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졸라서 도착한 황궁은... 확실히 소녀가 본 그 어떤 건물보다도 크고 웅장한 맛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소녀는 황궁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게 황궁... 길을 잃어버리진 않을까요?"
"허허! 걱정 말거라. 이 아빠 손만 꼭 잡고 있으면 길을 일을... 아네스?"
루이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다가 어느새 소녀가 사라진 걸 깨닫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네스! 아네스!"
루이는 다급하게 소녀의 이름을 외쳤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 어쩌지?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 난..."
"진정하십쇼. 황궁 안입니다. 공주님의 신변에 위협을 가할 자는 없을 겁니다."
그런 둘을 호위하기 위해 동행한 회색 머리의 남자는 망가지려고 하는 루이를 진정시켰다.
진한 회색 머리카락을 가르마로 잘 정리한 젊은 남자는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실제로 궁녀가 힐끔힐끔 그를 쳐다볼 정도였으니까.
그는 이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면서 루이를 안심시켰다.
"브레드.... 자네의 말이 옳아. 진정해야지."
덕분에 안정을 되찾은 루이가 말하자 브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가진 못했을 겁니다. 신 브레드. 반드시 공주님을 찾아오겠습니다."
"그대만을 믿겠네. 꼭 그 아이를 찾아주게."
루이가 진지한 얼굴로 당부했다.
브레드 엔서니.
프리아가 자랑하는 최강의 기사.
그의 실력을 믿었기에 루이는 안심할 수 있었다.
앵글의 자부심이 그 전장의 사자라면, 프리아의 자부심이 바로 이 남자였으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금위대장..."
그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왔을 뿐인데도 느껴지는 화끈한 열기가... 이 남자의 강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내 딸이... 사라졌다네."
루이가 심각한 얼굴로 말하자 금위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금위대를 풀어서 공주님을 찾겠습니다."
"그래주면 정말 고맙지! 금위대의 배려에 감사하네."
루이가 기쁜 얼굴로 말하자 금위대장은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재상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루이 전하께서는..."
그 말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네스에게 황궁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재상과 약속을 잡았으니까.
황제도 아니고 그 재상을 상대하는 일이니 아무리 아네스가 사라졌다고 해도 미룰 수는 없었다.
"바로 가겠다고 전해주게. 브레드. 부탁하네."
루이가 브레드에게 부탁하자 브레드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소녀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로 사라지셨을까? 우리 말괄량이께서는."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분이다.
브레드는 그런 생각하면서 분주하게 황궁을 돌아다녔다.
분명... 그 어린 소녀가 가 봐야 그리 멀리 가진 않았을 거라 확신하면서.
--
그러나 그런 브레드의 기대를 외면하듯 아네스는 벌써 황궁에서도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상태였다.
"뭐야? 못 보던 얼굴인데?"
그런 그녀를 향해 까칠한 인상의 소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눈매가 더럽긴 하지만 그래도 그 나이에 맞게 귀여운 소년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붉은 머리를 뒤로 묶은 소년은 공을 든 채 아네스를 경계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금안...'
아네스는 소년의 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금안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눈 예쁘다."
아네스가 그 소년의 반짝이는 금안을 보면서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자 소년은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뭐, 뭐야 갑자기. 그보다 누구야. 넌!"
소년이 퉁명스럽게 묻자 아네스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대답했다.
"나? 아네스."
아네스가 순순히 자기 이름을 밝히자 소년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수상한 사람은 아닌 거 같았으니까.
"아네스? 어디서 들어 본..."
그보다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 이름이었다.
그렇기에 소년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라오허! 공 가지러 간다더니 아예 새로 만들려고 하냐?"
검은 댕기 머리에 곱상하게 생긴 소년이 그런 소년의 머리를 후려치면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민 이 개새끼야!"
"말하는 거 천박한 거 봐라. 수준이 보이지. 그보다 이 예쁜이는 누구?"
라오허라 불린 소년의 욕설에 바로 독설을 날린 민이라 이름 불린 소년은 아네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런 소년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몇 살?"
"11살."
아네스가 싱긋 웃으면서 대답하자 민이 호들갑을 떨었다.
"와! 나랑 동갑이네. 라오허! 우리랑 동갑이다. 이거 신기한데?"
