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곳이야."
번개가 치는 해역.
그 중심에 위치한 작은 섬에서 느긋한 자세로 누워 있던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안 해도 어차피 안 나간단 말이지...'
혼천대성이 자신을 봉인하기 위해 걸어 둔 주술을 떠올리면서 남자는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정확히는 못 나간다는 게 더 맞는 말이긴 하지만."
섬에 세워진 작은 사당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린 남자는 하늘에서 내리치는 번개를 보면서 사당에 전시해 두었던 아름다운 금색의 왕관을 가볍게 던졌다가 받았다.
"...뭔가 오는데?"
왕관을 다시 사당에 올려 두며 남자는 다가오는 기운을 느끼고 놀랐다.
강하고도... 그리운 기운이 하나, 강하고도 구역질이 나는 기운이 하나였다.
어떻게 그렇게 상반되는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기운이 두 개가 같이 올 수가 있는 거지?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반짝이는 금안으로 기운이 오고 있는 방향을 보았다.
"...난 여기 있어. 늘 여기 있었지."
남자는 미친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개념으로만 남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그녀가 만든 최초의 사당을 지키는 건 그의 역할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을까? 남자는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흩날리는 금발을 만지작거렸다.
이젠 이 금발이 오히려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의 긴 세월을 살아왔다.
자신도 이젠 왜 살고 있는지 기억이 희미해진다.
그녀가 자신에게 준 사명 때문일까?
아니면 작은 미련 때문일까?
이젠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손님이 왔군."
남자는 점점 다가오는 기운을 느끼면서 허리에 찬 검을 만지작거렸다.
이곳에 손님이 온 게 얼마 만이지? 정말이지 반가운 기분이 들었으니까.
--
"천신께서는 어째서 모든 종족들에게 그런 신물을 준 걸까요?"
해신의 왕관을 떠올리며 모용진이 질문하자 황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모르지."
그건 오직 천신만이 알 일이지만 정작 그 천신이 진작에 개념으로 변해 버렸으니... 그 사정을 알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황제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천신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있지."
황제의 대답에 모용진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신이 인간이었다니?
그러나... 곧 이해했다.
"그렇겠군요."
이미 거의 신과 가까운 사람이 곁에 있는데 뭐...
모용진이 볼 때 황제는 언제 신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번개는 즉 뇌기, 다른 말로는 천기입니다. 천신의 힘이지요. 그런데 번개가 치는 해역이라... 혼천대성에게 그 정도의 주술이 있었을까요?"
모용진이 계속 의문이었던 부분을 언급하자 황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너도 쓰지 않느냐."
"저야...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요."
모용진이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어째서 뇌기를 다룰 수 있는 걸까? 고민해봐야... 원래부터 쓸 수 있었기에 그 이유는 모용진 본인도 잘 몰랐다.
"그보다 다 왔네요. 이젠..."
어느새 보이는 번개가 치는 해역을 보며 모용진이 말하던 순간이었다.
"모용진."
황제는 그 순간 저 안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에 조용히 말했다.
"...누군가 있다."
그곳을 보는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기운을 가진 존재가 섬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누가 있다고요?"
모용진이 고개를 갸웃하자 황제는 조금 당황했다.
다른 이도 아닌 모용진이 저토록 강렬한 기운을 느끼지 못할 줄은 몰랐으니까.
"느껴지지 않는 것이냐?"
이 강한 기운이?
황제의 말에 모용진은 기운을 탐색해 보려고 했으나...
"어?"
기의 운용이 전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구름이 사라지고 황제와 모용진은 바다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파직!
그 순간 이쪽으로 내려친 번개를 보면서 황제는 기막으로 모용진을 보호했다.
"이, 이게..."
당황하는 모용진의 목덜미를 잡고 공중을 걸은 황제는 빠르게 섬으로 달렸다.
타악!
그러고는 가볍게 착지했다.
모용진은 여전히 자신이 기를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에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런...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섬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오면서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금안.'
전혀 자르지 않았는지 길게 늘어진 금발은 땅에 질질 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윤기를 잃지 않았고, 자신과 똑같은 금안은 신비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목에 존재하는 목젖이 아니었다면 여자로 봤을 정도로 여리여리한 몸은 선제 폐하를 연상시켰다.
"키가 크구나."
"누구지?"
황제는 검을 질질 끌고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물으면서 그를 경계했다.
그걸 본 남자는 눈을 크게 뜨더니 대답했다.
"진위."
"...!"
황제는 설마 저 남자에게서 자신의 이름이 나올지 몰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남자.
