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려족이구나."
황제는 보고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구려족은 제국에서도 관동 지방에 자리를 잡은 민족으로 귀신 같은 사격 솜씨로 이름을 날린 민족이었다.
활이든 석궁이든 화포든, 개의치 않고 일단 맞추는 것 하난 귀신 같은 이들이라 아직 천제국이 제국이 되기 이전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자들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상대는?"
"귀가의 장녀인 귀려라고 하더군요. 들은 바로는 우수한 무당이라고 합니다."
"흐음..."
무당이란 천기를 읽어 운명을 내다보는 자들이던가?
"그렇구나."
합궁 상대로는 의문이긴 하다만... 그 귀가의 장녀라면 이해하지 못할 선택은 아니었다.
구려족에서 가장 유서 깊은 명문가였으니까.
특히 귀가는 그들의 신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알려진 신비한 가문이었다.
그 신이라는 존재의 힘을 탐낸 모용철이 귀가와 혼인을 추진한 적도 있지만 영 시원치 않았다고 하는데...
이번 합궁에서 선뜻 귀가의 혈족을 내어주는 선택을 했으니 황제는 그들의 선택에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그런 귀가의 혈족을 제국에 내놓겠다는 건 무슨 의미로 봐야 하는 걸까..."
황제가 미령이 사라지고 나서 작게 중얼거리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용진이 대답했다.
"지금은... 제국에 완전히 충성을 바치겠다는 우호적인 행동으로 보는 게 지금은 적합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한 모용진은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놀라운 일입니다. 귀가의 핏줄이 황가로 온 것은 그 금문제 이후 처음이니까요."
그렇지.
황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황실에서 상단을 운영하고, 무역까지 주도하여 황실의 재정을 탄탄하게 만들고 수많은 국가 사업으로 제국을 발전시킨 금문제 이후 귀가의 핏줄이 황가에 바쳐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독무제께서 귀가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민족이 멸할지언정 함부로 귀가의 피를 유출할 수 없다는 그들의 강한 뜻에 단념할 정도였으니까.
"문제는 없겠지."
그들이 어떤 의도인지는 직접 이 두 눈으로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니까.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큰 문제는 없다고 판단했다.
--
[들려온다. 들려온다.]
자꾸만 뒤에서 속삭이는 섬뜩한 목소리를 무시하며 면사로 얼굴을 가린 채, 형형색색의 무복을 입은 여인은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정녕 그러셨습니까?"
그런 여인 앞에 있던 새하얀 한복을 입은 고지식한 인상의 중년 남자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런 남자의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그의 태도는 나이도 어려 보이는 여인에게 하는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공손했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뒤에서 섬뜩한 인상의 흙색 피부를 가진 거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고, 그 소리는 이 자리에선 여인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지신께서 말씀하셨으니. 이 모든 것이 지신의 뜻이니라."
"그렇습니까. 그게 지신의 뜻이라면 그리하는 것이 옳겠군요."
남자는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니 이번 결정엔 이의를 받지 않겠다 하시는구나."
오히려 그녀가 자연스럽게 남자를 하대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남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네, 지신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귀가는 이를 따를 뿐입니다."
귀가의 대외적인 수장이자, 가주인 남자는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그리 대답했다.
눈앞에 여인이 그의 딸인 것을 감안 하면 쉬이 이해할 수 없는 둘의 행동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 둘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거라."
"네, 편히 쉬시길."
꾸벅.
여전히 극진하게 그녀에게 인사하고 남자가 사라지자 그녀는 면사를 벗어 던졌다.
면사를 벗자 드러난 얼굴은 그녀가 조금 전 보여 준 위엄 넘치는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청순한 얼굴에는 위엄따윈 전혀 없어 보였고, 기다란 검은 머리는 윤기가 넘쳤고, 부드러워 보이는 살구색 피부는 조금 창백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병약해 보이진 않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노란색 동공 안에 자리하는 별이었다.
그녀의 동공 안엔 신기하게도 별이 담겨 있었으니까.
그 눈동자가 그녀에게 신비함을 더 해주고 있었다.
"하, 뭔 저런 격식을... 귀찮아."
순식간에 늘어진 그녀는 투덜거렸다.
