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면 적당하겠구나."
황제는 텅 빈 사냥터에 서선 활을 들었다.
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이 기분이 좋았다.
황제는 시위에 화살을 메기고는 그대로 상선이 준비한 거대한 과녁을 겨눴다.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지 확인하였느냐."
"네, 비워두었습니다."
상선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표적을 가만히 보았다.
그러고는 시위를 놓았다.
파직!
엄청난 전류를 튀기며 날아간 화살은 표적을 꿰뚫고는 그대로 그 뒤를 불태워 버리는 미친 위력을 보여 주었다.
사냥터가 완전히 엉망이 된 말도 안 되는 위력을 보면서 황제는 조금 놀랐다.
"전기가..."
"해룡의 부산물이니까요. 그보다 엄청난 위력이군요."
그녀는 자신이 만든 작품의 성능을 보면서 벅찬 감동을 느꼈다.
이 위력이었다.
그야말로 전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최종병기.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물건을 만들어냈으니까. 그녀는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엄청난 물건이군.'
사용할 수만 있다면... 확실히 전쟁의 승패까지 좌우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위력이다.
황제는 완전히 난장판이 된 사냥터를 보면서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복구하려면 큰일이겠구나."
'재상이 난리 치겠군.'
완전히 파괴된 사냥터를 보면서 황제는 재상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질끈 감았다.
좋은 활을 얻은 것은 좋았지만... 역시 재상의 잔소리를 듣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하는 그 강직함이 이럴 땐 참으로 곤란했으니까.
'모용진은 어디로 간 거지?'
리처드랑 연락했을 텐데 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거지?
황제는 그런 생각을 잠시 했지만... 어차피 모용진은 알아서 잘하니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지금은...
"폐하. 소리가 요란하여 와봤는데... 이건."
"..."
어느새 이곳으로 온 재상이 더 문제였으니까.
--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모용진은 검은 구름을 타고 이동하면서 얼굴에선 불안을 숨기지 못했다.
리처드는 언제나 손속이 거칠다.
그쪽의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모용진은 그가 다시 한번 그때처럼 선을 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완전히 복수에 눈이 멀어서... 온몸에 피 칠갑을 하는 그 모습은...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황제가 그러했으니까.
모용진은 리처드가 그런 상황에 놓이는 걸 원치 않았다.
그의 마음속엔 커다란 분노가 웅크려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모용진은 순진하지 않았다.
황제나 리처드나 벗어나려고 해도 그 속엔 여전히 증오와 분노가 숨어 있었다.
그것이 안타까우면서도... 모용진은 그들을 이해했기에... 더욱 그들이 그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갈 곳을 잃은 분노를 표출해 봐야 더욱 공허해질 뿐이니까.
'늦지 않으면 좋겠는데...'
모용진은 더욱 속도를 올리면서 자신이 늦지 않기만을 바랐다.
처음으로... 자신이 요괴가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하면서.
--
"흐음... 이해했습니다. 즉 제국에게 반감을 품은 역도들이 더러운 수를 써서 칸을 죽이고, 내분을 일으켰다. 그런 스토리군요."
리처드는 사유우이의 설명을 들으면서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니 아파리를 구해주세요. 아파리가 지금 저쪽에서 시간을 끌고 있어요."
"아파리?"
리처드는 의아했으나 일단 아이들을 포박하는 줄을 풀어 주었다.
자신을 보면서 겁에 질린 아이들을 보는 건 가슴이 아팠지만...
'저지른 게 있으니.'
리처드는 자신이 한 짓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시선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주변엔 처참한 전사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이 모습은 확실히 아이들이 보기엔 자극적이었다.
'조금 신경을 쓰는 게 나았을지도...'
역시 처리하는 데 신경을 쓸 걸 그랬나?
그런 생각하면서도 리처드는 일단 사유우이에게 말했다.
"대충 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살아 있군요. 여기서 기다리시길. 금방 데려오겠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비 후보.
그녀에게 나름 존중을 표해준 리처드는 달리기 시작했다.
'강한 여인이군.'
리처드는 전사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소리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후한 평가를 내렸다.
크릴라이족에게 솔직히 좋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확실히 리처드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폐하께선 참 여자 복도 많으시다니까.'
자신 만큼은 아니지만.
리처드는 그런 생각하면서 거칠게 기가 충돌하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이거 악질들이군.'
그가 도착하자 본 광경은 남자 4명이 한 여자를 집단으로 두들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미 전투 불능 상태나 다름없는 그녀를 향해 발길질을 해대는 그 모습은 두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보기 좋지 않았다.
