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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102화 (102/235)

"폐하께서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까?"

낡은 안경을 고쳐 쓰며 고리타분한 학자 느낌이 물씬 나는 청년은 자신을 찾아온 여인에게 되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아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은 분이었지요. 어떤 의미에선 슬픈 분이기도 했어요."

"...?"

남자의 대답에 여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황제의 소문과는 조금 많이 달랐으니까.

"사실상 쫓겨난 거 아니었어?"

그녀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묻자 남자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쫓겨나다니요. 오히려... 제가 죄송한 짓을 했지요."

남자.

아니 카무란은 그때를 회상하며 죄송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님. 폐하는 소문처럼 무서운 분은... 맞지만. 좋은 분이십니다."

무서운 사람이라는 건 차마 부정하지 못한 카무란은 자기 사촌 누나를 보면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무서운 사람은 맞다는 거네. 흐음... 어쩌지?"

그 말에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면서 고민에 빠졌다.

"그러면 역시 거절 당할 확률이 높을까?"

그녀는 안경을 벗어서 내려놓고는 피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두꺼운 안경을 벗자 모습을 드러낸 특이한 하늘색 눈동자가 조금 탁한 빛을 내면서 흔들렸다.

추욱 늘어진 그녀를 보면서 카무란은 덤덤하게 말했다.

"로라 비 전하께 지원해 준 예산의 규모를 생각해 보면 거절 당할 확률은 그리 높아 보이진 않지만요... 그러고 보니 미령 누님이 비로 계시니 그분께 조언을 들어 보는 건?"

"아... 미령이가 있었지. 흐음..."

긁적! 긁적!

피곤한 얼굴로, 엉망인 검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그녀는 가만히 고민에 빠졌다.

"먼저 미령이부터 만나볼까?"

"...전 그럼 모처럼 황궁에 왔으니 폐하를 뵈러 가 보겠습니다."

카무란이 의자에서 일어나선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내 이야기 좀 잘해줘."

"...일단은 해 보긴 하겠지만 많은 기대는 하지 말아 주세요."

카무란은 그리 말하고는 사라졌고, 그녀는 그대로 의자에 기대고 앉아서는 천장을 보았다.

"흐아암... 뭔가 졸리네."

밤새 회로 연구를 해서 그런가? 눈이 감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의자에서 쪽잠을 잘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늘어지는 모습은 여전하네. 타흘라."

그때였다.

그런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 보면서 미령이 바로 앞에 앉았다.

"안녕? 여전히 건강해 보이네."

그런 미령에게 힘없이 손을 흔들면서 인사한 그녀는 미령이 한숨을 쉬자 민망한 듯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하하... 뭔가 편해서. 황궁은 좋네."

의자도 푹신하고, 그녀가 그런 변명을 하면서 웃자 미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로라 비가 만나고 싶은 눈치던데? 생각은 있어?"

미령이 그녀의 흐트러진 옷을 정돈해주면서 이곳에 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로라? 갠 잘 지내나? 뭐, 만나지 뭐.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주술사면서 마법사이기도 한 이단아.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몇 안 되는 친구인 로라를 떠올리며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 녀석 공방 하나를 받았다면서? 구경이나 가야겠다. 안내해 줄래?"

로라가 받은 공방은 어떨까?

그 공방을 보면 황제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을 거 같았기에 그녀는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로라랑 별로 안 친한 거 같다? 내가 소개장 써 주지 않았어?"

"바빴어."

미령은 간단하게 답하고는 걸으면서도 분주하게 뭔가를 적고 있었다.

"예산 편성?"

"폐하께서 비와 관련된 모든 예산의 배정을 나한테 맡기셨거든."

최근 미령이 바쁜 이유가 그것이었다.

쌍둥이들이 맡게 된 황실 상단의 할당되는 예산 배정, 그리고 로라의 공방에 들어가는 예산 편성, 여화와 레오니가 단련하면서 부순 건물 수리비... 그 외에도 비와 관련된 일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예산 편성은 전부 그녀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여기저기서 예산을 끌어오고 분배하는 역할을 하다 보니까 미령은 좀처럼 시간을 내는 게 힘들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우와... 이 정도까지 지원해 줘?"

