 다르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듯, 요괴와 인간도 섞일 수 없다는 건 자명해보였다.
"평화 좋지 않습니까? 요괴와 공존하는 것도 가능할 거로 생각해요. 이미 용과는 공존하고 있잖아요."
"어이... 용 녀석 비위를 맞춰주는 게 공존이냐?"
제천대성은 그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둘 다 정상이 아니다.
공존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조금은 어울려주지. 그래서 어떻게 하는 건데?"
조금은 이 녀석들하고 같은 꿈을 꿔도 되겠지.
그때는 그런 생각했다.
정말이지... 바보 같은 생각을 말이다.
--
"...그 개자식 꿈을 꿀 줄은 몰랐는데."
유일하게 자신이 마음을 열었던 인간 남자에 대한 욕설을 내뱉으며 제천대성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 녀석의 이름이 여전히 기억에 생생했다.
그래서 더욱... 이번 전쟁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공존... 이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과 요괴의 공존은 실패했다.
인간은 요괴의 다름을 두려워했고, 일부 요괴는 인간을 먹고 싶어 했다.
그 일부 요괴가 인간을 습격하기 시작하자 갈등이 생겼고, 그 골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깊어졌으며, 결국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게 되었다.
요괴는 일부의 잘못으로 자신들을 증오하는 인간이 싫었고, 인간은 인간을 잡아먹으면서 반성도 하지 않는 요괴라며 그들을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그 증오는 점점 커졌고, 결국 인간의 황제와 요괴의 우두머리는 결정을 내렸다.
둘은... 공존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 뒤로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요괴가 유리해지는 형국이 되었다.
인간은 약했고, 그렇다고 수에서 요괴를 압도하지도 못했다.
그때... 그녀가 개입했다.
'어째서...'
그녀는 왜 인간을 선택했지?
왜 하필 인간이었을까?
아니... 사실 알고 있었다.
'너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거겠지.'
신성을 품은 인간.
그로 인해 신이 되었다고 해도 결국은 근본을 배신할 수는 없었던 것이겠지.
그렇기에 그녀를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원망하는 자신이 있었다.
이해와 원망이 공존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제천대성은 그리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엔... 너한테 지지 않을 거다.'
제천대성은 이따금 그 녀석과 지금 인간의 황제를 겹쳐보고는 했다.
물론 그는 지금 황제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른다.
성격도, 얼굴도, 그 강함도 그저 편린만 느꼈을 뿐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더욱 그와 겹쳐보는 걸지도 모르겠다.
제천대성에게 황제는 사실 그 녀석 한 명 뿐이었으니까.
[우린 함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자신을 향해 그렇게 말하던 녀석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배에 난 상처가 욱신거리고는 했다.
'요괴와 인간은 공존할 수 없어.'
이젠 안다.
뼈저릴 정도로 안다.
그러니까...
'이번엔 우리가 이긴다.'
제천대성은 눈을 감았다. 그때와 다르게 이번엔 지지 않을 거다.
그런 생각하며 제천대성은 평원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의 군세가 보였다.
'고작 2천 정도...'
터무니없이 적은 수이다.
그렇다고 질적으로 우세하나? 인간 중에선 제법 정예군이긴 하다.
단순한 병사조차 일반 요괴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 수가 터무니없이 적다.
이게 정말 황제가 짜낸 전력이라면...
'우리의 승리다.'
제천대성은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격차. 게다가... 자신에겐 이미 금위대장도 있었다.
그러니까...
제천대성은 드디어 요괴가 인간에게 승리할 날이 온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