아니 진위는 그런 황제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드럽게 웃으면서 물었다.
"그대는?"
"진위."
"...놀랍군."
진위는 그 대답에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황제도 같은 생각이었다.
설마 이곳에서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자를 만나게 될줄이야.
"동명이인인가."
"정확히는 그대가 날 따라 한 것이지."
"..."
황제는 그 말에 침묵했지만...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저 남자의 정체를.
다만... 머리가 그 정체를 거부하고 있을 뿐이었다.
"천무제."
초대 황제이자, 대륙 역사상 가장 강한 황제라고 하면 가장 먼저 거론되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역사 속의 인물이... 설마 저런 모습으로 살아있었을 줄이야.
"그런 묘호가 된 건가? 호오, 멋진데?"
카앙!
황제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고, 그 순간 어느새 모용진에게 다가온 남자의 검이 황제의 기검에 막혔다.
"...무슨 짓이지?"
황제가 싸늘한 어조로 묻자 진위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 벌레가 있기에 좀 치워주려고 했지. 요괴는 죽여야 한다고 부모가 가르쳐 주지 않았니?"
모용진은 그 말에 몸을 움찔했고, 황제는 그런 진위를 날려 버리고는 모용진을 보호하듯이 섰다.
"벌레라... 짐에게 죽고 싶다고 그리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 아해야. 지금 그대가 누구한테 말하는지 알고 있느냐?"
그 모습에 진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 위대한 제국의 초석을 쌓은 최초의 황제.
그런 자신을 보고도 저런 오만한 말이라니... 예의를 훌륭하게 밥에다가 말아먹은 싸가지가 아닌가.
"알고 있지."
황제는 그런 진위의 말에 당당하게 대답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초대 황제라는 건 눈이 장식이 아닌 이상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기는 강렬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과거의 망령이지. 그대야말로 지금 누구한테 말하는지 알고는 있나?"
최초의 황제인 게 어쩌란 거지? 눈앞에 남자가 천무제인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서걱!
"!"
그 순간 황제의 검이 순식간에 진위의 팔을 앗아갔다.
그야말로 볼 수도 없는 빠른 검에 진위가 눈을 크게 뜬 순간 황제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대야말로 이 제국의 황제에게 말하는 것이다. 예의를 갖춰라."
지금의 황제는 자신이거늘.
과거의 망령따위가 감히 황제의 것을 앗아갈 권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하. 하. 그래 황제란 말이지."
그 말대로 황제긴 하지.
진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쩌다가 내 피에서 저런 괴물이 튀어나온 거지?
진위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주변에 내리치는 천기를 흡수했다.
'번개가...'
모용진이 주변에 생겨나는 변화를 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이 해역에서 치던 번개가 사라졌다.
황제와 모용진이 놀라는 게 느껴졌으나 진위에겐 당연한 것이었다.
애초에 혼천대성이 한 것은 그의 천기를 주변에 흩뿌리게 만들었을 뿐, 이 주변에 치는 번개 자체는 전부 그의 힘이었으니까.
회수하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지금까지 방치해두었을 뿐.
"그렇다면 더욱 저 요괴를 죽여야 하는 게 황제의 역할이 아닌가! 불안한 요소를 어찌하여 살려 두는 것도 모자라 곁에 두며 보호하지?"
진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요괴는 적이다.
인간은 요괴하고는 섞일 수가 없다.
그건 이미... 인마전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황제란 자가... 도리어 요괴를 감싸면서 선조에게 대들다니...
진위는 도저히 이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후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걸 왜 그대가 정하지? 황제의 역할을 정하는 것은."
그러나 황제는 오히려 진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에게 내려친 번개를 깔끔하게 잘라 내면서 대답했다.
"짐이다. 그대가 아니라."
그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 단호함이...
그 강인함이...
진위에겐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역할을 정하는 건 남들이 아니야. 자신이지.]
"...너랑 참 닮았어."
끝까지 제천대성만은... 단 한 명의 요괴만큼은 보호하고자 했던 것까지... 닮았구나.
진위는 그런 생각하면서 더욱 기세를 피워 올렸다.
"그러니 더욱 그 요괴를 죽여야겠구나."
그러니 더욱 저 요괴는 죽어야 했다.
그 무른 점 하나 만큼은... 정말이지 황제에 걸맞지 않은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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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을 가진 존재가 되겠다는 거냐?"
이젠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과거의 일이다.
자기 배다른 누이를 보면서 진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 세상은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당연한 일이다.
