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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138화 (138/235)

"그래... 그랬단 말이지."

통합 훈련을 끝마치고 돌아온 황제는 미령의 보고를 들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스키족에선 합궁 일자를 제때 지키지 못하겠으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며칠 말미를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합궁 상대가 가출이라니... 참 흥미롭구나."

황제는 솔직히 놀랐다.

합궁이 싫다고 가출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까.

황제는 솔직히 싫다는 사람 대신 다른 인물로 대체하면 되지 않나 싶긴 하다만...

"그들의 과실이니 굳이 여유를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순번을 미뤄버리면..."

"그 여자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미령의 말에 황제는 덤덤하게 질문했고, 미령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미 정해진 합궁 후보를 그런 이유로 바꾼다면 아무래도 문제가 되겠지요."

"...그것도 그렇구나."

이미 합궁 상대로 정해진 여인이 도망쳤고, 그 이유로 급하게 여인을 바꾼다?

그야말로 제국에 대한 모욕이다.

그들이 제국과 척을 질 생각이 없는 이상 난처한 입장이리라.

"며칠 말미를 주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은 아니지."

솔직히 고작 며칠.

이미 사정에 따라 합궁을 미뤄온 황제에게 큰 문제는 아니다.

애초에 미룬다고 이제 와서 반발할 민족 수도 적을 테고, 오히려 이젠 과반수가 합궁을 진행했으니 일정을 미루는 것은 오히려 이미 합궁을 한쪽에선 은근히 기뻐할 사안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렇다고 그들에게 차별 대우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들의 사정으로 합궁을 미루는 것과, 황제의 사정으로 합궁을 미루는 것은 경우가 달랐으니.

어쩔 수 없는 문제도 아니고, 가출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미루는 것이니...

"대신 그 며칠의 말미를 주었음에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순번을 미루는 정도로 끝내서는 안 되겠지. 그들에게 전해라. 원하는 대로 일주일의 기한을 줄 터이니 그 안에 해결하지 못한다면..."

황제는 덤덤하게 선언했다.

"이번 대에서 스키족과의 합궁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고. 그리 전하거라."

"...알겠습니다."

미령은 그 말에 몸을 떨었다.

그 결정의 무거움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스키족 주변에 있는 민족들이..."

"프리아와 이탈리, 아산족과 투르크 정도겠군요. 바다까지 고려하면 앵글족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미령의 말에 황제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스키족 처지에선 반드시 해결해야겠지."

"...그렇습니다."

미령은 조금 몸을 떨면서 대답했다.

황제가 합궁을 진행하지 않겠다 함은... 제국의 영향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졌다.

제국의 영향력이 약했다면 사실 방금 그 결정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볼모를 잡히지 않고 제국에 구애 받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

허나... 제국의 영향력.

황제의 권위가 강하다면 그 이야기가 달라졌다.

당장 이젠 역사 속으로 사라진 달막족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이번 황제가 합궁을 진행하지 않겠다 선언한 달막족은 바로 주변에 있는 민족들에게 무력 침공을 받았다.

달막족 주변에 있던 진륜과 신비는 그 영토를 서로 나눠먹었고, 저항하는 이들을 죽이고, 황야로 내쫓았다.

그런 불합리하고 아무런 명분도 없는 무력 침공에도 그 두 민족은 제국에게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았다.

그런 것이다.

황제와 혈맹을 맺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제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장 부당한 무력 침공에도 제국은 침묵할 정도로.

그렇기에 지금, 이 결정은 스키족에겐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느낌일 거다.

제국의 비호로 그런 강대한 민족들 사이에서 버텨온 스키족의 운명은 그 순간 끝이 날 테니까.

프리아와 이탈리, 투르크는 그대로 스키족이 다스려왔던 영토를 나눠먹을 것이고, 앵글족은 슬쩍 끼어들기 위해서 눈치를 볼 테지.

