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참."
리처드 고드프리는 이 움직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했다.
야만족이 전사를 왜 국경에 배치하지? 이 움직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황제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일단 이 국경에서 모든 군사적 행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전원 경계 태세. 이 라인을 넘는 순간 쏴도 된다."
결국 리처드는 결정을 내렸다.
야만족의 움직임은 누가 봐도 위협적이다.
이게 일부의 생각인지 아니면 그들의 총의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처드는 자신이 충분히 참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선을 제시하기로 했다.
이 선을 넘는다면 가차 없이 사살하겠다고.
'복수의 굴레는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어려운 일이었나.
리처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부디 이것이 자기 기우이길 바랐다.
그는 전쟁보단... 역시 평화로운 게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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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크릴라이족의 수장인 칸은 백부장들의 외침에 머리가 아파 왔다.
그들의 조급함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으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순번이... 마지막이라고 하지 않느냐. 그들에게 속하기로 했으면 그들의 규칙을 따르는 게 맞다."
"이건... 저희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황제는... 어쩌면 우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릅니다."
"맞습니다. 어쩌면 뒤에서 우리를 쓸어버릴 준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요!"
흥분한 백부장들의 말을 들으면서 칸은 머리가 아파왔다.
'바보 같은...'
물론 칸 역시 합궁이 꽤 길게 늘어지고 있다는 건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이해하는 칸과 달리 전사들을 이끄는 백부장들은 불안을 숨기지 못했다.
몇몇 과격한 이들은 이미 국경에 자신 휘하의 전사들을 배치하면서 결사항전을 준비 중이었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당장 국경 방위 사령관이 누군지 알고는 있는 건가?'
전장의 사자.
크릴라이족에겐 제국에서 온 도살자라고 불리는 괴물이 웅크리고 있었다.
괜히 그를 자극해선 좋을 게 없을 텐데... 실제로 그쪽에선 국경에 전사를 배치하는 행동이 일정 선 이상을 넘어오면 즉각 사살하겠다는 엄포를 늘어놓았다.
물론 그로 인해 백부장들이 더욱 불안해 하고 있는 건 칸도 알고 있었다.
'어렵구나. 어려워.'
그렇게 칸의 걱정이 깊어지고 있을 때, 급하게 달려온 사자가 칸에게 말했다.
"칸! 국경에 나가 있던 전사들이 공격 당했습니다!"
"...허."
결국 일이 터졌군.
칸은 그리 생각하면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듣기 위해 일단 지친 사자에게 물을 주었다.
부디.. 이 일이 커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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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족의 움직임이?"
황제는 통신 마도구로 보고하는 리처드를 보면서 물었다.
식량을 좀 지원해주었더니 얌전해진 녀석들이 왜 갑자기? 황제는 그들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제 목숨을 깎아먹는 미련한 짓을 할까?
[그렇습니다. 일단 선을 넘은 전사들을 몇 사살했습니다.]
"...그건 그들의 총의인가? 아니면 소수의 일탈인가?"
황제는 솔직히 기회라고 생각했다.
알량한 화평은 집어치우고 전쟁하자고 말하는 게 그들의 의지라고.
그래서... 그 증오스러운 피를 대륙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게 황제의 본심이었으니까.
물론 그 본심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보고 중에도 이상한 말투를 고집할 생각은 없는지 리처드는 뜻밖에 정상적인 말투로 보고를 이어갔다.
[일단 병사들에겐 경계를 강화하라고 지시해 두긴 했습니다만...]
그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처드의 대처는 딱히 흠잡을 필요도 없이 깔끔했다. 그래도 일단은 평화가 우선이다.
전쟁 같은 건 없는 게 좋다는 건 황제도 익히 잘 알고 있었으니까.
"좋다. 그들이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면...."
물론 그건 이상적인 이야기. 만약 그들이 전쟁을 원한다면... 황제는 참을 생각이 없었다.
"전부 죽여도 좋다."
그렇게 말한 황제는 가볍게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알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좀 남겨드립니까?]
리처드의 대답에 황제는 피식 웃었다.
"아니, 그들의 행동이 소수의 일탈이 아니라고 한다면. 남길 필요는 없다."
황제는 모처럼 잔혹함을 드러내며 말했다.
"대륙엔 이미 사람이 많구나."
그건 즉 그들을 전부 죽여도 상관없다는 이야기.
그렇기에 리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찌 될까?'
과연 그들은 어리석을까? 아니면 현명하게 소수의 일탈이었다 주장하며 머리를 조아릴까?
황제의 이성은 후자를 바라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그 속마음은 솔직히... 전자이길 바라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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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너일 줄은."
비 후보가 만남을 요청했다는 말을 듣고 불려온 대흘은 전혀 예상 못한 손님을 보고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 대흘의 앞에 있는 것은 호복을 입은 여인이었다.
머리는 진한 갈색이었고, 눈 역시 그러했다.
한쪽 눈에는 큼직한 상처가 있어서 애꾸였으나, 그런 상처가 그 외모를 가리지는 못할 정도의 성숙한 느낌이 드는 미인으로, 발달한 팔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오라버니께서 그렇게 칭찬하지 않으셨습니까?"
"...너한테 과분하신 분이다."
대흘의 단호한 대답에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저 나름대로 오랑카이에선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인데요."
대궁사.
그것이 오랑카이에서 그녀가 가지고 있던 직책이었다.
대궁사란 오랑카이에서 가장 우수한 궁사에게 주어지는 자랑스러운 칭호로, 그녀는 오랑카이에서 가장 우수한 궁장이었다.
