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말이지. 이거 봐봐."
스윽!
그녀가 공간을 열고 지도를 꺼냈다.
공간 마법인가? 아니면 마도구인가? 진위가 그런 생각하고 있을 때 그런 생각을 읽고 있다는 듯이 그녀가 대답했다.
"공간 마법이야. 필요할 거 같아서 배워뒀거든."
그녀의 대답에 진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가 꺼낸 지도를 보았다.
한눈에 봐도 보기 좋고 깔끔한 것이 잘 만든 지도로 보였다.
"호오, 잘 그렸구나."
선도 깔끔하고, 측량도 문제가 없다.
기호도 알맞게 쓰인 것이 훌륭한 관도의 지도였다.
"내가 도망다니면서 측량하고, 작도한 물건이야. 어차피 오늘은 어디 나가지도 못 해서 이걸 하고 있었거든."
"그대의 꿈은 전국 지도라고 했던가?"
진위가 지도를 살펴 보면서 묻자 키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정확히는 제국 전도긴 한데... 사실 제국 전도가 전국 지도나 다름없긴 하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손을 저 하늘로 뻗었다.
"내 꿈은 이 두 다리로 전국을 돌아보고 이 손으로 지도를 만드는 거야."
이 두 다리로 자유롭게 제국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지도를 그리는 것.
그것이 자유로워지고 싶던 그녀의 꿈이었으니까.
"좋은 꿈이구나."
"어?"
진위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처음이었다.
자신을 꿈을 비웃지 않은 사람은.
뭔 뱃사람이 전국 지도냐면서 비웃던 사람들과 달리... 이 비밀이 많은 친구는 자기 꿈을 긍정해주었다.
그게 그녀는 기뻐서...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하하, 그게 그러니까 좀 부끄럽네... 그런 말은 처음 들어서."
[넌 뱃사람이다. 땅을 걸을 일이 얼마나 있겠냐! 그런 헛소리를 할 시간에 조타 실력이나 기르거라.]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하던 사람이 바로 황제에게 자신을 팔아넘기려고 했던 게 떠올라서 더욱 씁쓸했다.
"사실 난 뱃사람 취급도 못 받았지만."
그럴 때만 뱃사람이다 뭐다 하지 정작 그녀는 가문에서 딱히 뱃사람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여자가 배를 타면 불길하다고 여기는 것 때문인가?"
진위는 그 말에 뭔가 짐작되는 게 있는지 덤덤하게 물었다.
스키족의 선원들이 가진 대표적인 미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여자가 배를 타면 재수가 없다고, 스키족에서 배를 타는 여인은 그래서 남장을 해야 했다.
당연히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배에 탈 때마다 그녀는 불편한 남자 옷을 입고, 가슴을 천으로 강하게 압박해서 굴곡을 없애야 했다.
"남장 그거 진짜 불편하다? 이 큰 걸 천으로 압박하는데 솔직히 고역이라고. 여기 땀도 차고."
그렇기에 그녀가 봉긋하게 솟은 자기 가슴을 가리키면서 투덜거리자 진위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아니, 남장이라고 하니까 그대에겐 은근 어울리는 듯 하여서 말이다."
진위는 키야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크긴 했지만, 그래도 어깨도 넓었고, 얼굴선도 굵직한 편이라서 남장이 썩 잘 어울릴 거 같았다.
"그러는 너는 여장이 어울리겠는데?"
그 말을 들은 키야가 웃는 얼굴로 놀리듯 말했으나 진위는 덤덤했다.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놀리는 맛이 없네. 그보다 아 진짜 어떻게 하지?"
그녀는 막상 합궁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진짜... 내가 이대로 도망치면 멸족인가?"
그녀가 민족에게 딱히 소속감이나 책임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 하나 때문에 모두가 죽는다는 건 그 무게가 달랐다.
그녀는 그 무게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황제가 그리 말했으면 그리 될 확률이 높지."
"아... 진짜. 얼굴 한 번 보고 싶네."
진위의 느긋한 말에 키야는 술을 마시고는 주먹을 굳게 쥐었다.
정말이지... 한 번 그 못난 얼굴을 보고 싶을 정도였다.
"봐서 무엇을 하려고?"