아산 정도만이 별 관심 없이 고고하게 그 고산 지대를 지킬 것이다.

즉 황제가 그리 선언한 이상 시간 안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스키족에겐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보다 어쩐 일로 혼자 있느냐?"

황제는 집무실 구석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과자를 먹고 있는 니사에게 말을 걸었다.

늘 자매가 붙어다니더니 오늘은 어쩐 일인지 혼자 있었으니까.

"왜요? 혼자 있으면 곤란한가요?"

"...아니, 그건 아니다만."

황제는 니사의 날이 선 반응에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니사가 저런 날이 선 반응이라니...

"둘이 싸운 거 아닌가?"

황제가 그 모습을 보고는 귓가에 속삭이자 미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거 같습니다. 별일이네요."

그 말대로... 그토록 꼭 붙어다니던 자매가 싸우다니... 황제에겐 꽤 놀랍게 느껴졌다.

"좋은 상황은 아니구나. 짐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 니사 비가 많이 화가 난 거 같으니까. 리사 비에게 사정을 물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일단 정보부터 얻는 편이 좋겠다.

미령의 말은 대충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고, 황제도 그런 그녀의 의견에 공감했다.

"그럼 다녀오마."

"...네."

니사가 화를 낸 것에 미안한 감정을 느끼는지 미안한 얼굴로 대답하는 걸 본 황제는 그런 니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는 집무실을 나왔다.

일단... 리사와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다.

--

"안 싸웠어요! 단지... 단지... 조금 일이 있었을 뿐이예요."

리사는 황제의 질문에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그걸 본 황제는 조용히 확신하고는 말했다.

"싸웠구나."

"...네."

리사는 결국 인정했다.

그걸 본 황제는 리사를 향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때 일을 들어봐도 되겠느냐?"

"그, 그게..."

리사는 그 말에 머뭇거리고는 황제의 등에 딱 붙어 있는 아네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말하기는 조금..."

아무리 그래도 이런 사적인 일을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태연하게 말하고 싶진 않았다.

"어머, 전 없는 사람 취급해도 되는데요."

아네스가 그 말에 황제의 등에서 얼굴을 떼어내고는 말하자 황제는 그런 아네스를 보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거라."

"맨입으로요?"

아네스가 싫다는 듯이 더욱 등에 붙으면서 묻자 황제가 질문했다.

"뭘 원하느냐?"

그 질문에 아네스는 지금 입고 있는 용포를 요구했고, 황제는 망설임 없이 자기 용포를 벗어서 아네스에게 건네주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 용포를 들고 아네스가 사라지자 리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그 광경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좀... 위험한 여자 아닌가요?"

저 옷으로 대체 무얼 할 생각인 걸까?

리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런 생각하고 있을 때 황제가 말했다.

"아무튼 아네스도 갔으니 이제 이야기해보거라."

"그게... 정말 별건 아니었어요."

그 말에 리사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계기는... 어쩌면 정말 사소했다.

--

이른 아침이었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화장하고 있던 리사는 자기 비녀가 보이지 않자 뒤에서 준비 중인 니사에게 물었다.

"내 비녀 못 봤어?"

리사가 가장 아끼는 비녀가 보이지 않았다. 리사는 분주하게 비녀를 찾으면서 니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응? 거기 없어?"

조금 졸린 듯한 니사의 대답에 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없는데? 혹시 못 봤... 아! 뭐야, 또!"

리사는 뒤를 돌아보다가 니사의 머리에 꽂혀 있는 자기 비녀를 발견하고는 투덜거렸다.

"또 내 걸 가져가면 어떻게 해. 얼른 돌려 줘."

하여간 칠칠 맞기는... 리사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손을 내밀자 니사가 가볍게 사과했다.

"미안. 근데 풀기 귀찮은데 그냥 오늘은 내 거 쓰면 안 돼?"