"이제 좀 고분고분하게 굴 마음이 생겼냐?"
리처드가 보기에 저곳에 있는 녀석 중 가장 강해 보이는 남자의 말에 여인은 그를 노려보았다.
온몸은 만신창이였지만... 그녀의 의지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최후까지 싸울 테다."
여인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남자는 더욱 기분 좋다는 듯이 웃었다.
"뭐, 좋아. 일단 단전부터 부수지."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단전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남자가 말했다.
"내가 예전에 실패로 느낀 게 있거든. 먹고 싶은 여자는 직접 조리해서 먹는 게 좋다는 걸 말이야. 바로 이렇게."
'슬슬 나서야겠군.'
리처드가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슬슬 나서려고 할 때였다.
"헬렌 그 여자를 못 먹고 두고두고 후회했더니 더 뼈저리게 느껴지더라고."
...뭐?
리처드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저 자식이... 무슨 말하고 있는 거지?
"헬렌...?"
여인은 생소한 이름인지 의문을 담어서 물었고, 남자는 순순히 대답했다.
"어어엄청 오래전에 말이야. 제국 쪽에 진짜 괜찮은 여자 하나가 있었거든."
그만.
"부하들을 시켜서 적당히 먹고 데려오라고 했는데 이런 자살해 버렸네? 그 부하들도 죽어 버리고, 난 원하던걸 못 얻게 되었단 말이야."
그만 말해.
리처드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좀 더 그 말을 듣고 싶은 이상한 감정에 사로 잡혔다.
"그 여자가 헬렌이란 여자였지. 유부녀였지 아마? 아까워. 이게 또 유부녀가 먹는 맛이 남다르거든. 뭐, 딸년이 있었던 거 같아서 거기에 기대하고 있긴 해. 처녀면 더 좋겠는데 세월을 생각하면 그건 좀 힘드려니?"
"...하하."
리처드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 복수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이상 그들을 증오하고 싶지 않다고 자신을 계속 설득했다.
그런데...
있었다.
반드시 죽여버려야 할 원수가.
그녀를 자신에게서 빼앗아간 원흉이.
눈앞에 있었다.
"...뭐지?"
남자.
아니 다카이가 갑자기 자기 시야가 붉어지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푸아악!
그리고 그 순간 부하들의 목이 순식간에 공중을 날았다.
"뭐지? 이건..."
"드디어 찾았다."
리처드는 복수해야 할 진정한 대상을 찾아내었다.
모든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정말이지 최적의 상대를 말이다.
"넌...!"
다카이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제야 그는 리처드를 발견했다.
"뭐 하는 ㄴ..."
다카이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리처드가 다가와서는 그 턱을 붙잡았으니까.
'꼬, 꼼짝도 할 수가...'
다카이는 그 손을 떨쳐 내려고 했으나 양손으로 그 손을 떼어내려고 해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의 차이.
다카이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공포를 느꼈다.
"찾았어. 드디어 찾았어."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리처드는 그를 보며 말했다.
"헬렌. 알지?"
"모, 몰라."
다카이는 어느새 턱에서 자연스럽게 자기 목으로 향한 리처드의 손을 보면서 발버둥 쳤다.
'기를 전혀 운용할 수가 없어.'
가볍게 목을 쥐고 있는데도 저항할 수가 없었다.
기의 사용을 봉쇄 당했다.
다카이는 리처드의 손에 목을 잡힌 채 들려서는 공포에 질려 버렸다.
자신이 믿었던 강함이 봉쇄 당하자. 그는 더없이 나약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몰라! 진짜 몰라!"
"..."
리처드는 그 변명을 들으면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못 먹어서 가장 기억에 남은 여자라고 하지 않았나?"
'젠장! 알고 있었잖아!'
처음부터 듣고 있었던 건가?
다카이는 괜히 떠벌렸다고 생각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변명을 생각했다.
애초에 이 남자는 헬렌 그 여자와는 무슨 사이지? 이 정도로 화를 낼 정도면...
'전장의 사자! 제길. 이딴 괴물하고 마주 칠 줄은 몰랐단 말이야!'
그제야 리처드의 정체를 알아차린 다카이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애초에 제국에 대한 반감은 다카이에겐 그저 반란을 위한 명분이었을 뿐, 진짜 이 괴물하고 마찰을 빚을 생각은 없었다.
"자, 잘못했어! 애초에 난 살려서 데려오라고 시켰..."
꾸욱.
리처드는 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고, 손가락이 점점 다카이의 목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끅!"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를 보면서 리처드는 손에서 다시 힘을 뺐다.