"...아네스. 기억났어. 재상의 손님이잖아."
라오허는 그제야 아네스를 기억해냈는지 약간의 적의를 담아서 말했다.
재상이 언급되자 민은 움찔하더니 언제 친근하게 굴었냐는 듯이 바로 아네스에게서 떨어졌다.
"아하하, 형님한테 난 이 여자랑 관련 없다고 증언해 줘."
"...비겁한 놈."
라오허는 그런 민을 질린 눈으로 쳐다봤지만, 정작 그 역시 형은 무서웠다.
그렇기에 그의 몸은 정직하게 소녀에게서 떨어지고 있었다.
"왜? 재상하고 관련 있는 아이와 친해진다고 죽일 거라도 같으냐?"
"모르잖아. 나 이미 전에 독약을 먹였다가 찍..."
쩌적.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민이 무심결에 대답하다가 그 소름이 끼칠 정도로 듣기 좋은 미성이 누구의 것인지 깨닫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라오허는 덜덜 떨면서 공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왜 그리 겁을 먹느냐.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아, 아니 형님. 그게..."
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눈조차 못 마주치며 말하자 형님이라 불린 소년이 지붕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공을 주워서 라오허에게 쥐어주었다.
"아..."
아네스는 그제야 그 소년을 제대로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저 라오허란 소년도, 민이란 소년도, 참으로 예쁜 사람들이란 생각은 했는데... 지금 눈앞에 소년은 그 격이 달랐다.
자신보다도 곱고 윤기가 넘치는 검은 머리카락, 보는 사람을 홀릴 것 같은 금색의 눈동자.
풍기는 분위기에 묘하게 압도당하는 것 같은 소년이 라오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저기서 계속 놀고 있어라. 손님은 내가 응대할 테니."
"어? 어, 어. 알았어. 가자."
라오허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민을 데리고 사라지자 소년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차가운 눈동자가 자신에게 닿는 순간.
아네스는 그 눈동자에 홀릴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난! 아네스. 넌?"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는 이 소년과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아네스는 바로 자신을 소개하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은 그런 아네스를 힐끔 보더니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프리아의 공주님이군요. 길을 잃으신 겁니까?"
"이름은?"
소년은 그 질문에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태도였다.
"진위. 대답이 되었습니까."
"진위?"
아네스는 그 이름을 듣고는 말했다.
그녀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으니까.
"재상이 말한 태자?"
재상이 말한 그 태자가 이 소년이었구나...
아네스는 신기한 기분이 들어서 소년을 한참을 쳐다보았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런 말투인 건 넘어가겠습니다. 아직 어린 듯하니."
그런 그녀의 시선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진위는 싸늘하게 말했으나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나이는?"
"네."
"누구랑 제일 친해? 좋아하는 음식은?"
"네."
진위는 그녀를 안내하면서 건성으로 대답했으나 아네스는 꿋꿋하게 계속 질문했다.
"재상하고... 사이 나빠?"
잠시 후...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묻자 진위는 그대로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질문했다.
"공주님께선 나이가 어찌 되십니까?"
"11살."
"...참으로 사랑 받으면서 자라신 분 같군요."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진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가? 그보다 말이야. 이 황궁 진짜 넓다. 멋있어. 그래서 말이지 재상한테 이곳에서 살 수 있냐고 물어 봤더니 방법이 있다더라고."
행복한 얼굴로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진위는 다시 묵묵히 걸었다.
그걸 본 그녀는 다시 진위를 따라 걷다가...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그... 나랑 이야기하는 거 재미없어?"
"...솔직히 재미없습니다."
진위는 솔직하게 말하고는 그녀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계속 걸었다.
그녀는 힘겹게 그런 진위를 따라 걸으면서 물었다.
"왜 재미가 없어?"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보다 재상과 친하다면 저하고 친해져서 좋을 건 없습니다."
"...왜?"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둘 다 친해질 수는 없는 건가?
만날 때마다 맛있는 사탕을 주는 재상은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네스가 그런 생각하면서 고개를 갸웃하자 진위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사이니까요. 뭐, 그래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네요."
진위는 그녀를 향해 덤덤하게 말했다.
이 황궁에서 그녀를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재상에게 그런 권한이 있을 리 없으니 그 말의 의미는 뻔했다.
