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제자 이름은 전혀 도움이 안 되는구나."
설육의 느긋한 말에 강상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가게 주인은 자신이 황제의 스승이라는 강상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헛소리하지 말고 돈을 내라고 압박해왔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으나... 그 상황을 극복한 것은 놀랍게도 설육이었다.
"이 늙은이 글이 뭐가 그리 좋다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설육이 가게 주인에게 붓과 종이를 요구했고, 가게 주인은 설육의 모습에 뭔가를 느꼈는지 뜻밖에 순순히 그것들을 가져다주었다.
설육은 그대로 종이에 글귀를 적어 주인에게 건넸고, 그것을 본 주인은 마치 귀인을 만난 사람처럼 공손해지더니 값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여행에 쓰라며 은자가 든 묵직한 주머니를 건네줄 정도였다.
"강가야. 그러니 네가 아직 도를 알지 못 하는 것이다. 자고로 자신의 업에 맞는 도를 알고 이치를 깨달으면 자연히 세상이 그대를 도울 텐데 아직도 네놈은 속세의 이치에 얽매여 있으니... 어찌 선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
"쯧!"
강상은 설육의 지루한 가르침에 혀를 차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시간도 널널하니 좀 더 돌아다녀 보자. 이제 그 돈이란 것도 충분하지 않느냐."
설육의 말에 강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급할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 인세를 둘러보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슬슬 저녁이니 숙소를 잡고 식사부터 하자고."
"좋은 생각이구나. 이 돈은 그래도 가장 최근까지 인세에 머물렀던 네가 관리하거라. 난 인세의 현물이 가진 가치는 잘 모르겠구나."
돈주머니를 건네준 설육이 그리 말하면서 가장 화려한 여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강상은 한숨을 쉬면서도 그가 건넨 은자가 가득한 주머니를 챙겼다.
'괜히 저 늙은이랑 같이 왔어.'
차라리 천선과 같이 왔으면 덜 짜증이 났을 터인데.
강상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은 하지 못하고 그저 화만 속으로 삭힐 뿐이었다.
인세에선 고령에 속하는 그라고 해도... 저 늙은이들 앞에선 그저 막내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재상은 자신에게 올라온 보고를 보면서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반응했다.
"폐하의 스승이 관도에 나타났다니... 태사님께서 우화등선하신지가 벌써 몇 년이거늘."
태자태사는 태자가 황제가 되자마자 태사로 봉했으나 당연히 우화등선하여 속세를 떠나신 인물이라 관도에서 발견될 분은 아니셨다.
허나...
'이리도 그분의 특징과 일치하면 아무래도...'
그 가능성을 완전 부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재상의 고민이 깊어졌다.
"일단 조사를 계속해 보도록. 좀 더 확실해지면 그때 보고를 하는 편이 좋겠지."
아무튼 이런 불확실한 정보로 괜히 폐하의 마음을 심란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재상은 추가 조사를 명하고는 슬슬 퇴궁을 준비했다.
태사께서 돌아온 것이 사실이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건 자명했기에 재상은 내심 그 노인이 정말 태사기를 바라고 있었다.
--
"...그래서 이곳에."
금일 정무를 마치고 가볍게 씻은 뒤 침소로 돌아온 황제는 자신을 반기는 니사를 보고는 머리에 물기를 닦아내면서 말했다.
그 모습을 니사는 멍하니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물기에 젖은 황제의 모습은 확실히 그녀에겐 조금 자극적이었다.
"네, 아무래도 잘곳이 없어서... 같이 자도 되나요?"
"합궁이 없으니 상관은 없겠지. 짐의 옆에서 자거라."
머리를 말리며 황제가 간단하게 허락하자 니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비와 같이 자는 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고... 잠시 기다리거라. 그대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오느라 미쳐 머리를 못 말렸구나."
황제는 그리 말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느긋하게 말리고는 상선에게 수건을 넘겼다.
"이만 물러가거라."
"네,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상선이 물러나자 황제는 주변의 궁녀들도 전부 밖으로 내보내고는 그대로 편히 침대에 앉았다.
"오늘은 일단 이곳에 머물고, 만약 계속 이리 생활할 거라면 둘에게 다른 방을 내주도록 하마."
황제는 그리 말하고는 여전히 서 있는 니사를 보며 고민했다.
여전히 싸워서 기분이 좋지 않은걸까?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럴 땐...'
둘이 싸운 것에 집중하지 말고, 기분이 나쁠 때 자신은 어떤 게 도움이 되었는지를 생각하자.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그대로 니사를 자기 무릎에 눕혔다.
"딱히 부드럽진 않겠지. 그래도 짐은 이렇게 자고 나면 기분이 좀 풀리더구나."
"그, 그게... 그런가요?"
