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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130화 (130/235)

어두운 방 안.

작은 촛불들이 간신히 빛을 뿌리고 있는 그 어두운 방 안에서 암살자는 덜덜 떨고 있었다.

"그래서... 실패하고 다 죽었다는 이야기인가요?"

눈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여인의 입이 열렸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부드럽고 고왔으나. 암살자는 더욱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들키진 않았죠?"

"그, 그게 잘..."

"저런... 잘 모른다는 이야기네요."

그녀는 난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음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애초에 암살자가 들키기를 바라면서 보냈기에 그건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들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들키기 위해서 암살자를 보내다니.

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하지만 그게 그녀의 본심이었다.

화악!

그 순간 등불이 동시에 켜지더니 방 안이 밝아졌다.

그러자 이 방 안의 모습이 보였다.

암살자는 떨리는 고개를 들어서 방 안을 보았다.

벽에는 엄청나게 많은 초상화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모두 한 남자의 초상화였다.

나이는 모두 달랐지만, 그려진 남자는 전부 한 명이었다.

암살자는 더욱 공포에 질린 채 그 초상화에서 눈을 떼고는 눈앞에 여인을 보았다.

아름다운 흑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에 눈에 들어온 것은 달처럼 반짝이는 윤기 넘치는 은발이었다.

뒤로 길게 늘어진 그녀의 은발은 마치 비단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암살자는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청순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피부는 만지면 상처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희고 고왔고, 눈은... 정말이지 신비로웠다.

왼쪽 눈은 루비처럼 붉었고, 오른쪽 눈은 사파이어처럼 푸른색을 뽐냈으니까.

"수고했어요. 이젠 돌아가도록 해요."

"네, 네..."

암살자는 허락이 떨어지자 침을 꼴깍 삼키고는 도밍치듯 방 안을 떠났다.

"당신은... 약속대로 절 기억하고 있나요?"

그녀는 초상화를 보면서 질문했다.

당연히 초상화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늘 그렇게 편지를 썼는데. 당신한테는 여전히 답장하나 없네요.'

그녀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초상화를 애절하게 쓰다듬었다.

늘 보내는 편지엔 애정을 듬뿍 담았건만... 매정한 그 사람은 답장하나 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그 차가움조차도 그를 구성하는 한 요소였으니까.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사랑했기에 그 차가움마저도 사랑했다.

'알아차렸겠죠? 당신이라면.'

싫어하게 되었을까? 하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애초에 이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비를 암살하려고 했다.

그것도 다른 비도 아닌 황제의 아이를 가진 비를.

분명... 이 정도의 사건이면 그 역시 가만히 두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분명 처벌을 위해서 자신을 제국으로 데려가겠지.

즉... 그가 자신을 데리러 와준다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날 데려가 주세요.'

그대로 감옥에 넣어도 좋으니까 그대로 날 잡아가주었으면 좋겠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도 좋으니까... 그가 자신을 데려가길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끌고 가는 그를 상상하며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죽어서라도 만나러 갈 테니까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초상화에 키스를 날렸다.

정말로 사랑하는... 그에게.

--

"그래서 보고할 일이라는 게 무엇이냐?"

황제는 자신을 보자마자 달려든 여화와 레오니를 순식간에 기절시키고는 태연하게 물었다.

'더 강해지셨구나.'

그걸 보면서 모용진은 감탄했다.

어제하고 오늘이 다르다.

여화와 레오니가 성장하는 그 이상으로 폐하께서는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암살자들의 배후를 알아냈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폐하의 성장에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모용진은 바로 보고를 시작했다.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걸 보니 꽤 높은 신분인 듯 하구나."

황제가 기절한 여화와 레오니를 치료하면서 말하자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상대는 평범하지가 않았다.

"프리아에서..."

"되었다. 또 그 여자구나."

황제는 프리아가 언급되자마자 보고를 듣는 걸 포기했다

이미 알아버렸으니까.

"편지로는 모자랐나."

매번 날아오는 그 악질적인 편지를 누가 보내는 지 조사조차 안 했다면 거짓말이겠지.

이미 그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는 파악이 끝났으나 건드려 봐야 의미가 없기에 내버려 두고 있었다.

어차피... 건드리기도 애매한 여인이었으니까.

"어쩌실 겁니까?"

"...무문제께서 문제를 남기셨구나. 짐이 직접 주의를 좀 주겠다."

암살에 개입되었다는 정황이 밝혀져도 딱히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상대였다.

그녀는. 황제라도 쉽게 처벌하긴 곤란한 관계였다.

"그 시절엔 필요해서 하였던 약혼이 이리 복잡해질 줄은 몰랐구나."

무문제께선 정적이 많고 위태로운 태자를 지키기 위해 많은 방법을 구상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혼인을 통한 동맹이다.

정치적인 동맹을 맺기 위해선 혼약만한 것이 없으니까.