그 재상이 차기 황제로 밀고 있는 진 타마드와 이 소녀를 혼약시키는 것.
그렇게 프리아와 혈맹을 맺으면 그땐 그 유명한 브레드가 타마드가 황제가 되는 것에 방해가 될 자신을 죽이려고 올까?
'나쁘지 않지.'
그만한 강자의 손에 죽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쁘지 않은 손님일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하게 되니 진위가 그녀를 보는 눈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꼬옥.
"다시... 만날 수 있어?"
그 눈을 보면서 아네스가 진위의 소매를 잡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 아름다운 소년과?
아네스는 그런 생각하니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네,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적으로.'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적으로 만나게 되겠지.
그런 점에서 브레드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만약 재상과 손을 잡고 자신을 죽이는데 실패한다면...
'내 손에 죽게 될 테니.'
이 가녀린 소녀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 생각하니 진위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목숨을 건 도전이다.
자신은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번 사선을 넘어선다면...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물론 살아남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어느 쪽이든 그에겐 나쁠 것도 없었다.
살아남는다면 그만큼 강해졌다는 것이고, 죽는다면... 적어도 대륙에서도 이름을 알린 강자에게 죽는 것이니까.
진위는 그때가 빨리 오기만을 바라면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리고... 그 미소를 본 아네스는 그대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했다.
그 광경을 보는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문득... 그녀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미소가, 저 아름다운 웃음이.
자신을 향했으면 좋겠다고.
저 미소를... 그녀는 가지고 싶었다.
"공주님!"
그때 그녀를 발견한 금위대장이 달려와서는 급하게 말했다.
"루이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잘 데려가거라."
"태, 태자 전하. 그, 그것이..."
그제야 태자를 발견한 금위대장이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태자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 하자. 아네스는 생각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 소년을 본 모두가 쩔쩔매는 걸까?
"재상에게 안부 전해주고. 그대가 무얼 할지 기대하고 있겠다고."
"...그리 꼭 전하겠습니다."
금위대장은 태자의 말에 사색이 되었으면서도 꾸벅 고개를 숙였고, 아네스는 그런 금위대장에게 이끌려 저 멀리 가버렸다.
"형. 그래서 진짜 다시 만날 거야? 저 여자랑? 확실히 장래가 기대되긴 하는데."
그때 어느새 따라와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소녀는 재상 쪽 사람인데?
정말 만날 수는 있을까? 진민은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인물과 한 약속에 의미가 있겠느냐. 다만... 만나게 될 건 자명하겠지. 아마도 타마드와 이어질 테니."
그러나 황제는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 여겼다.
만나기야 하겠지. 기억할 필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자신이 살아남는다면 죽여야 할 여인을 기억할 정도로 태자는 여유가 있진 않았다.
"아, 그렇긴 하겠네."
진민은 그 재수 없는 타마드를 생각하자 기분이 나빠졌는지 표정을 구겼고, 진위는 그대로 조금 전 소녀를 기억에서 지웠다.
기억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그때의 진위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
"아니! 그 작은 몸으로 대체 어디까지 가신 거랍니까?"
소녀가 금위대장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엔 브레드가 서 있었다.
꽤 열심히 돌아다녔는지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던 브레드는 그대로 아네스에게 다가와선 양손으로 들어 올리고는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귀여운 공주님. 제발 걱정 끼치지 말아 주십쇼. 이 불민한 기사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엄살을 부리면서 브레드가 부탁하자 아네스는 그런 브레드를 보며 말했다.
"브레드. 브레드. 나 가지고 싶은 거 생겼어."
"오! 무엇입니까? 신이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구해 오겠습니다."
또 가지고 싶은 게 생기신 걸까? 우리 천사께서는.
브레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으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만큼... 아네스가 원하는 것은 브레드에겐 정말이지 난처한 것이었으니까.
"응! 나 태자 전하가 가지고 싶어."
"...네?"
브레드는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주변엔 어느새 아무도 없었다.
"함부로 그런 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브레드가 엄중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루이 전하께서 재상과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알고는 계신 건가?
재상과 함께 제국의 2황자인 타마드 전하와 공주님의 혼약을 추진 중이었다.
지금 황제는 나약했고, 프리아는 어떤 자와 손을 잡아야 할지 시종일관 저울질했다.
