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란 그런 것이었다.
아무하고도 쉽게 친해질 수 없었고, 그 누구라도 의심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런 자신이 어느샌가 사람을 굳이 경계하지 않게 된 것은 어째서일까?
사실 그 대답은 이미 황제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느슨해진 것이겠지.'
어느새 평화에, 그리고 사람에... 익숙해져 느슨해진 것이다.
그것이 황제는 싫지 않으면서도 의문이 들고는 했다.
이 변화가... 과연 옳은 것일까?
자신은 정당한 길을 가고 있는 걸까?
정답은 없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고민하는 걸 테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해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기에 황제는 그야말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해야 했다.
'술은 이거면 되겠지.'
잠시 상념을 끝낸 황제가 대충 술을 챙기고 걸음을 옮기면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변화란 어렵다.
황제는 그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빠르게 변화해야 하는 게 황제라면 자신은 황제 실격이었다.
황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 했다.
제국을 위해서라도 황제가 스스로의 변화에 흔들려선 안될 일이었으니까.
'다 왔군.'
어느새 도착한 모용가의 저택을 보며 황제는 잠시 눈을 감고는 고민했다.
그녀는 과연 자신의 정체를 듣고는 어떤 반응을 보여 줄까?
황제는 그런 생각하면서 문을 열었다.
그 해답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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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이 아름다운 광경조차 찰나에 불과하니. 참으로 덧없는 아름다움이로구나."
뜨거운 욕탕에 몸을 담근 채, 흩날리는 눈을 구경하고 있던 설육은 흥에 돋아서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오면서, 한참 그렇게 풍류를 즐기던 설육이 노래는 멈추고는 말했다.
"제국 또한 그리할 거로 생각했단다. 영원한 것은 없기에... 제국 역시 그리하리라 여겼고, 이는 지금이라 생각했지."
설육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제국에 놀라움을 느꼈다.
그 어떤 나라도 백 년을 유지하기조차 힘든 시대에 태어났던 그에게 이 제국이 아직 제국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신기함으로 남았다.
특히 설육이 보았을 때 몇 년전까지만 해도 제국은 그 수명이 이미 끝나보였기에 더욱 놀라움이 컸다.
"영웅이 제국을 유지시켰지. 그 옛날 진비와 환운이 그러했듯. 쇠퇴하던 제국을 진위가 살렸으니."
강상은 느긋하게 벽에 몸을 기댄 채 그 의문에 대답했다.
제국이 망할 시기가 도래할 때마다... 늘 불세출의 영웅이 나타나 갈라졌던 제국을 합치고, 흔들리던 제국을 다시 세웠다.
진비와 환운은 갈라졌던 제국을 다시 이어붙였고, 진위와 모용진은 무너지던 제국을 다시 세워 쉽게 흔들리지 않을 강대한 제국을 만들었다.
이것이 과연 하늘의 뜻인지, 아니면 천신의 의지인지...
강상은 아직 알지 못했지만...
"그리고 그 영웅이 내 제자고."
그래도 자랑할 거리는 있었다.
그 무너져야 할 제국을 유지하고 오히려 더욱 부강하게 만든 것이 바로 자기 자랑스러운 제자였으니까.
"강가야. 그건 네놈의 제자가 잘난 것이지 네놈이 잘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설육이 혀를 차며 말했으나 강상은 적어도 그에게는 할 말이 있었다.
"제자가 잘난 것은 그 제자를 훌륭하게 키운 스승의 덕이고, 제자가 못난 것은 그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한 제자가 못난 탓이라고 가르쳐 준 사람이 누구였더라."
"크흠! 그런 못난 말을 한 놈이 있었느냐? 크흠!"
설육이 헛기침하면서 시치미를 떼자 강상은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흐음. 도선이라는 자가."
추하게 했던 말을 없던 것으로 한다고? 강상의 눈은 그리 말하고 있었고, 그 시선이 설육을 굴복시켰다.
"그래, 그래, 강가야. 네가 아주 큰일을 했구나. 이 상놈아."
결국 설육이 두 손을 들며 말하자 강상은 웃었다.
"그래야지. 아무튼 내일 만나러 가자고."
이 정도면 놀만큼 놀았다.
강상은 그리 생각하면서 탕에서 나왔다.
벌써 그는... 내일이 기대가 되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오늘은 일찍 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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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구나."
키야는 여유로운 걸음을 다가오는 진위를 보면서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이번엔 무슨 술이야?"
"모른다. 그냥 적당히 들고 왔으니 알아서 확인하거라."
진위가 덤덤하게 대답하면서 들고 있던 술병을 건네주자 키야는 바로 술을 확인했다.
"산삼주네. 몸이 호강하겠는 걸?"
술을 확인한 키야가 신난 얼굴로 바로 술병을 따서는 잔에 따랐다.
그리고는 진위에게 물었다.
"너도 마셔?"
"오늘은 사양하마."
그 말에 키야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진위는 그저 덤덤하게 그녀가 술을 마시는 걸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맛이 참 좋다... 그런데 말이야. 진위는 그 하고 싶은 일이라던가 있었어?"
정체를 물어보기 전에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벌겸 키야는 아무거나 대충 질문했다.
"있었지."
순순히 대답하는 진위를 보면서 키야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뭔데?"
"장군이 되고 싶었지. 최전방에서 병사들을 이끄는 장군 말이야."
진위는 그렇게 말하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되고 싶었다는 건..."
키야는 그 말에 뭔가 깨달은 얼굴로 중얼거렸고 진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될 수 없었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해야 하는 일이 있었거든."
"...나랑 같네."
그 대답에 키야는 동질감을 느꼈다.
자신과 같았다.