절대 곱게 죽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 녀석만큼은... 그녀들이 겪은 고통의 배 이상을 느껴야 했으니까.
"살고 싶어?"
"그, 그렇습니다. 살고 싶어요."
눈물과 콧물을 쏟으면서 애원하는 다카이를 보면서 리처드는 덤덤하게 말했다.
"괜찮아. 나중엔 죽여달라고 오히려 애원하게 될 테니까."
"자, 잠... 끄아악!"
그 순간 리처드의 붉은 기운이 다카이를 감쌌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할 정도의 고통을 주겠다.
지금 리처드의 머리엔... 그 생각밖에 없었다.
--
"폐하... 물론 황실의 재정은 지금 현재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허나 이런 식으로 낭비를 했다가는..."
장문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황제는 생각했다.
"미안하다. 다음부터 조심하지."
"제국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금문제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작은 낭비가 큰 낭비로 이어지니 작은 것이라도 함부로 낭비하지 않는 것이 황제의 미덕이라 하였으니 폐하께서..."
"..."
도저히 끝날 줄을 모르는 재상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황제는 말라 죽어 가는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최근 폐하께서 비 전하의 사업에 지원하신 예산의 규모가..."
'오래가겠군.'
황제는 최대한 딴생각을 하면서 재상의 잔소리를 버텼다.
재상의 잔소리는 장장 3시간에 걸쳐서 이어진 끝에 결국은 이런 낭비는 결코 좋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면서 끝을 맺었다.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끝났다!
황제는 묘한 기쁨마저 느꼈지만 그걸 드러내면 다시 잔소리가 이어질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의 충언을 새겨들으며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노력하마."
"감사합니다. 그럼 신은 이곳의 정비를 위한 인부를 고용하기 위해서 가 보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황제가 가장 아끼는 문관답게 재상은 빠르게 사냥터의 정비를 위한 인부를 모집하기 위해 사라졌다.
"이게 재상의..."
대흘의 여동생인 가비가 조금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라버니에게 대충 듣긴 했지만... 실제로 들어 보니 상상 이상의 괴로운 시간이었다.
"아무튼 해결되었으니 다행이지. 그럼 밤에 보도록 하마."
"네. 그럼 전 이만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황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가비가 궁녀들의 안내를 받으며 사라지자 황제는 일단 집무실로 돌아갔다.
"...두고 갔군."
책상 위엔 리처드와 연결된 통신 마도구와 모용진이 써둔 것으로 추정되는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잠시 국경을 보고 오겠습니다.]
"...그곳이 난리긴 한 모양이구나."
황제는 그 내용을 곱씹어보면서 중얼거렸다.
모용진이 직접 갈 정도라면...
크릴라이족이 상당히 위험한 상황인 건 분명해 보였다.
--
"커억...!"
리처드의 몸에서 흘러나온 혈기가 다카이의 혈액 안에 녹아들어가서는 날뛰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을 지르면서 다카이는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 쳤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더욱 악랄한 것은 다카이가 지나친 고통에 쇼크사 할 것 같으면 정확히 활동을 멈추었기에 다카이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다.
그제야 다카이는 리처드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죽고 싶다고 빌 게 만들어 주겠다는 말대로... 다카이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죽고 싶냐? 그러나 난 아직 널 편하게 해 줄 생각이 없는데."
리처드는 붉어진 눈으로 그를 보면서 조소했다.
그 모습에 아파리는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도살자 여긴 왜...?'
갑자기 왜 도살자가 자신을 돕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도살자는 분명 위험했다.
마치 이성이... 없어진 것 같았다.
그렇기에 아파리는 자신이 그 분노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정말이지... 생각보다는 괜찮은 상황이라고 봐야 하나."
그때였다.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파리는 자신도 모르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놀랐다.
'인간이긴... 한 건가?'
하늘에 떠 있는 사람은 도살자보다는 조금 작지만 그래도 상당한 체구의 남자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도살자와 비교 자체를 거부했다.
그야말로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거 같은 아득함마저 느껴지는 강함.
그 기운을 느낀 건가?
도살자도 그 남자에게 반응하며 다카이를 내려놓았다.
"금위대장. 방해하지 말아줘."
"멀쩡하게 말할 수 있었잖아. 어이."
모용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리처드를 보면서 말했다.
제대로 말할 수 있으면서 그런 말투를 쓴 건가? 조금 어이가 없었으니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과한 행동이야. 죽일 거면 곱게 보내줘."
"...싫다면?"
리처드는 싸늘하게 말하면서 바닥에 박아두었던 대검을 들었고, 그걸 보면서 모용진은 한숨을 쉬고는 손을 풀었다.