사실 황후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재상한테 그 저울이 기울었겠지만, 그 황후가 보통 사람이 아닌데다가... 프리아족으로서는 그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얻은 불이익을 해결하기 위한 상대를 신중하게 골라야 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루이는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역시 모든 실권을 거머쥐고 대장군과도 결탁한 재상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옳다고.
그런 점에서... 공주님이 달라고 말하는 태자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자였다.
"그래서 안 돼?"
"그, 그것이..."
브레드가 대답을 망설이자 그녀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줘."
"고, 공주님."
"왜 안 된다는 건데! 줘! 줘!"
눈물까지 글썽이며 떼를 쓰기 시작하는 아네스를 보면서 브레드는 안절부절못했다.
대체 태자가 무엇을 했기에 공주님이 이토록 집착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네스! 무사했구나!"
그때였다.
재상과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온 루이가 그대로 아네스에게 달려와서는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아네스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본 루이는 브레드에게 화를 냈다.
"아니 뭘 했기에 이 아이가 우는 게야! 아가야. 울지 마렴. 자, 뚝. 이 아빠가 뭐든 들어줄 테니까."
"아, 아니 그것이..."
브레드가 쩔쩔매자 루이는 한숨을 쉬고는 아네스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물었다.
"응? 이 아빠한테 다 말해 보렴."
"아바마마. 저... 태자 전하가 가지고 싶어요."
"그 말은... 태자비가 되고 싶단 이야기니?"
루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태자비라니... 이미 재상과 이야기가 거의 다 끝난 상태인데다가 지금의 태자와 결합하는 건 전혀 이점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뭔데요? 그게 되면... 태자 전하는 제 것이 되는 건가요?"
"그럼, 물론이지."
루이는 자기 딸이 원한다면 뭐든 들어 줄 마음이 있었다.
재상과 적이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루이는 그 누가 적이 되던 이겨 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거란다."
루이는 그저 이 사랑스러운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이 세상을 적으로 돌리게 되더라도 이루어주고 싶었다.
"원해요. 전 태자비가 되고 싶어요."
아네스의 말에 브레드가 뭐라 말하려고 했으나 루이는 그런 브레드를 제지했다.
그러고는 아네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거란다. 반드시. 이 아빠가 이루어 주마. 그러니 울지 말고 웃으렴. 아가야. 넌 웃는 게 가장 잘 어울리니 말이다."
루이는 그 무엇을 적으로 돌려도 상관없었다.
이 아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고마워요. 아바마마."
그런 루이를 꼭 끌어안아 주며 아네스는 웃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
그 미소를 다시 한번 볼 수 있다.
그것만으로...
그녀에게 이 날은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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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전에 죽은 재상의 반대로 태자비가 되지 못한 가여운 분이십니다. 그러니 이번 일에 대해선..."
모용진이 그녀를 데리러 갔다는 것이 브레드의 귀에도 들어갔는지 브레드가 무릎까지 꿇으면서 선처를 요구해 왔다.
"일어나거라. 딱히 처벌할 생각은 아니니. 그대들의 은혜를 잊을 정도로 짐이 매정해 보였더냐."
"아닙니다..."
브레드는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한 걱정이었을까? 폐하께서는 놀랍게도 그녀를 처벌할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까.
"사실 짐은 그녀와 짐이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네. 알고 있나?"
황제는 그녀와 자신의 약혼이 진행되던 날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그때 황제는 프리아의 공주가 자신과 이어질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당장 그녀와 약혼을 하고 돌아온 날.
타마드와 재상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황제에게 잊혀지지가 않았으니까.
"짐은 당연히 재상의 사람인 그대들이 타마드와 이어질 거로 생각했으니."
프리아는 사실상 재상을 택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보를 보여주었으니 황제는 당연히 그쪽과 이어질 거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무문제께서 프리아와 혼약을 들고 왔을 땐 참으로 놀라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던 것이기도하고.
물론... 기대와 다른 그들의 선택에 억한 심정이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 그것은..."
브레드는 식은땀을 흘렸고,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냥 틀린 추측은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그 반응에 황제는 마냥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는 물었다.
"왜 갑자기 재상이 아닌 짐을 택했을까? 어째서? 그때 재상을 택했다면 짐은 그대한테 죽었을 터인데."