당장 대흘이 쓰는 활을 만든 자도 그녀였으니까.
"뭐... 폐하의 상대로는 그 어떤 여인이라도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넘어가지요."
그러나 그녀는 이해하기로 했다. 확실히 황제에 비하면 대궁사란 직책도 빛이 바래는 게 사실이니까.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폐하께 누를 끼칠 까 두렵구나."
"...다음부턴 다른 데서 활을 알아보세요."
완전히 삐진 그녀의 대답에 대흘이 움찔했다.
솔직히 그녀의 활보다 좋은 걸 구하긴 힘들었으니까.
"미안하다. 실언을 했군."
결국 대흘이 사과했고, 그녀는 그런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정말이지. 그보다 오라버니가 그리 말할 정도의 사람이면 기대는 되네요."
저 사람을 평가하는데 인색하기 그지없는 오라버니의 평가가 저 정도면 대체 어떤 사람일까?
자신이 만든 걸작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일까?
그러면 좋겠는데...
그녀는 그런 생각하면서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셨다.
"폐하께선 활을 다룰 줄 아시나요?"
"...나보다도 잘 다루지."
대흘에 대답에 그녀는 만족했다.
그녀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활잡이가 바로 대흘이었으니까.
그런 대흘보다 뛰어난 활 솜씨를 지녔다고?
그건...
'어쩌면 이걸 다뤄줄 수 있을지도.'
그녀는 자기 뒤에 고이 모셔둔 걸작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 어떤 궁수도 다루지 못한 물건이지만... 어쩌면 폐하께선 다뤄주실지도 모른다.
모든 물건은 결국 사용할 수 있어야 그 가치가 있는 법.
그녀는 모처럼 만든 걸작을 누군가가 다뤄주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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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시할 수 없습니다! 당장에라도 늦기 전에 전사들을 총동원해야 합니다."
전사 셋이 목숨을 잃은 사건에 백부장들은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국경에 병력을 배치한 것만으로 바로 반응해온 것부터가 이미 그들이 전쟁을 준비 중인 증거라며 그들은 늦기 전에 결사항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허나... 확실히 과한 배치였던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들이 제시한 선을 넘은 건 우리 전사들이라고 하니 이 경우엔 오히려 지금의 행동을 사죄하고 숙이는 편이..."
물론 모두가 그런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이성적으로 상황을 보고 판단하려는 백부장도 분명 있었다.
칸은 머리가 아파왔다.
이 상황에서 전쟁?
'다 죽자는 이야기지.'
그야말로 크릴라이의 피를 가진 자들이 이 대륙에서 사라지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다.
"그만! 이번 건 우리의 과실이 크다. 오히려 책임자의 목을 베어 사죄하는 것이 맞겠지."
그렇기에 칸은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 일은 소수의 일탈로 처리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적어도 칸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칸! 정녕 겁쟁이가 되어 버린 겁니까?"
"어쩌면 이미 제국에게 심장을 바친 것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많은 백부장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결정에 많은 백부장들이 실망했다.
화평이 필요하다는 것도, 제국을 자신들은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도, 그들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늘 불안했다.
그렇기에 제국의 확실한 대답을 기다렸고, 그렇기에 합궁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합궁을 더욱 더디게 하는 것으로 응해 왔다.
다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그게 이렇게 합궁이 밀릴 정도의 사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지금쯤이면 이미 모든 합궁이 끝났어야 했다.
크릴라이족은 합궁 이후 완전한 제국인으로 받아 들여지고, 그들의 문화를 공유하게 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지금 합궁은 절반도 채 진행되지 않지 않았다. 이건 황제가 노골적으로 시간을 끌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황제는 지금 노골적으로 우릴 홀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사의 명예와 긍지마저 버리고 투항을 맹세했는데 그걸 외면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걸 참는다면 선조께서도 노할 겁니다!"
"..."
칸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전쟁을 택해 멸망을 택한다면 그것이 선조에게 더 죄송한 일이다."
"칸!"
결국 한 명이 참지 못하고는 검을 뽑았다.
그는 바로 이 사태에 주동자로 전사들에게 제국이 제시한 선을 넘도록 지시한 백부장이었다.
"칸은 겁쟁이며 이미 전사의 심장을 잃었다! 만약 칸이 아직도 전사라면 당당하게 결투로 결정하자."
콰악!
"!"
칸은 자기 발을 밟는 그의 행동을 보고 놀랐다.
이는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하는 행위였으니까.
"칸의 자리를 두고 신성한 결투를 신청한다! 그대가 아직도 전사라면 피하지 마라!"
"그래! 결투로 결정하자!"
"신성한 결투다!"
흥분한 백부장들의 반응에 칸은 눈을 감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좋다. 결투를 받아들이지."
칸은 그렇게 말하고는 칼을 뽑았다.
그런 그의 눈엔 전사의 투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진다면... 쿠릴라이족의 미래가 없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목숨을 걸고 이길 것을 결의했다.
"그대로 네놈의 목을 잘라서 사죄의 의미로 제국에 보낼 것이다."
"겁쟁이 같으니! 역시 그대는 칸의 자격이 없다! 제국에 전사의 혼을 팔아버린 겁쟁이를 죽이고 사라진 전사의 혼을 되살릴 것이다!"
처억!
그 순간 백부장들이 둘을 놓고 빙 둘러서선 결투할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두 명의 전사는 서로의 목숨을 걸고서는 자세를 잡았다.
'여기서 지면...'
죽는다.
서로가 죽음을 각오하며, 서로의 목을 노리고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크릴라이족의 운명을 건 결투가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