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하! 완전히 당해 버렸어. 그보다 이거 너무 편한 걸? 옷도 다 입혀주고. 갈 곳에도 데려다주고, 황궁 살만하잖아?"
공방으로 황제가 던져놓고 간 타흘라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 탁한 눈으로 로라를 보았다.
"그래서 콰오콴도 마법 배우는 거야?"
로라의 옆에서 공구를 만지작거리는 콰오콴에게도 시선을 주며 타흘라가 묻자 로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공구를 다루는 법만. 마법을 배울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다더라고."
로라의 대답에 타흘라는 크게 웃었다.
"아하하! 그거 나 저격한 거야?"
"그렇습니다. 비 전하께서 생각한 대로 입니다."
"어색한 걸 그건? 으음... 그래도 내가 적응해야 하는 부분이겠지?"
콰오콴의 말투가 영 익숙하지 않은지 머리를 긁적이던 타흘라는 작업을 시작했다.
일단 그녀는 도와주기로 한 이상 대충 할 생각은 없었다.
'일할 때는 완전 다른 사람인데...'
로라는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우선 일하는 순간 그녀는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늘 탁하던 두 눈엔 총기가 어릴 정도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로라는 평상시에 그녀는 신용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일하고 있는 그녀는 깊게 신뢰했다.
"저기... 실례할게요."
그때였다.
공방의 문이 열리더니 생각도 못 한 손님이 찾아왔다.
"나르타! 놀러 온 거야?"
로라가 반가운 듯 달려오자 나르타는 순간 그녀가 강아지 같다는 생각했다.
"여기 혹시 타흘라 비가 있나요?"
"나르타...?"
그때 한참 회로를 그리고 있던 타흘라가 그 이름을 듣고는 바로 반응했다.
"아... 이렇게 생겼구나. 예쁘네."
나르타를 보면서 타흘라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엄청난 미인이구나. 보는 것만으로 눈이 좀 호강하는 기분이라서 일단 그녀는 나르타에게 호감이 갔다.
"가, 감사합니다?"
그 반응에 나르타는 조금 당황했다.
솔직히 예쁘다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초면에 저렇게 바로 말하는 경우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보다 엄청... 키 크다.'
나르타가 처음으로 느낀 것은 그것이었다.
그녀는 꽤 키가 컸다.
폐하보다 약간 작은 정도일까?
눈동자는 조금 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성숙함이 느껴지는 미인이었다.
그래서 나르타는 그녀에게도 예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막상 꺼내려니까 조금 부끄러워서 머뭇거리게 되었다.
"그래서 난 왜?"
타흘라가 의자에 늘어진 채 질문하자 나르타는 잠시 심호흡하고는 말했다.
"한 번 만나 보고 싶어서요."
"날?"
타흘라는 그 말에 의외라는 듯이 반응했다.
황제의 비가 자신을 보고 싶어할 이유라면...
"나... 뭐 죄를 지었나?"
타흘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솔직히 워낙 여기저기 사고를 많이 쳐서 짐작 가는 게 좀 많았으니까.
그 모습을 보면서 로라가 바로 독촉했다.
"나다 싶으면 그냥 사과해!"
"흐음... 미안?"
타흘라의 힘없는 사과에 나르타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한 번 만나 보고 싶었거든요. 주술사이면서 마법사라니 신기하잖아요."
"아항! 그런 거였구나. 난 또..."
그 말에 눈에 띄게 안심한 타흘라는 실실 웃으면서 물었다. 솔직히 그녀 같은 반응은 드물어서 조금 더 호감이 생겼으니까.
보통 둘 다 한다고 하면 경멸하거나, 미친 년을 보듯 봤으니까.
"그래서 그 화제의 인물을 실제로 본 소감은?"
"음... 예쁘네요."
"고마워. 다른 건?"
타흘라가 기대로 눈을 반짝이자 나르타는 그녀를 보면서 느낀 점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키가 커요."
"큰 편이긴 하지. 8척은 넘겼을 걸...?"
이 녀석은 땅꼬마인데 말이야.