'...거기까지 알고 계셨던 건가.'
브레드는 놀랐다.
재상이 밀고 있던 타마드와 아네스의 결혼엔 당연히 그 조건도 있었다.
조건은 바로...
타마드가 황제가 되면 프리아가 겔만과 이탈리, 브리탄 지역을 합병하는 걸 묵인하는 대신 그때의 태자.
즉 지금 눈앞에 있는 황제를 브레드가 암살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브레드의 얼굴이 굳었다.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니 편히 말하게. 짐도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야."
황제는 딱히 책망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땐 그것을 바랐으니 오히려 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싶다면 책망하고 싶었지.
"어째서 갑자기 방향을 틀었을까? 확신도 없이 왜 불안정한 길을 골랐을까? 짐은 그게 이해가 가지 않구나."
"그, 그것은..."
"믿어지진 않다만. 그 결정에 아네스의 개입이 있었나?"
"...네."
황제는 그제야 대충 이해가 갔다.
그 불합리하고 엉망진창인 선택이 말이다.
그것은...
"그녀가 짐을 원했기에?"
그 여자가 자신을 원했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 때문이었으니까.
"...그렇습니다."
황제는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왜 자신을 원했을까? 그녀와 자신은 아무런 접점도 없었을 터인데...
황제는 그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그것은 저 역시 모르는 일입니다. 갑자기 공주님께서 원하셨으니까요."
"거짓은 아니구나."
황제는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브레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모용진을 보냈으니 곧 이곳으로 올 것이다.
황제는 그때 그녀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어째서 재상이 아닌 자신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말이다.
--
흐흥. 흥. 흥. 흥.
콧노래를 부르면서 머리를 빗질하는 그녀를 보면서 전속 시녀가 말을 걸었다.
"오늘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빗질도 스스로 하시고."
"그렇게 티가 나?"
"그럼요! 옷도 예쁘게 입으시고, 혹시 누구라도 만나러 가시나요?"
시녀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꺄악! 다, 당신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덩치 큰 사내를 보고 크게 놀랐던 시녀가 뭐라 따지려고 했으나 아네스는 손을 들어서 그녀를 제지했다.
아네스는 이 남자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폐하께서는..."
아네스가 약간 기대가 어린 눈으로 모용진의 뒤를 보며 묻자 모용진은 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그건 조금 아쉽네요."
남자.
아니 모용진의 대답에 그녀는 아쉬워하면서도 놀라진 않았다.
오히려 모용진이 속으로 몹시 놀라고 있었다.
'방 안이 무슨...'
방 안에 잔뜩 걸려 있는 초상화들을 보면서 모용진은 그야말로 질려 버렸다.
전부 폐하의 초상화.
그것도 여러 종류의 초상화가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생활할 수 있는 거지?
모용진은 그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데려가야지.'
아무튼 그녀를 폐하에게 데려가야 했다.
모용진은 그런 생각하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올라타시지요."
"이게 그 구름인가요. 푹신하네요."
모용진의 손을 잡고 구름 위로 올라온 그녀는 구름을 만져 보면서 중얼거렸고 모용진은 의문을 품었다.
'이게 그 구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너무 많다.
바뀐 자기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것.
마치 자신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 같은 그녀의 차분한 태도.
자신의 구름을 이미 알고 있는 듯이 말하는 모습.
무엇보다도...
'초상화가...'
너무나도 사실적인데다가 폐하의 성장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마치...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소름이 돋는 일이다.
폐하를 그토록 오래 감시하고 있던 이유가 뭐지? 사랑 때문인가?
'그런 걸...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나?'
그런 집착이자 광기를... 사랑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모용진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금방 도착하니 잠시 눈이라도 붙이고 있으시지요."
"어머 자면 머리가 망가지는걸요. 금위대장은 섬세함이 부족하네요."
"..."
그녀의 평화로운 대답에 모용진은 질려버렸다.
자신이 어떤 죄를 짓고 끌려가는 지 알고는 있는 건가? 알고 있겠지.
그럼에도 이렇게 당당한 건 대체... 물론 처벌은 없겠지만 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꺼림칙하군.'
뭔가 뒤틀려 있는 거 같은 여인이다.
그렇기에...
모용진은 그녀를 이해하는 걸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