그 도살자를 상대로 검조차 뽑지 않는 그 모습에 아파리는 입을 떠억 벌리고 있었다.
"적당히 제압해서 그 머리가 식을 때까지 묶어둘 거야."
"해 봐!"
휘익!
그야말로 불시에 리처드가 검을 휘둘렀고, 붉은 검기가 모용진을 향해 쏘아졌다.
서걱!
그리고 모용진이 완전히 반으로 베였다.
그걸 보면서 아파리가 눈을 크게 뜬 순간이었다.
스르륵.
반으로 베인 모용진이 마치 환상이었다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아파리는 깨달았다.
도살자가 벤 것은...
'잔상?'
저 남자의 잔상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우드득!
"일단 잠시 머리를 식혀라."
어느새 리처드에게 다가가선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은 모용진은 새우처럼 꺾인 리처드를 그대로 들었다.
"다카이군."
리처드가 괴롭히고 있던 남자를 확인한 모용진은 혀를 찼다.
그 악명 높은 백부장인가... 황제가 잡히면 반드시 팽형으로 죽여 버리겠다고 선언한 놈이었다.
"뭐 때문에 이 녀석한테 그렇게 화가 났는지 대충 알겠는데 말이야."
모용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거... 그냥 내버려둘 걸 그랬나?
하지만 당장 이성을 잃은 상태로 한 판단이 제대로 된 것일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일단은 정신부터 차리라고."
모용진은 일단 리처드가 차분해지면 그의 의견을 들어볼 생각이었다.
--
"...여긴."
리처드는 눈을 떴다.
천막의 지붕이 먼저 보였다.
그리고...
"여! 정신이 드나?"
"...크레이지 썬더."
정말 보고 싶지 않았던 남자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 녀석은?"
리처드가 가장 먼저 다카이를 확인하자 모용진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묶어뒀어. 나머지도 전부 제압해서."
그 말에 리처드가 밖을 내다보자 엄청나게 많은 전사들이 화상을 입은 채 밧줄에 묶여 있었다.
하긴 이 남자에게 크릴라이에서 내분을 일으킨 세력을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그렇기에 리처드는 그 모습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마도 폐하께 데려가면 전부 팽형일 거다. 하지만 이 녀석은 네 의견을 존중해주고 싶어서 말이야."
팽형이란 말에 덜덜 떨기 시작한 다카이를 따르는 백부장과 전사들은 차라리 이곳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했다.
그만큼 괴로운 형벌이 팽형이었으니까.
다카이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고 있었다.
"폐하의 뜻을 따르지."
리처드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가 차분해지니까 깨달았다.
저 남자에게 복수해 봐야... 이미 죽은 헬렌은 돌아오지 않는다.
스스로가 개운해지지도 않는다. 복수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애초에 리처드가 가장 증오하고 용서할 수 없었던 건...
그 누구도 아닌 그녀를 지키지 못한 자신이었으니까.
"그래..."
그 대답이 조금 놀라웠던 걸까? 모용진은 눈을 크게 뜨고는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그 말에 리처드는 어색하게 웃고는 화제를 돌렸다.
뭔가 모용진에게 칭찬을 들으니까 기분이 이상했으니까.
"그보다 폐하께선 합궁을 잘 진행하셨을까?"
리처드의 질문에 모용진은 조금 어색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 녀석이 제대로 된 말투로 말하는 걸 보니까 정말 어색했으니까.
"폐하께선 이제 합궁에 능숙하시잖아? 잘하셨겠지? 나야 모르지만."
경험이 얼마나 많은데... 모용진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애매하게 대답하자 리처드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동정한테 물어봐야 제대로 된 대답이..."
카앙!
"너 진짜 동정한테 맞아 죽어볼래?"
가뜩이나 신경 쓰고 있는데!
모용진이 화난 얼굴로 검을 휘두르자 그 칼을 침대 옆에 있던 자기 대검으로 막아 낸 리처드는 웃었다.
"아니."
"하... 그래, 화내면 지는 거지? 어? 그렇지?"
길길이 날뛰는 모용진을 웃는 얼굴로 보고 있던 리처드는 눈을 감았다.
'미안.'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었던 건, 과거의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이젠 나 자신을 용서해도 될까? 헬렌.'
20년이 넘는 세월은... 길다면 긴 세월이었다.
그러니까... 리처드는 이젠 슬슬 자신을 용서해주고 싶었다.
"...신기하군."
잠시 후 눈을 뜬 리처드는 다카이를 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제야 알았다.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은 이토록 어렵고...
또 그렇기에 값지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