진위가 술을 더 마실 생각이 없는지 잔을 뒤집어두며 묻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냥 주먹 한 대 박아버리게! 그런데 소문에 따르면 엄청 강하다면서? 내가 싸우면 질까?"
벌컥 화를 내던 키야가 소문의 황제를 생각하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소문으로 들은 황제는 그야말로 무의 화신으로 혼자서 능히 10만 대군을 감당하는 괴물이라고 들었다.
"지겠지."
진위는 덤덤하게 말하면서 달을 구경했고, 키야는 그 말에 '황제 자식 쓸데없이 강해가지고는...' 하고 투덜거리고는 그런 진위를 구경했다.
'봐도 봐도 질리진 않네.'
키야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면서 솔직하게 감탄했다.
근데 정말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겼다.
봐도 봐도 새로울 정도라니...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얼굴을 구경하고 있을 때 진위가 입을 열었다.
"달이 보기 좋구나. 그렇지 않느냐?"
"어? 그, 그러네. 그보다 술은 더 안 마셔?"
한참 얼굴을 구경하고 있다가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당황한 그녀는 곧 이 귀한 술을 조금 마시고는 입도 대지 않는 진위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무리 술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런 귀한 술을 조금 마시고 그만두는 것이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승님이 그러셨거든. 주색잡기를 멀리하라고."
그러나 진위는 사실 술을 별로 즐기지 않았다. 여인을 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진위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 멀리하라고 당부했던 것들이었고, 애초에 그의 천성이 그런 것들을 즐기지 않았으니까.
"좋은 스승이네. 황제도 좀 그런 걸 본받았으면 좋겠어."
"그러게 말이다."
바로 황제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는 그녀를 보며 진위는 웃는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웃음을 본 키야는 순간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감상했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아니야... 이건..."
"?"
그녀의 이상 행동에 진위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키야는 속으로 계속해서 부정했다.
'어, 얼굴이 취향이라서 조금 흔들린 거뿐이야.'
아직 잘 모르는 사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저 얼굴에 홀려서 조금 두근거린 거지 결코 이 녀석을 좋아하게 된 건 아니다.
자신을 그렇게 설득하면서 키야는 진위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눈앞에 있는 이 비밀이 많은 친구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이 그녀를 마주 싱긋 웃어주었다.
그 미소가... 키야는 참으로 해롭다고 생각했다.
"여자한테 그렇게 함부로 웃지 마. 오해하니까."
그렇기에 키야가 그에게 진심으로 충고해주자 진위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무엇을?"
"그러니까... 아니다."
뭐라 따지려던 그녀는 체념했다.
저게 만약 의도하고 하는 거라면 무서운 사람이다.
그녀는 그런 생각하면서 술을 들이켰다.
"그보다 직업이 뭐야?"
"황실에서 일하지."
"높은 사람이야?"
황실에서 일한다는 건 역시 높은 사람이라는 걸까?
하긴 이런 귀한 술을 아무렇지 않게 가져올 정도면 최소 장관급의 인물은 분명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도 진위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으면서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 두마."
"뭐야... 비밀이 많아도 너무 많은 친구네. 정말."
그 대답이 불만스러운지 그녀가 투덜거리자 진위는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 내일도 좋은 술을 가져오도록 하마."
"내일도 오는 거야?"
묘한 기대가 담긴 그녀의 눈을 보면서 진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우스운 관계가 얼마나 유지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키야도, 진위도... 지금은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게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
"꽤 즐거워 보인다. 너?"
다음 날 아침.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황제의 얼굴을 쿡쿡 찌르면서 모처럼 집무실을 찾아온 오르테가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묻자 황제는 그 손가락을 살짝 깨물고는 말했다.
"그래 보이냐?"
"응. 여자라도 생겼어?"
살짝 잇자국이 난 자신의 손가락을 노려보며 오르테가가 질문하자 황제는 고민했다.
여자라...
"일단 생물학적으로는 그렇지."
"뭐야, 그 대답은. 아무튼 별일은 아니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는 오르테가를 보면서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은 아니야. 단지 친구를 만나러 갈 뿐이니까."
"남녀 사이에 정말 친구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
"...?"
오르테가의 진지한 질문에 황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왜 이 녀석이 말하는 거지?