타흘라는 그런 소리를 하면서 로라를 가리켰고, 로라는 그 손가락을 물어 버렸다.
"아야야야! 아무튼 다른 건?"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 부어오른 손가락을 핥는 타흘라의 질문에 나르타는 그녀를 보면서 대답했다.
"...확실히 대마법사님 말대로 엄청나게 강하네요."
"아, 그런 쪽에 신경 쓰는 편? 나 근데 전투는 한 적이 없어서 자신 없는데? 콰오콴한테도 질 걸?"
타흘라의 약한 소리에 바로 콰오콴이 반응했다.
"아니 전 이래 봬도 주술사 중에선 가장 강한 편입니다만?"
주술사 중에서 순수한 전투력만 놓고 보면 콰오콴을 따라올 자가 없다.
그렇기에 콰오콴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으나 타흘라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 하면서 고개를 갸웃할 뿐.
"전... 타흘라 비하고 친해지고 싶은데요. 그래서 보고 싶었어요."
"그러면 그 말부터 좀 편하게 해 줄래? 나이 같은 건 신경 안 쓰니까."
"네?"
다짜고짜 말을 놓자고 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르타가 순간 당황했으나 곧 어색하게 말했다.
"타흘라?"
"그래, 그럼 나도 편하게 나르타라고 부를 거니까."
"이상한 기분이네. 누군가한테 반말하는 건 처음이라서..."
나르타가 머뭇거리면서 말하자 타흘라는 웃었다.
"처음이야? 그거 기분 좋지?"
"...그러네."
나쁜 기분은 아니다.
나르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웃었고, 타흘라도 웃었다.
그걸 본 로라는 잠시 그들이 웃는 걸 지켜보고는 바로 타흘라의 귀를 잡고는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야기 끝났으면 일!"
"아야야야! 이 작은 악귀 같으니. 그보다 이거 끝나면 확실히 내 일도 도와줘야 한다?"
"알았다고! 얼른!"
재촉하는 로라를 보면서 머리를 긁적인 타흘라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나르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의자에 앉아선 그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늘은... 좀 더 타흘라와 친해지고 싶었으니까.
--
"상단 일은 힘들어 보이네요오."
마리프가 느긋하게 말하면서 리사와 니사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왔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간식이 들어 있는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렇다니까요? 그보다 오늘 간식 시간엔 누가 오나요?"
리사가 간식을 식탁 위에 올려 두며 묻자 마리프는 느긋하게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생각해 보며 입을 열었다.
"음... 일단 설화와 미르예프가 케이크를 완성하면 가지고 올 거고요오. 그리고 여화랑 레오니는 아침 단련이 끝나면 오기로 했네요오. 나르타는 로라의 공방에서 먹을 거 같다고 거절했어요오. 세헤라자드와 마리아 씨는 요가 후에 온다고 했던 거 같네요오."
"그... 좀 빨리 아니예요. 그리고요?"
조금 답답함을 느끼던 리사는 이게 그녀 나름대로 빨리 말하는 거라는 걸 기억해내고는 재촉하는 걸 포기했다.
"케르는 아마 두목하고 같이 온다고 했는데요... 이 두목이라는 건..."
"여화 씨잖아요. 그리고요?"
"아, 그랬죠오. 아무튼 미령 씨는 시간이 나면 오겠다고 했지만요오. 아마 공방에 가지 않을까요오? 아! 달리아는 사냥하러 떠나서 없네요오. 세이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요오."
마리프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네, 이게 다랍니다아."
"그렇군요. 그래도 생각보다 많이 오네요. 아! 그러고 보니 폐하는..."
혹시 폐하께서도 와주실까?
그런 묘한 기대를 했지만...
"일로 바쁜 모양이네요오. 이번에도 비 후보를 만나 본다는 이야기가 있던 걸요오."
"아... 그렇죠. 바쁘신 분이죠."
리사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요새 바쁘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좀 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욕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도 리사는 애써 그런 아쉬움을 감추면서, 열심히 일하는 니사를 도와서 다시 장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만간 금년 수익에 대한 보고서를 재상에게 올려야 했으니까.