"세이나 비께는 아예 백부장 둘을 붙여 준 적도 있는데 뭐. 걱정하지 마. 네가 원하는 것도 들어 주실 거야."

"..."

미령의 말에 그녀는 멈칫했다.

"좀 많이... 비싼데도?"

그녀가 바라는 것을 위해선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든다.

그래서 그녀는 황제를 만나기 위해서 조금 억지를 부려서라도 합궁 상대가 되었다.

비가 되어서... 황제를 만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폐하는 좋은 분이시니까."

미령의 신뢰가 가득한 말에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이 미령을 보며 말했다.

"...그거 이미 들었어."

벌써 오늘만 두 번째 듣는 말이다.

그녀는 그런 생각하면서 미령에게 등에 매달려서 걸었다.

미령은 짜증을 내긴 했지만, 그런 그녀를 매달고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어떤 사람이길래...'

카무란도, 미령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녀는 조금... 황제란 남자 자체에 흥미가 생겼다.

--

"말했잖아요! 제작에 드는 비용이 이 정도면 그 가격으로는 남는 게 없다고요!"

리사가 화를 내자 로라는 흔들리는 눈으로 변명했다.

"하, 하지만 당장은 이 정도가 한계..."

"시간하고 예산만 주면 이 가격까지 낮출 수 있다고 말한 게 누구였지요?"

"...그, 그게 그건! 콰, 콰오콴! 어쩌지?"

로라가 다급하게 콰오콴을 찾자 한참 공구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있던 콰오콴이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전 아직 마법공학은 배우고 있는 입장이라. 잘 모르겠네요."

"배신자!"

로라가 배신당한 얼굴로 외치자 리사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하... 어쩔 수 없죠. 일단은 방향성을 수정하는 쪽으로 가야겠어요. 대중화는 무리인 거 알죠? 가격이 너무 비싸요."

고급화 전략으로 가야겠다.

리사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로라가 반발했다.

그녀는 이 가격에서 타협할 수 없었다.

이게 그녀가 생각한 대중이 구매할 수 있는 정도의 합당한 가격이었으니까.

"그, 그건 안 돼! 난 많은 사람이..."

"그러면! 가격을 낮추라고요! 땅 파서 장사할 건가요?"

"으으... 그러면 시간을 좀 줘! 곧 그 녀석이 오니까 그 녀석의 도움을 받으면..."

"그 녀석이요?"

리사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 녀석이라니? 누가 오는 건가?

"폐하한테 들었어... 이번 합궁 상대가 타흘라라면서? 그 녀석이 오면 좀 더 빨라질 거야. 진짜로!"

타흘라?

"아... 그 이단아 말이죠?"

리사는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주술사면서... 마법에도 손을 댄 주술사의 이단아.

그래서 차세대 주술사 중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던 그녀는 주술계에서도 배척을 받게 되었고, 그 천재 주술사란 수식어는 이제 나르타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천재성은 양쪽에서도 인정할 정도였으니까.

그 대마법사에게 천재성을 인정받은 유일한 주술사라는 수식어가 그녀의 재능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 학회에도 잘 출석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요..."

니사도 그녀가 거론된 게 꽤 의외인지 의문을 표시했다.

학회에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의 성격 때문에 그녀를 실제로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면... 이 정도까진 기다려줄 수는 있을 거 같네요."

아무튼 그녀의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기에 리사는 어느 정도 여유를 주었다.

"역시! 리사는 좋은 사람이야."

"다, 달라붙지마요! 정드니까요!"

자신을 꽉 껴안는 로라를 밀어내면서 리사는 투덜거렸다.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긴 하네.'

로라를 떼어내면서 리사는 타흘라란 여자에 대해서 상상했다.

어떤 여인일까?

워낙 알려진 게 없는 여인이라서... 솔직히 한 번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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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거라."

황제는 모처럼 자신의 집무실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들에게 차를 내주면서 자리에 앉았다.

"폐하께서 직접..."

카무란은 그 모습에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삭막하던 집무실에선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겼고, 황제의 차를 우리는 모습에는 익숙함마저 느껴졌다.