물론 태자는 황제가 되면 합궁을 해야 했다. 그러니 당장 태자비가 되어도 황후가 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황후가 되기 위해선... 장자를 낳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태자비란 자리가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태자비 자리를 통해 차기 황제의 여인이라는 자리를 선점하는 것은 확실한 이점이 있었으니까.

무문제는 그런 이점을 이용해 태자에게 확실히 도움이 될 강한 민족의 여인과 태자를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재상의 격렬한 반대로 결국 혼인까진 이루어지진 못했지만.

아직 그 약혼이라는 관계는 남아 있었다.

즉...

"약혼녀 관리도 하셔야겠네요."

이번 사건의 배후는 바로 그 황제의 약혼녀. 제국의 속국인 프리아 왕국의 공주.

아네스 베르티에라는 이야기였다.

모용진의 말에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황제가 그녀를 실제로 본 건 약혼 때 한 번뿐이었다.

막상 결혼까지 이어지진 못했지만, 태자를 위해서 약혼이라는 애매한 관계로라도 붙잡아두어야 한다는 무문제의 판단으로 이어져 왔던 관계였다.

프리아의 합궁 순서는 크릴라이가 포함되기 전까진 그 사건으로 인해 맨 마지막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그들 역시 이 관계를 이어오길 바랐다.

그렇게 지금까지 이어져온 관계였고, 그 관계를 통해 은근하게 그녀와 이른 합궁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황제는 멍청하지 않았다.

당장 어제 브레드가 찾아왔던 이유도 그것이 가능한지 문의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런데도 황제가 그들을 밀어내지 못한 것은... 그들이 어려울 때에 자기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 원래 그들의 검이었던 브레드가 수도 방위 사령관을 맡고 있지 않은가.

그 정도로 그들은 황제에게 많은 것을 투자했다.

황제는 그녀가 비를 암살한 것도 아니고 암살 미수를 저지른 것으로 그녀를 선뜻 처벌하긴 쉽지 않았다.

그들에게 받은 것이 있었으니까.

"이런 짓을 한다고 해도 짐의 뜻은 여전히 확고하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억지를 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약혼녀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프리아의 합궁 순서를 앞당겨 주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처벌은..."

"일단 데려오거라. 짐이 엄중히 경고하도록 할 테니."

그렇다고 암살 미수를 저지른 그녀를 방치하는 것도 영 마음에 걸리는 일이다.

그렇기에 황제는 모용진에겐 그리 명하고는 그녀와 만났던 때를 회상했다.

그때 황제는... 막 14살이 되었을 때였다.

--

"이번 만남은 아주 중요하다."

화원에 마련된 자리에서 황제가 엄중한 얼굴로 말하자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말대로 이번 일은 원하던 원치 않던, 황제가 될 태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일이었다.

그렇기에 태자는 격식에 맞게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는 의자에 앉아서 얌전히 상대를 기다렸다.

"미리 와서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까?"

태자는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면서도 입으로는 의문을 표시했다.

"프리아족의 비호만 받는다면 적어도 앵글과 이탈리, 겔만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 정도의 이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 않느냐."

프리아는 확실히 그 셋을 전부 감당할 수 있는 강한 민족이긴 하다.

그들이 자랑하는 마법 병단은 대마법사는 겔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륙 최강이라는 명성이 자자했고, 기사단 역시 최강.

특히 그 유명한 브레드 엔서니를 필두로 한 기사단은 현 금위대보다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명실상부한 서부 지방의 패자였다.

"그들이 왜 제안을 받아들였을까요? 솔직히... 전 의구심이 듭니다."

물론 그렇다고 태자가 그들에 대한 의심을 거둔 건 아니었다.

"그 정도의 힘이 있다면... 솔직히 말해서 폐하께서 승하하시면 대륙을 충분히..."

"어허! 너무 솔직하지 않느냐."

황제가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태자는 당당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 당당한 모습에 한숨은 쉰 황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네가 황제가 되려면 재상과 싸워야 할 거다. 그럴 때. 태자비는 분명 힘이 되어 주겠지."

"...과연 그럴까요?"

태자는 회의적이었다.

이런 허울 뿐인 혼약으로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니 사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이 긍정적인 대답을 들려주었으니 나쁠 것은 없지 않느냐. 왜?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는 그런 환상을 품고 있느냐?"

황제의 질문에 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딴 환상 따윈 없었다.

애초에 결혼이라던가 그런 건 관심도 없었으니까.

태자는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면 신경 쓰는 여인이라도 있느냐? 요컨대... 오르테가라던가?"

"그 녀석 이름은 왜 나옵니까?"

태자가 순수하게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반응하자 황제는 '어? 아닌가?' 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튼, 저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왔으니 기회를 제대로 잡거라."

황제의 말에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되고 싶지 않았지만... 태자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은 황제가 될 거라는 걸.

다만...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고 구질구질하게 미련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 혼약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도 그러한 마음가짐에서 나왔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만약 황제가 되어야 한다면 이 혼약 자체는...

'나쁘진 않겠지.'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태자비라는 허울로 프리아족을 우군으로 삼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으니까.