--
"벌써 한해가 끝나가는구나."
황제는 복도를 걸으면서 조금 감상에 젖어서 말했다.
어느새 12월이 되었다.
한해가 마무리되는 달이니 황제 역시 마음에 여유가...
"그러네요. 근데 소신이나 폐하나 그게 딱히 영향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모용진의 덤덤한 말에 황제는 침묵했다.
황제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는 노화가 더디다. 아마 남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세월을 살겠지.
모용진은 요괴가 되었으니 사실상 늙어서 죽는 경우는 없다.
그런 둘에게 고작 1년이 지나가는 순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굳이 감상에 젖어 있는데 그런 사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황제는 없다고 생각했다.
"금위대장은... 아니다."
한 대 때릴까 하다가 포기한 황제는 열심히 단련하는 여화와 레오니를 보면서 말했다.
"적당히 하지 그랬느냐?"
몸을 혹사시키는 모습에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한 말이었지만 모용진은 기세등등해져선 말했다.
"하하, 이젠 적당히 해도 압도해 버리더라고요."
"그것도 그렇긴 하겠지."
딱히 부정은 못 하겠군.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여화를 보면서 졸고 있는 케르를 안아서 자기 무릎 위에 올렸다.
"오! 고양이. 귀엽네요?"
모용진이 고양이를 보고는 무심결에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할 때였다.
"짐의 비다."
우뚝!
"아..."
하마터면 엄청난 무례를 저지를 뻔했다.
그런 생각에 사색이 된 모용진은 급하게 손을 회수했다.
"왜? 쓰다듬으려던 것 아니었냐?"
[흐냐... 아니었냥?]
케르도 의외라는 듯이 모용진을 졸린 눈으로 보면서 묻자 모용진인 식은땀을 흘렸다.
"어찌 비 전하께 손을..."
"저기 자네가 손을 대다 못해 두들겨 팬 비가 둘이나 있다만?"
그런 짓을 어떻게 하냐고 말하려던 모용진은 황제의 반박에 할 말을 잃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것도 그러네요."
'뭐, 허락해주신 거 같으니까.'
모용진은 그런 생각하면서 결국 푹신한 털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케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털 부드럽네요."
치유되는 기분.
모용진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자 케르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작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누가 머리를 만지는데 거부감도 없네요?"
"묘인이니까."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는 모용진에게 황제는 덤덤하게 대답하고는 케르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때 케르가 여화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두목이 요새 열심히 한다냐.]
"두목...? 아아."
모용진은 그 말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으나 곧 묘인의 습성을 기억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더구나."
황제가 그 말에 공감해주자 케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제에게 물었다.
[주인은 어떻게 생각하냐? 임신시키고 싶어지냐?]
쿨럭!
적나라한 그녀의 말에 모용진이 헛기침했고, 황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강한 암컷을 임신시키고 싶은 것은 묘인의 본성 같은 거라서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하지만 그건 묘인의 본성이지 황제의 본성은 아니었다.
"일단 많은 여인을 회임시키는 게 황제의 의무긴 하지."
그로 인해 설령 자신과 같은 참극이 일어나더라도 일단 수는 많이 늘리는 게 낫긴 하다.
"그러나 여인의 강함으로 그런 감정이 드는 건 아니다. 그게 묘인과 인간의 다른 점이지."
[그런가냐... 모르겠다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케르가 중얼거리자 황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 가는 거냐?]
"그래, 다음 합궁 상대가 면담을 요청했더구나. 대흘의 여동생이라니 만나는 봐야지."
"와! 그놈 여동생도 있었어요? 뭔가 우락부락한 느낌의 여자가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모용진이 그 충격적인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자 황제는 걸음을 옮기면서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외모가 무슨 상관이냐. 그 어떤 외모라고 해도 황제인 이상 짐이 안아야 하는 건 변함이 없는데."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진심을 담아서 말하는 황제의 모습에 모용진은 놀랐고, 곧 웃었다.