전부... 카무란이 황궁에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요새 자주 하더라. 그보다 카무란 너 안색이 그게 뭐야. 아직도 책 읽는다고 밤새?"

대모를 의자 삼아 앉아 있던 미친왕이 카무란을 향해 말을 걸자 카무란은 난처한 웃음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그렇지요. 그보다 그 의자는?"

카무란은 얌전히 인간 의자 역할을 하고 있는 대모를 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솔직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아, 범죄자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러나 카무란은 범죄자라는 대답에 바로 관심을 껐다.

당장 황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자업자득이겠지.

"모처럼 형제가 다 모였구나."

가장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은 황제의 말에 사나운 인상의 붉은 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눈매가 날카롭긴 했지만, 그 금안이 그의 출신을 증명하고 있었다.

"형님이 날 부르길래 난 죽이려고 하는 줄 알았잖아. 카무란이 왔다고 부른 거였어?"

그 붉은 머리의 남자.

관동에서 가장 큰 도시인 제천을 맡고 있는 라오허는 그렇게 말하고는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살아남은 형제 중에선 다 모이긴 했네."

황족이 아니게 된 사람들이나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형제가 모인 자리다.

카무란은 루아 가문의 사람으로 살아가겠다고 했으나 황제는 그 부탁을 들어 주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이 자리는 현재 진이란 성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전부 모였다고 볼 수 있었다.

"라오허. 일은 잘하고 있느냐."

황제가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는 묻자 라오허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할 게... 있나? 그냥 멍하니 시간만 보내고 있지. 가끔 사창가도 가고."

"그런데 갈 거면 궁녀 몇 명 데려가라니까. 돈 아깝게. 뭣 하면 이거 빌려 줘?"

라오허의 대답에 미친왕이 대모를 가리키며 제안하자 라오허는 욕설을 내뱉었다.

"너랑 구멍 동서는 사양이다. 새끼야."

"하여간... 입은 더러워선. 쳇. 나도 사양이야. 임마."

"하하! 여전하네요."

카무란은 그런 둘의 모습이 익숙한지 허허 웃으면서 차를 마셨다.

황제는 애초에 그런 놈들이라는 생각에 신경도 쓰지 않으며 덤덤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향이 좋군요."

키무란은 차의 향에 감탄했다.

처음 보는 차인데 향이 아주 좋았으니까.

"세헤라자드가 가져 왔더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살며시 미소를 짓는 황제를 보면서 카무란은 조금 놀랐다.

"폐하께선 뭔가... 부드러워지셨습니다?"

예전 황제와 달랐다.

카무란이 알던 황제는 늘 날이 서 있었고, 언제 미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 보이나?"

부드럽게 웃으면서 대답하는 황제의 모습에선...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여유가 느껴졌다.

"아, 나도 결혼이나 할까?"

그걸 보면서 라오허도 뭔가 느끼는 게 있는지 작게 중얼거렸고, 미친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다고 뭐 변하던가...?"

"...그래, 널 보니까 안 변하는 거 같기도 하다."

"왜 자꾸 시비야!"

그런 미친왕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라오허가 말하자 미친왕은 화난 얼굴로 성질을 냈고, 황제는 그런 둘을 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둘 다 비슷한 놈들이 가지가지 하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둘 다 망나니인 건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요."

"..."

둘은 순식간에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으나 카무란에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검도, 주술도, 마법도 다루지 못 하는 둘과 달리 카무란은 유능한 주술사.

괜히 까불었다간 본전도 못 찾을 거라는 걸 둘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표정 풀어라."

게다가 황제의 비호까지 받고 있으니 둘은 애써 웃었다.

"에이, 형님! 우리가 그런 거로 감정 상하겠습니까? 그렇지? 라오허?"

"물론이지. 민이하고는 친해서 그런 겁니다. 하하!"

"그래, 둘이 똑같으니 친할 수도 있겠지."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 아니겠습니까?"

후룩.

느긋하게 차를 마시면서 말하는 둘을 보면서 미친왕과 라오허는 서로에게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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