그 순간... 그녀에게서 감돌던 신비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깨져 버렸다.
[그게 격식이란...]
그 모습에 식은 땀을 흘리던 거구의 존재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에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야! 누가 그걸 몰라? 그래서 이 거지 같은 연극에 어울려 주는 거잖아. 이 지렁이 새끼야."
움찔.
그야말로 저 청순한 얼굴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독설이었다.
거구의 존재는 그녀의 외침에 움찔하면서도 얌전히 서 있었다.
"뭔 합궁이야. 피곤하게. 그거 꼭 해야 하나? 했다치고 끝내는 거 안 돼?"
[...재미없는 농담이구나.]
거구의 말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다.
아무리 자신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지신이라도 일단은 신.
고집을 쉬이 꺾진 않을 것이다.
[천신이 느껴지는 황제다. 반드시 그 피를 얻어서 확인해 보고 싶구나.]
지신의 말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요컨대... 이 신이라는 새끼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바치라는 이야기였으니까.
"얼굴도 그지 같이 생겨선 신성도 글러 먹은 새끼. 그러니까 갑자기 나타난 천신한테 밀렸지."
[....]
투덜거리는 그녀의 말에 지신은 침묵했다.
그런 그의 얼굴엔 작게 이슬이 맺혔다.
"야, 우냐? 울어? 뭘 잘했다고 울어. 해준다고 했잖아. 거 신이라는 새끼가 속도 더럽게 좁네."
그걸 본 그녀가 투덜거리면서도 손으로는 그런 그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해주었다.
"울진 말고. 신이란 녀석이... 뭐, 황제가 상대면 앞으로 먹고 사는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그녀의 말에 지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에 눈물을 닦으면서 대답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미 귀가의 장녀인 그녀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을 텐데?
그 말을 들은 그녀가 질렸다는 듯이 혀를 찼다.
"쯧. 애써 좋은 점을 찾아주려고 해도 이렇게 산통을 깨네. 에휴."
[산통을 깨는 건 신의 처지에선 그 나름대로 뜻을 전....]
"닥쳐봐. 너 때문에 더 머리가 아파지려고 하니까."
[...]
지신은 그 말에 입을 꾹 다물었고, 그녀는 그대로 의자에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황제라...'
어떤 녀석이길래 지신 녀석이 호들갑을 떠는 걸까?
그녀는 귀찮긴 하지만... 지신의 호들갑 때문에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들기 시작했다.
--
"주인. 주인. 고구마를 구웠다냐."
모처럼 묘인의 모습을 하는 케르가 손에 고구마를 든 채 자랑하듯 말하자 황제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냐..."
기분이 좋은지 귀를 쫑긋 거리면서 그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던 케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말했다.
"주인도 하나 먹을 거냐?"
"그래, 하나 주거라."
그녀에게 따끈한 고구마를 받아 든 황제는 가볍게 고구마를 기로 날을 만들어 먹기 좋게 썰어서는 가볍게 먹었다.
고구마를 다 먹은 황제는 집무실에 놓여 있는 침대에 어느새 누워서 잠든 케르를 보며 웃고는 다른 쪽에 시선을 주었다.
"어머, 어머."
구석에 앉아 있던 설화는 연애 소설로 보이는 책을 읽으면서 얼굴을 잔뜩 붉혔다.
그녀가 흥분한 걸 본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무얼 읽고 있기에 그런 반응이더냐?"
"아, 그, 그게요..."
설화는 어느새 자신에게 다가온 황제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더니 곧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
"연애 소설인데요..."
황제는 그 말에 책의 제목을 확인했다.
천의 여인이라... 최근에 대관들이 몰래 읽고 있는 걸 본 기억이 있었다.
회의 중에서도 소근소근 저 소설 이야기로 담소를 나누는 게 기억에 남았으니까.
"무슨 내용인지 들을 수 있겠느냐?"
그렇기에 황제가 흥미를 가지고 물어보자 설화가 놀란 듯이 눈을 떴다.
"네? 그, 그게..."
화아악.
완전히 얼굴이 홍당무가 된 설화가 우물쭈물하면서 대답하지 못하자 조용히 보약을 마시고 있던 나르타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어머, 폐하께서는 모르시나요? 최근 이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인데요."