당황한 목소리로 니사가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너무 붉어서 터지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두근, 두근.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에 황제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몸이 안 좋은 건가? 심장이 요동을 치는구나."
"그... 화, 확실히 심장엔 좋진 않은데요..."
"?"
그 대답에 황제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열도 있는 듯하고."
"그, 그건..."
차마 이 상황이 부끄러워서 이렇게 된 거라고는 말하지 못한 채 니사는 얌전히 누워 있었다.
"안 자나?"
이러면 잠이 오던데... 황제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묻자 니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는 누가 이런 걸 해줬나요?"
마치 누군가가 해줬다는 것처럼 말한 것을 기억한 니사가 작게 질문하자 황제는 가볍게 대답했다.
"오르테가 녀석이 몇 번 해주고는 했지. 그 녀석처럼 부드럽진 못해서 미안하구나."
'아, 아뇨. 솔직히..."
이 단단한 느낌이 좋았다.
그런 생각하며 니사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좋네요. 이런 거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신 뒤로 처음이거든요."
따스함이 느껴지고, 묘하게 안정되는 기분이다.
니사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하자 황제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좋다고 하니 다행이긴 하구나. 이대로 한숨 자거라. 자고 나면 조금 머리가 정리될지도 모르지."
"...폐하께서는 형제와 싸운 적이 있나요?"
그때 니사가 눈을 감은 채로 묻자 황제는 리사에게 해주었던 대로 대답했다.
"그래."
"그럼... 형제에게 열등감을 가진 적은요?"
니사는 스스로가 말하고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럴 일이 없을 텐데.
자신과 달리 완벽한 폐하께서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는데... 니사는 스스로가 바보 같은 질문했다는 걸 알고는 부끄러움에 몸을 떨었다.
"...없다고는 못하겠구나."
"...네?"
그러나 놀랍게도 황제의 대답은 그렇다였다.
그 사실에 놀란 니사가 눈을 크게 뜨자 황제는 조금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짐은... 그대들도 알다시피 그리 성격이 좋지 못했지,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지도 못하였고."
황제는 스스로가 남들과 친해지기 그리 좋은 성격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직설적인 화법은 적을 많이 만들었고, 좋지 않은 성격 역시 그 원인 중 하나였다.
"짐은 그래... 미친왕처럼 누군가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짓은 못하였지. 그 녀석처럼 친구가 많지도 않았어. 짐한테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어릴 땐 오르테가와 모용진 뿐이었으나. 사실 그들 역시 짐이 먼저 다가가서 친해진 것은 아니었단다."
늘 먼저 다가와 준 것은 그들이었고, 그런 점에서 황제는 미친왕이 참으로 부러웠다.
"그 녀석은 짐처럼 그리 좋은 성격은 아니었지. 하지만 늘 남들에게 먼저 다가갔고, 금방 사람의 호감을 샀단다. 그 점이... 짐은 솔직히 부러우면서도 그렇게 되고 싶단 생각을 했었지."
"의외네요."
솔직히 정말 의외였다.
그 폐하께서 다른 이도 아닌 미친왕에게 그러한 감정을 품었다니... 니사는 처음 알았으니까.
"짐은 타마드처럼 사람의 호감을 사는 말은 할 줄 모른다, 라오허처럼 음악에 조예가 깊지도 않지, 카무란처럼 주술에 능한 것도 아니란다. 리아 누님처럼 세력을 구축할 줄도 몰랐지. 다른 형제들도 모두 하나 정도는 짐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을지도 모르나. 결국 황제가 된 건 다른 이도 아닌 짐이었단다."
그렇게 된 것은... 자신이 장자였다는 것도 큰 이유겠지만...
이 망해가던 제국에 그나마 적합한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것도 이유겠지.
황제는 스스로가 잘나서 황제가 되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형제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성질이 더러워서...
그래서 피를 흘려야 하는 그때의 제국에 가장 잘 어울렸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 그런 감정도 사라지더구나. 남이 가진 것에 집중하지 말고 자신이 가진 것에 집중하거라. 그러면... 그러한 감정도 그저 한 때의 감정으로 희석될 테니까."
"...그럴까요."
황제의 말에 니사는 여전히 확신이 들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전 정말 아무런 장점도..."
"그대의 일 처리는 상단에서도 알아준다고 하더구나. 짐이 봐도 흠잡을 구석이 하나도 없었지."
"그, 그런 건 별로 어렵지도..."
않은 건데... 니사가 그런 생각할 때 황제가 말했다.
"그것이 장점이지. 짐이 검을 다루는 게 별로 어렵지 않다 하여 그것이 짐의 장점이 아니게 되는가?"
"그, 그건 아니죠."