생각해보면 황제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자신보단 황제의 의무가 더 중요한 사람.
그렇기에... 더욱 안타까운 사람. 그게 황제였으니까.
"뭐, 실제로 그럴 일은 없겠죠."
아무리 그래도 황제에게 보내는 여인을 미색을 보지 않고 보낼 리는 없다.
막말로 조금이라도 황제의 아이를 낳을 확률을 높이기 위해선 매력적인 여인이어야 기회도 더 많을 것이 아닌가?
게다가 몇몇 사례를 보면 황제의 총애라도 받는다면 굳이 장자를 낳지 않아도 황후에 오른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보내는 쪽에서 여인의 미색을 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사실 이미 그런 것도 훈련했다."
황제는 아직 태자 시절에 했던 훈련을 떠올렸다.
어떤 여인이라도 안을 수 있어야 한다면서 박색인 여인들의 몸을 만져 보는 훈련을 시킨 적도 있었고, 그런 여인을 보면서 물건을 세우는 훈련도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황제는 박색이라도 일단 합궁을 제대로 치를 자신은 있었다.
"대흘의 여동생이라... 궁금하네요."
"그건 짐도 마찬가지다. 그 목석의 여동생은 어떨지 궁금하구나."
그 말에 대흘을 떠올리면서 황제는 웃었다.
어떤 여인일까?
솔직히 정말 궁금했으니까.
--
푸아악!
칸은 자신의 팔을 베어낸 백부장의 검을 보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의식이 흐릿하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아프다.
그제야 알았다.
저 녀석이 칼에...
'독을 발랐구나.'
독을 발랐다는 것을 말이다.
애초에 저자는 신성한 결투를 제대로 치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칸은 그제야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알았다.
"다카이 백부장의 승리다!"
"오고파이의 목을 쳐라!"
결국 독을 이겨 내지 못하고 쓰러진 칸을 보면서 그와 동조한 백부장들이 흥분하기 시작한 때였다.
"중독 반응이다!"
"다카이가 더러운 수를 썼다!"
오고파이의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드는 걸 본 몇몇 친칸파 백부장들이 분노한 얼굴로 외치며 무기를 들었다.
"허튼소리! 지금 다카이 백부장의 혼을 의심하는가!"
"독을 쓰는 전사라니! 신성한 결투를 더럽혔다. 우린 다카이를 칸으로 여기지 않겠다."
처억!
양쪽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무기를 겨누고 섰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오고파이의 말에 다카이는 피식 웃고는 전음을 통해 그에게 말했다.
[간단하지. 네 딸이 참 예쁘더라고. 제국의 황제에게 바치기엔 좀 많이 아깝지 않나?]
"...미친놈."
색에 미친놈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렇기에 한참 제국과 대립 중일 때 전사들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서 여인을 강간하고 다닐 때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진짜였고, 그렇기에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남겨두었던 건데... 설마 색에 미쳐서 민족을 말아먹을 결정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백부장들의 지나친 불안조차도 저 남자가 선동한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잘랐어야 했다.'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면서 오고파이는 최선을 다해서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된 이상... 소수의 사람이라도 살려서 크릴라이의 피를 이어야 했다.
"...나를 아직도 신뢰하는 자들은 지금이라도 사람들을 이끌고 제국으로 떠나라."
"바보 같은 소리를!"
그렇게 둘 거 같냐? 모처럼 범할 가치가 있는 여인을 취할 수 있는데?
다카이가 그런 생각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백부장들에게 말했다.
"모두 저놈들을 죽여라!"
"젠장! 모두 후퇴해라! 사람들을 피신시켜!"
그 뒤로는 그야말로 끔찍한 참극의 시작이었다.
전사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면서... 피를 흘렸다.
오고파이를 따르는 백부장들은 그의 최후의 말을 기억하면서 전사들을 이끌고 몇몇은 항전을, 몇몇은 사람들을 제국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벌컥!
그 소란 중에서도 막중한 임무를 받고 따로 몸을 빼낸 한 여전사가 가장 큰 천막을 벌컥 열었다.