자신이 황제가 되었을 때, 가뜩이나 흔들리는 이 제국을... 빠르게 안정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겠지.

태자는 이 혼약이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되고 싶지 않은데...'

태자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영 좋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대로 혼약을 확정 지으면... 꼭 황제가 반드시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것 같아서.

태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때 말끔한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편히 앉게나. 프리아의 왕이여."

황제가 자리를 권하자 남자.

아니 프리아의 왕인 루이 베르티에는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이번 혼약 건에 대해서 민족의 영광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책을 저지른 저희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니다. 그대의 탓은 아니니. 그보다... 그 아이는 어디 있느냐? 한번 보고 싶구나."

황제가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묻자 루이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긴장한 모양인지라... 잠시만 기다려주십사 합니다."

"하긴, 아직 12살이라지. 이런 자리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구나. 시각은 충분하니 천천히 준비해도 괜찮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루이가 고개를 깊게 숙이면서 말하자 황제는 작게 태자에게 속삭였다.

"이리 저자세로 나오니 오히려 부담스럽구나."

"확실히... 지나칠 정도군요."

아무리 상대가 황제라고 하나 솔직히 별 실권도 없는 황제다.

은연 중 황제를 무시하는 민족 지도자들을 흔히 볼 수 있었기에 태자는 그 민족 지도자들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세력을 지닌 프리아의 왕이 저런 공손한 자세로 나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늦,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네스 베르티에라고 합니다."

그때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조그마한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공손하게 인사했다.

"오호... 귀여운 아이로구나. 어떠냐? 마음에 드느냐?"

황제가 소녀를 보면서 작게 감탄했다.

고운 피부에 앙증맞은 손,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귀여운 얼굴.

홍채 이색증인가... 양쪽의 눈색이 다른 것이 참으로 신기했지만, 그것까지도 오히려 매력이 되는 아이였다.

장래엔 분명 미인이 되리라.

황제는 그리 확신했다.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것도 없지요."

태자는 그런 황제의 질문에 덤덤하게 대답했다.

소녀는 그 말에 움찔했지만, 그런데도 그녀의 시선은 태자에게서 떠나가질 못하고 있었다.

"일단 약혼은 약식으로 진행하고 결혼을 국혼으로 진행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상관없습니다. 그렇지 않느냐? 아네스."

루이가 황제의 말에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고는 아네스에게 묻자 아네스는 그제야 멍하니 태자를 쳐다보던 걸 멈추고는 정신을 차렸다.

"네, 네? 예... 그걸로 좋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이번엔 시선이 태자에게 쏟아졌다.

"...상관없습니다."

태자마저 동의하자 그 뒤부터 절차는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황제와 루이는 빠르게 약혼 절차를 밟아나갔다.

"호, 혹시 절 기억하시나요?"

"...?"

그때 아네스가 지루한 듯 황제와 루이를 보고 있던 태자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제야 태자는 그녀에게 제대로 시선을 주었다.

'홍채 이색증이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만난 적이 있습니까?"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그 대답에 그녀가 조금 서운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태자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처럼 눈에 띄는 사람을 만난 기억은 없었다.

"괜찮아요. 태자 전하께서 기억하지 못하셔도... 제가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서운한 표정도 잠시.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태자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해맑은 미소가... 태자는 어딘가 조금 뒤틀려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 만날 땐... 기억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녀의 부탁에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그녀를 다시 만나진 못했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확실히... 태자는.

아니 이젠 황제가 된 그는 그녀를 확실히 기억했으니까.

--

한 소녀가 프리아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났다.

자식이 귀했던 프리아의 왕 루이에겐 단 하나뿐인 소중한 딸이었고, 그렇기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딸이기도 했다.

루이는 이미 자기 뒤를 이을 양자를 동생에게 받아들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그녀에게 애정을 쏟았다.

비록 법과 원칙 때문에 소녀에게 이 왕국을 물려주진 못하더라도 사랑은 듬뿍 주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소녀는 원하는 것은 전부 얻어냈고, 모두에게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소녀에게 무한한 애정을 주는 부모, 소녀를 친동생처럼 아껴주는 오라버니, 소녀의 어떤 어리광도 받아들여 주는 고용인들까지.

소녀에겐 그 모든 것이 당연했고, 그 어떤 것도 원하면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아바마마. 부탁이 있어요."

"오! 아네스. 그래 무엇이니. 이 아빠가 뭐든 들어 주마."

당장 이탈리를 지도에서 지워달라고 해도 들어 줄 거 같은 루이의 말에 소녀는 말했다.

"저... 제국의 황궁이 보고 싶어요."

"황... 궁 말이냐?"

루이는 잠시 고민했으나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딸을 보고는 금세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볼 수 있지. 당장 제국에 연락을 넣어보마."

"사랑해요!"

소녀가 루이의 품에 안기면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하자 루이의 얼굴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적어도 소녀에겐 운명적이었던 첫 만남은...

아주 작은 변덕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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