"마찬가지다. 그대가 그것을 어렵지 않게 여기는 것이 그것이 그대의 장점이라는 이야기지."
"...그런 거군요."
자신한테도 있었구나.
장점이...
니사는 그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
"이제 좀 마음이 풀렸느냐?"
"...네."
똑똑.
그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황제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온 거 같구나. 만나고 싶으냐?"
"...네."
그 말에 니사는 지금 문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저기... 폐하? 혹시 여기에 니사가 있나요?"
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황제는 니사를 보았고, 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있으니 들어오거라."
끼익.
문이 열리고 바로 안으로 들어온 리사는 니사가 황제의 무릎에 누워 있는 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무릎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니사는 그런 리사의 반응에도 태연하게 황제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거야?"
"어? 그, 그게..."
리사는 머뭇거렸다.
말해야 하는데... 막상 말하려고 하니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
니사는 머뭇거리는 리사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이었으니까.
그녀가 이렇게 무언가를 말하는 데 머뭇거리는 걸 본 것은 말이다.
"미, 미..."
"미?"
"미, 미안하지 않아! 분명 네가 먼저 잘못했잖아!"
'저질렀다...!'
리사는 자신이 내뱉고도 바로 후회했다.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오히려 먼저 사과하려고 했는데...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그 말을 들은 니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고작... 그런 말하려고 여기까지 그 귀한 발걸음을 한 거야?"
"폐하한테 민폐 그만끼치고 얼른 돌아와. 이러는 건..."
사과는 못했지만 그래도 일단 데려가야 한다.
리사가 그런 생각에 말하자 니사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선 괜찮다고 하셨는걸? 그렇죠?"
"...음."
황제가 니사의 질문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쏘아지는 리사의 시선에 황제는 10만 대군 속에 홀로 있을 때보다도 더 긴장이 되었지만 그래도 일단 대답은 해야 했다.
"그래."
"그, 그러면 저도 머물러도 되나요?"
그러자 리사는 그럼 자신도 이곳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일단 니사와 같이 있다가 기회를 봐서 제대로 사과해볼 생각이었으니까.
"언니는 왜 머무는데?"
"그건..."
황제는 다시 난처해졌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머물러도 된다고 하면 니사가 서운해 할 거 같고, 그렇다고 머무르면 안 된다고 하면 리사가 차별 당한다고 느낄 거 같았다.
"...그래, 머물러도 된다."
한참을 고민하던 황제의 선택은 결국 이것이었다.
역시 차별은 할 수 없었다.
"그, 그러면 제가 나갈..."
"도망치는 거야?"
빠직!
나가려던 니사는 리사의 말에 화난 얼굴로 그대로 멈췄다.
"누가 도망친다는 거야! 언니야말로 각오하는 게 좋아."
"흥! 누가 겁먹을 줄 알고?"
'...'
또 싸울 기세인 둘을 황제가 말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니사가 말했다.
"언니가 늘 잘났다고 생각하지 마. 폐하께서 말씀해주셨거든. 나한테도 나만의 장점이 있다고!"
"그러셔! 그 장점 한 번 들어 볼까? 응?"
"언니보단 내가 일을 더 잘하잖아. 언니는 맨날 실수만 하고, 지적은 안 했지만 사실 민폐 수준이거든!"
니사의 폭언에 리사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미안한 마음은 사라지고 분노란 감정이 리사를 지배했다.
"뭐, 뭐? 그, 그건... 그러는 너야말로 사람 만나는 일을 못해서 매번 내가 하잖아! 그거 얼마나 귀찮은 줄 알아?"
점점 서로 누가 못했네. 누가 잘났네로 싸우는 둘을 보면서 황제는 더욱 이 자리가 불편해졌다.
그냥 도망칠까?
황제가 그런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니사가 황제의 팔을 꽉 껴안으면서 말했다.
"폐하께선 나랑 자는 걸 더 좋아할걸?"
"흥! 그 서툰 솜씨로 폐하를 만족하게 해줄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는 언니는 뭐 엄청 뛰어난 줄 알아?"
'잠깐... 이 흐름은...'
갑자기 대화의 내용이 이상해지자 황제는 불길함을 느꼈다.
이 흐름은 위험했다.
"그럼 승부해! 누가 폐하를 만족시키는 지로 승부하는 거야!"
"하라면 못할 줄 알아? 정했어. 언니가 지면 오늘 말 심하게 한 거 사과해!"
"좋아! 대신 내가 이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하고 돌아와."
리사의 말에 니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황제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짐의 의사는."
""얼른 옷 벗으세요!""
"...그래."
황제는 그제야 자기 운명은 정해졌다는 걸 깨닫고는 체념한 얼굴로 옷을 벗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자매 싸움에... 그야말로 황제의 등이 터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