니사가 다시 머리를 정리하기 귀찮은지 칭얼거리듯이 말하자 리사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얼른 줘!"

리사가 짜증을 내며 말하자 니사가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고작 비녀로 그렇게 짜증 낼 건 없잖아."

"뭐어? 고작? 너 정말! 이게 고작으로 보여? 그럴 거면 물건을 뭐 하러 네 거, 내 거 구분해? 다 같이 쓰지? 쌍둥이라고 그런 것도 같이 써야 해? 그렇게 생각이 없어?"

"...비녀 하나 잘못 썼다고 생각이 없단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 거야?"

그런 리사의 잔소리에 니사는 서운한 얼굴로 그렇게 물으면서도 순순히 비녀를 뺐다.

그러고는 리사에게 건네주고는 말했다.

"그렇게 정 없게 다 구분해야 할 거 같으면, 앞으로 방도 구분해. 언니가 이 방 써. 난 다른 방에서 잘 거니까."

"뭐?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니사! 니사!"

콰앙!

니사가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 버리자 리사는 한참을 그렇게 문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스스로가 너무 예민했다는 것 정도는 그녀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리사는 자신이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시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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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솔직히 짐은 왜 싸웠는지 여전히 이해를 못하겠구나."

아침에 있던 일을 들은 황제의 덤덤한 말에 리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요... 왜 싸운 걸까요. 우리."

리사도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싸울 일은 전혀 아니었다는 거.

어쩌면... 예전부터 은근히 둘의 사이엔 조금씩, 미세하게 금이 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 생각한다면 화해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하지만... 전 잘못한 거 없어요. 그 아이가 사과하기 전까지 먼저 사과할 생각도 없고요."

리사의 단호한 말에 황제는 일단 리사를 설득하는 건 포기했다.

"그러하냐."

"네."

리사는 그리 대답하고는 잠시 황제를 보았다.

변함없이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

그 금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쌍둥이라고 해서... 모든 물건을 구분 짓지 않고 써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오히려... 쌍둥이라서 전 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리사는 속에 담아 두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많은 사람이 리사와 니사를 헷갈려하고는 했다.

성격은 참으로 달랐지만, 생긴 건 똑같았기에 모두가 입을 열기 전까진 둘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점에서...

"그래서 폐하께서 저흴 바로 구분해주셨을 때 정말... 기뻤어요. "

그때 리사는 정말 기뻤다.

자신과 니사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라고.

리사는 리사고, 니사는 니사라고.

폐하께서는 말해 준 거 같아서... 솔직히 정말 기뻤다.

어쩌면 그때부터...

리사는 그런 생각하면서 황제를 슬쩍 훔쳐보았다.

여전히 흔들리지 않은 그 눈동자가 좋았다.

자신들을 제대로 구분해주는 그 눈동자가 좋았다.

"어떤 장소에 있던, 어떤 상황에 있던, 어떤 옷을 입던... 폐하께서는 저희를 구분해주실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리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황제를 볼 때마다 붉어지려는 얼굴을 주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으니까.

"그렇구나."

황제가 그 대답을 끝으로 침묵하고 있을 때, 리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폐하께서는 동생과 싸운 적이 있나요?"

리사가 황제가 다른 동생들과 싸운 경험이 있는지 궁금했다.

만약 있다면... 리사는 황제에게 조언을 구해볼 생각이었으니까.

"많지."

황제의 간단한 대답에 리사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싸운 적이 많다면 분명 화해도 했을 테니까.

리사는 동생과 화해하는 방법에 대해서 듣고 싶었다.

"그럼 어떻게 화해했나요?"

"...?"

황제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화해하다니?

황제는 자신과 싸운 동생과 화해할 일이 없었다.

"짐과 싸운 동생들은 그 과정은 다르나 결말은 같았지. 전부 저승에 있으니."

"..."

황제의 섬뜩한 대답에 리사는 확신했다.

폐하한테 조언을 듣는 건 무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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