"짐은 *남행기, *환운전 정도는 읽었으나 이 책에 대해선 들어 본 적이 없구나."
"...폐하께선 꽤 고전적이시네요."
황제가 말한 소설들은 전부 최소 100년 전의 고전 소설이었기에 나르타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긴 폐하께서 이런 가벼운 최근 소설을 읽을 거 같은 인상은 아니긴 했다.
"원래는 아녀자들이 읽던 책입니다만... 최근에는 젊은 도령들이나 관리들도 읽을 정도로 유명한 책이랍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무엇이길래 그리 다들 읽는 게냐?"
황제가 이번엔 나르타에게 질문하자 나르타는 대충 그 책의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그 내용이... 황제는 뭔가 익숙했다.
대충 황제가 파악한 천의 여인은 이러한 내용이었다.
어느 한 제국에 폭군이라 불리는 흉포한 황제가 있었다.
주변에 있는 이는 모두 죽이고, 죽여서 모두가 두려워하는 폭군에겐 그야말로 수많은 여인이 있었으나 그 어떤 여인도 그런 폭군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그때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천화양이었다.
그녀는 동아족 출신의 미천한 신분을 지닌 여인으로 관도에서 창부로 일하고 있었다.
폭군은 우연히 거리를 걷다가 그런 그녀를 마주치게 되었고, 하룻밤을 보낸 뒤 그녀를 사들였다.
그렇게 황제의 빈이 된 그녀가 황제와 사랑에 빠지는... 솔직히 진부한 사랑 이야기였다.
"이런 게 왜 인기가 있는지 짐은 도저히 모르겠구나."
폭군이라니...
황제는 대충 그녀가 건네준 책을 읽으면서 투덜거렸다.
혈족은 닥치는 대로 죽이고, 반발하는 신하들도 목을 매달고, 이런 끔찍한 폭군이 있다는 것도 문제이거늘.
이 폭군은 그런 짓을 태연하게 벌이고도 죄책감 따윈 전혀 없었다.
"짐이었으면 다 죽여서 화근을 지웠을 것을... 뭐,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구나."
뭐, 그래도 읽다보면 이해되는 부분도 있고, 그럭저럭 몰입할 요소도 분명 있었다.
황제는 어느새 제법 집중해서는 글을 읽기 시작했다.
"이 여자 주인공은 인기가 많으냐?"
황제의 질문에 설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흐음..."
왜 인기가 많은 거지?
황제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입이 참 거친 것이 그리 듣기 좋진 않을 듯한데."
이 소설의 여자 주인공은 아무래도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입이 꽤 거칠었고, 황제 앞에서도 당당하게 욕설을 뱉을 정도로 무례했다.
"법도에 따르면 혀를..."
"그건 넘어가고요!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게 멋지지 않나요? 입이 거친 건 그녀의 성장 배경을 보면 이해할 수 있고요."
설화의 설명에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소설의 여자 주인공의 삶은 기구했다.
어릴 때부터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라왔고, 열심히 일한 곳에선 사기를 당해서 전 재산을 잃었으며, 그대로 창부로 팔려서 관도로 왔다.
그런 상황에서 만난 것이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폭군이었다.
"폭군인데 잘생겨서 용서가 된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잘생긴다고 용서가 되나? 황제는 글을 읽던 중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거울을 보시면 이해가 될 텐데."
"?"
황제는 설화가 작게 중얼거리자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으나 설화는 대답 대신 그런 황제의 시선을 피했다.
"뭐... 그래도 무난히 읽기에는 나쁘지 않은 글이구나."
황제는 책을 덮고는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문체도 깔끔하고, 묘사도 빼어나 읽기엔 무리가 없었다.
조금 선정적인 묘사도 과감하게 해냈으니 설화가 흥분한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말했다.
"이제 대관들하고도 어울리는 데 부담이 없겠구나."
황제는 나름 만족스러운 성과라고 여겼다.
이젠 조정에서 그들끼리 속닥이던 화제에 본인도 참여할 수 있을 듯했으니까.
'...그 대관들이랑 이런 이야기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나르타는 그 말에 속으로 생각했다.
상상만 해도 이상했으니까.
황제와 대관들이 조정에서 연애 소설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