"당장 나랑 그대가..."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그 말을 자르면서, 오르테가는 가까이 다가와서는 조금은 무섭게 웃었다.
"우리 사이가 이젠 단순한 친구 사이가 아닌데?"
꾸욱.
오르테가는 황제의 무릎에 앉아서 꼬옥 껴안으며 물었고 황제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도 황제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압박감에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음... 부부지?"
"그래, 이젠 친구가 아니야. 친구 같은 '부부'지. 맞지?"
아니라고 하기만 해 봐.
황제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기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렇지."
"남녀 사이에 단순한 친구 사이는 있을 수 없어! 분명 어느 한쪽에서 이성으로 보고 있어서 성립되는 거라고!"
"흠..."
그녀의 단호한 말에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요즘 들어서 딱히 황제는 남의 기운을 세심하게 보지 않았다.
마치 남의 마음을 읽는 듯 하여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딱히 사람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살펴보면 그녀도 오르테가의 말대로 그럴 수 있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황제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다른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둘이 친구였던 것도 네가 날 이성으로 보고 있어서였나?"
진짜 이 녀석은 그럼 그때부터 자신을 이성으로 보고 있었던 건가?
황제는 그 부분이 더 신경 쓰였으니까.
"그, 그렇다면 어쩔 건데?"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대답하는 그녀를 보면서 황제는 피식 웃었다.
이 녀석은 딱히 기운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아도 감정이 훤히 보였으니까.
설마 이 녀석이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가 그런 거였다니 의외긴 했다만... 딱히 실망스럽진 않았다.
황제는 그렇기에 그녀의 쓸 데 없는 걱정을 덜어주었다.
"짐을 이성으로 봐도 상관없는 친구와 만나고 있으니 걱정하진 말 거라."
"...그 이야기는. 비 후보구나. 맞지? 비 후보지?"
오르테가가 그 말에 바로 황제가 만나러 가는 여인의 정체를 파악하자 황제는 조금 놀랐다.
"너한테 그런 눈치가 있었다니..."
이 바보가 그 정도는 알아차릴 눈치가 있었다니. 충격이었으니까.
그러나 오르테가는 그 반응이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놀라는 건데! 상식적으로 당연한 거잖아! 뭐... 그런 거면 딱히 내가 말릴 수는 없겠지만..."
비 후보를 만나는데 말릴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너무 오래 끌진 마. 무슨 말인지 이해했지?"
"...그래."
황제는 그녀의 말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 모호하고 비밀이 많은 관계를 오래 유지하진 마라.
그것이 서로에게 오히려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
오르테가는 분명 그걸 말하고 싶은 걸 테니까.
그 부분은 황제도 공감했기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끌진 않을 거다."
오늘이 마지막일 거니까.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오르테가에게 대답해주었다.
알려진 게 적은 비밀스러운 친구 관계도... 오늘로 마지막.
황제는... 오늘 그녀에게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
--
"정체가... 뭘까."
한참 방 안에서 작도를 하던 그녀는 진위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계속 외면해 오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그의 정체를 외면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높은 사람인 건 확실한데...'
황제는 아닐 거다.
그 녀석이 황제라면 자신이 했던 무례한 말들을 그저 듣고만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황제에게 불만을 품은 대관 중 한 명일까?
그러면 보기보단 나이가 많을지도 몰랐다.
'어럽네... 아니 근데 왜 난 이런걸로 고민하는거야!'
그 친구가 정체가 뭐든 자신한테 무슨 상관이라고... 어차피 자기 꿈을 위해선 떠나야할 거고, 그렇다면 그 친구와도 이별이었다.
'꿈이냐... 사람들의 목숨이냐...'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남들을 위해서 희생하겠다 할 만큼 이타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서 민족 전체가 죽어달라고 할 정도로 이기적이지도 못했다.
그래서 수도 없이 갈등했고, 고민했으나...
결국 결론이 나와버렸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새장 속의 새가 되고 싶진 않았다.
자유롭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목숨을 대가로 자유로워지고 싶진 않았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러니까 그 녀석과 만나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물어보자.
정체가 뭐냐고.
그녀는 그렇게 각오하면서 컴퍼스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왠지... 작도하고 싶은 날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