그는 자신이 결심한 것처럼... 꿈을 이미 포기한 사람.
즉 자신의 미래였다.
그렇기에 키야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어땠어? 그런 삶을 살아온 것은? 괴롭진 않았어?"
궁금했다.
어쩌면 미래의 자신인 그가... 꿈을 포기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은 괜찮은지.
들어 보고 싶었다.
"괴로웠지. 그렇기에 미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어."
진위는 그 괴로움을 부정하지 않았다.
전장에서 자유롭고 싶었던 자신은 제국이라는 새장에 갇히는 것을 선택했다.
후회가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
아직도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 역시 거짓말이겠지.
그렇지만... 적어도 진위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 선택으로 인해... 지키고 싶었던 것을 지켰으니."
그 선택이 무너지던 제국을 지켰다.
그것만으로도 진위는 만족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구나."
그러면...
자신도 그렇게 되는 걸까?
키야는 그런 생각하면서 술을 털어 마셨다.
솔직히 그 말을 들으니까 확실하게 마음이 정리가 되었다.
"나... 합궁을 하려고."
그녀가 그 정리된 마음으로 내린 결정을 이야기했다.
어쩔 수 없었다.
도망치려고 해도,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버릴 만큼 모질어지진 못했다.
"나 때문에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 죽는 건 싫거든."
"..."
진위는 그 말에 침묵했다.
그저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금방 괜찮아지겠지 뭐. 하하,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수도 있어. 비가 되는 거잖아. 권력도 생기고 나쁘지 않을지도?"
스스로가 말하고도 전혀 설득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그런 생각하면서도 애써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위가 덤덤하게 말했다.
"꼭 그럴 필요가 있느냐."
"응, 있어. 내가 나한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있는데... 남한테 희생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녀의 대답에 진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말에 뼈저리게 공감한다.
자신이 제국을 버리고 백성들에게 고통을 강요할 수는 없었듯이, 그녀 역시 민족을 버리고 민족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던 거다.
그 누구도 남에게 희생을 강요할 권리를 주진 않았을 테니까.
"아! 정말. 차라리 네가 황제였으면 좋았을 텐데."
키야는 그런 진위를 보면서 웃었다.
"얼굴조차 모르는 황제는 몰라도, 넌 마음에 들었거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키야는 그 짧은 순간에 이 비밀 친구가 아주 마음에 들어 버린 거다.
"...과분한 말이군."
그런 그녀의 사실상 고백이나 다름 없는 말에 진위는 덤덤하게 대답하고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 시선을 전혀 피하지 않았다.
"자유롭고 싶다면 자유로워도 돼."
진위는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과 같을 이유가 없다.
그녀의 말이 맞다.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그러니... 진위는 그녀에게 희생을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난..."
진위의 말에 키야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말은 고맙지만 자신은...
"내가. 아니..."
진위, 아니 황제는 그런 그녀를 향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슬슬 자신의 정체를 밝힐 때였으니까.
"짐이 그것을 허락하마."
높이 날고자 하는 새를 새장에 가두고 싶지 않았다.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새의 날개를 꺾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까... 황제는 그녀가 자유로워져도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달리 자유롭게 대륙을 돌아다녀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너."
그 말에 키야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은...
"황제... 였던 거야?"
그녀의 경악한 시선을 받으면서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숨기진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하하... 나 목 무사하지?"
자신이 해왔던 황제에 대한 실언을 떠올리며 그녀가 목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목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의 폭언이었으니까.
그보다...
'저렇게 생겼다고는 못 들었는데!'
그 황제가 이런 미남이라는 말은 적어도 그녀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흉한 얼굴을 왜 그리 구경했느냐."
"아, 아니! 그건 그냥 소문이..."
황제가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듯이 장난스럽게 묻자 키야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실제로 본 황제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못 생기지도 않았고, 신경질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진짜... 자유로워도 된다고?"
자신의 꿈을 긍정해주었다.
자신에게... 자유로워져도 된다고 해줬다.
그것이... 그녀의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들었다.
"그래, 합궁하지 않아도 괜찮아. 했다고 하면 우리 둘만의 비밀이 될 수 있다."
"..."
그 말에 키야는 침묵했다.
확실히 끌렸다.
그 제안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 그게 그런데 딱히 싫진 않거든?"
솔직히 합궁 자체는 그리 싫지 않았다.
"?"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싫지 않다니... 무엇이?
"그, 그게... 너랑 합궁하는 거 자체는 그리 싫진 않아."
처음엔 합궁 자체에 반감이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황제와 자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그러니까..."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이라면 싫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처음부터 이 녀석이라면 괜찮을 거 같단 생각을 했으니까.
오죽하면 그가 황제라는 게 밝혀졌을 때 배신감보다는... 안도감이 더 먼저 들 정도였다.
"...큭!"
그 순간 황제가 웃었다.
모처럼 그녀의 기운을 살펴보았더니... 왜 오르테가가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확실히 친구 사이는 이걸로 끝이겠구나.'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원한다면... 그래, 응해야 하는 게 옳겠지."
그렇게 말한 황제는 그녀를 보았다.
취기로 붉게 상기된 얼굴.
흐트러진 옷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살짝 탄 피부가 눈에 띈다.
아름다운 군청색 눈동자는 묘한 기대를 담아서 반짝이고 있었고, 그녀의 갈라진 군청색 머리카락은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각오는 되었느냐?"
그런 그녀의 턱을 잡고 자기 앞으로 끌어오며 황제가 묻자 키야는 대답 대신 그대로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입을 맞췄다.
쪽!
비밀스러운 친구 관계도 오늘로 끝이었다.
그 끝을 알리는 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