천막 안에는 마치 인형처럼 귀여운 여인이 덜덜 떨면서 귀를 막고 있었다.
"사유우이님! 얼른!"
천막을 연 여전사가 그대로 그녀를 안아 들며 말했다.
"아버님은...!"
그 품에서 애처롭게 떨면서 묻는 그녀를 향해 여전사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살아남는 걸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여전사는 분노를 최대한 억누르며 말하고는 여인들과 노인, 아이들을 데리고 도주를 시작했다.
"다른 전사들이 시간을 끌어 주기로 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사유우이가 생각할 때 도망칠 곳이 보이지가 않았다.
"제국으로."
그런 사유우이의 절망에 찬 질문에 여전사는 사람들을 독려해주면서 대답했다.
"지금은... 황제의 약속을 믿는 수밖엔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지옥 같은 밤을 걸었다.
그날 많은 전사들이 죽었고, 낙오된 여인이나 노인은 죽거나 강간 당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그야말로 크릴라이족에게 닥친 비극이었다.
--
"...난리가 났군."
늦은 밤.
리처드는 여기저기서 충돌하는 다량의 기를 느끼고는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감싸 쥐었다.
'내분이라도 일어난 건가?'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지?
리처드는 고민했지만, 그 고민은 딱히 길지 않았다.
"컨셉 유지하기도 벅차게 일이 터지니 죽겠어."
작게 푸념한 리처드는 두꺼운 천으로 감싼 대검을 들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대충 보고 올 테니까 병사들 깨워서 모두 경계 태세 유지하고 있으라고 해라."
당직을 서고 있던 병사에게 명령한 리처드는 가볍게 몸을 풀면서 통신 마도구에 손을 뻗었다.
"여기는 리처드. 여기는 리처드. 미의 로드 응답 바람."
[지랄도 가지가지구나. 너]
리처드는 황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조금 놀랐다.
"뭐야, 썬더잖아?"
[썬더라니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지마! 그보다 무슨 일이야.. 폐하께선 지금 면담 중인데. 거긴 밤이던가?]
모용진의 느긋한 대답에 리처드는 잠시 고민하고는 그냥 모용진에게 말했다.
어차피 이 남자의 귀에 들어가면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크릴라이족에서 내분이 발생한 거 같은데."
[내분? 무슨 일이야.? 대체?]
당황한 모용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리처드는 가뿐하게 성벽 아래로 뛰어내리고는 가볍게 착지하며 말했다.
"모르지 미야. 그래서 어쩔까? 다 죽여? 아니면 상황을 봐서 어느 한쪽 편을 들어?"
리처드의 대답에 모용진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폐하께선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 '제국에 이득이 되는 쪽의 편을 들어 주거라.' 이렇게 말이야.]
"크하하하! 크레이지 썬더 보이. 성대모사 웃긴 걸?"
[누가 크레이지 썬더 보이야!]
더욱 진화한 우스꽝스러운 호칭에 모용진이 화를 냈지만 리처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튼 자신과 직통으로 연결된 마도구를 맡길 정도면 모용진의 의견이 황제의 의견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아니 설령 다르더라도 존중해 줄 의사가 있다는 의미겠지.
그렇기에 리처드는 일단 따르기로 했다.
"오케이. 그렇게 하지."
상황을 봐서 적당히 편을 들어 주면 되는 거잖아. 그런 건 간단했다.
리처드는 잘할 자신이 있었다.
[...어쩌려고?]
그 호쾌한 대답에 오히려 불안 해졌는지 모용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리처드는 웃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대되는 놈들 다 킬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노 프라블럼."
리처드는 대검을 감싸고 있던 천을 풀어서 어깨에 두르며 웃었다.
"미는 그런 거 프로라고."
[야! 다 죽이진...]
뚝.
리처드는 귀찮은 잔소리를 하는 모용진과의 통신을 끊고는 마도구를 품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이런 일이 안 일어나길 바랐지만... 뭐, 어쩔 수 없지."
리처드는 언제 웃었냐는 듯이 조금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역시 사람은 익숙한 일을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