요괴와 인간, 용과 용인, 그리고 수인과 어인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종족들이 이 대륙에서 서로 부대끼고 살아가고 있었으니...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무기를 겨눴으며, 서로를 죽이고 상처입혔다.
인간은 심지어 자신들끼리 싸우기까지 했다.
그런 전란의 시대에서 이 작고 약한 천왕국의 왕위에 오른 진위는 고민이 깊었다.
이런 세상에서... 과연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자신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희망적인 것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누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인간이... 어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이냐."
"이것 봐 이미 내 안에 신성이 싹트고 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신성이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나약한... 없느니만 못한 미약한 기운이었다.
"그러니까 도와줘."
그러나 그녀는 그 작은 신성에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자신에게 부탁해오고 있었다.
"난 그저 베는 것밖에 할 줄 몰라. 죽이고, 피를 흘리는 것밖에 못 하지."
그 부탁에 진위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신성을 키우는 방법이라니.
그런 걸 그가 알 리가 없었다.
그가 할 줄 아는 것은 그저 싸우고, 베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런 그의 검고 윤기가 넘치는 머리를 매만지면서... 그녀는 말했다.
"오라버니의 도움이 필요해. 사실 신앙이라는 것은 말이야..."
그녀는 웃었다.
해맑고 순수한 웃음이 아직도 진위의 머리엔 깊게 각인되었다.
"피에서 나오는 법이거든."
그 미소로 말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잔혹한 말을 내뱉으며, 그녀는 손을 뻗었다.
"..."
그때 너를 말렸다면... 이 대륙의 미래는 조금 달라졌을까?
아직도 진위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도 아마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을까?
그땐... 그것 말고는 답이 없었으니까.
진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눈을 떴다.
"...아."
그제야 진위는 자신이 기절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작게 신음했다.
황제는 그런 자신을 내려다 보면서 당당하게 서 있었다.
'보이지도 않네.'
몸을 일으키면서 진위는 황제의 검을 떠올렸다.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대응할 수도 없었다.
'뭐 이딴 괴물이...'
자신도 젊은 시절엔 여기저기 괴물이라 불리고 다녔다.
그 무위로 대륙을 진동시키며 제국을 만들었고, 천신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우화등선한 자신보다도 강한 존재를... 인간이라고 봐도 되는 걸까?
어떤 의미에선 저 뒤에 있는 요괴보단 황제가 더 인간 같지 않았다.
"어째서 인간이 요괴를 감싸는 거냐. 고작 사사로운 정 때문이라면... 그대에겐 황제의 자격이 없다."
그런 강함을 가지고, 어째서 그 힘을 요괴를 지키는 데 쓰는 거지?
그런 황제의 모습을... 진위는 천신과 겹쳐보았기에 더욱 화가 났다.
자신은 아직도 동생에게 얽매여서 이 조그마한 사당이나 지키고 있는데... 그 녀석을 닮은 자기 후손은 그녀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진위는 그 어리석은 모습에 화가 났다.
요괴는 배신한다.
제천대성이 그러했듯이. 다른 요괴들이 그러했듯이...
정을 주면 오히려 그만큼 더 상처 입게 될 것이다.
그 간단한 것을 모르는 이 동명의 후손이 진위는 답답하게 느껴졌다.
"황제의 자격이라..."
황제는 진위의 말에 작게 중얼거리면서 잠시 턱을 매만지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확실히 황제의 자격이 없다."
"...!"
순순히 인정하는 황제를 보면서 진위가 눈을 크게 떴다.
스스로가 황제의 자격이 없다고 순순히 인정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이 무거운 위치를 받아들였던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짐에게 이 자리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니까."
황제는 단 한 번도 자신이 황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원치 않은 자리에서, 자격도 없이 황제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 몇 번이고 그만두고 싶었으니까.
그런데도 그가 그 자리를 지킨 이유 중 하나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짐은 폭군이거든."
한 번 가진 것은 쉽게 내주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뜻을 거스르는 자는 가차 없이 베어 버리는 법은 배웠다.
그러니까...
"짐의 것은 아무리 천무제라 해도 가져갈 수 없다."
자기 검을 부러뜨리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베어버릴 것이다.
그것이 설령... 천무제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게 황제의 대답이었다.
황제의 대답에 진위는 압도 당하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알았다.
"하... 하...! 과연 그대는 폭군이구나."
자신의 앞에 있는 자는 확실히... 위대한 폭군이었다.
모든 것을 가지고 내어 놓을 줄 모르는 이 제국의 폭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