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느니."
귀려는 다시 그 이상한 말투로 돌아와서는 이곳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처럼 편하게 말해도 되는데요."
"후후,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보다 여긴 어쩐 일이야? 진짜 그 대모 개 같은 년이 팔아넘기기라도 한 거야?"
그 말에 바로 말투를 바꾼 귀려가 독설을 내뱉자 앞에서 느긋하게 찻잔을 어루만지던 세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그랬지요?"
"원래는?"
그 말은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귀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후후, 지금은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있으니까요."
"흐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작게 상기된 걸 확인한 귀려는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얼굴이네."
그녀와 만난 것은 민족을 대표하는 무당으로 카미나리 가문의 신을 만나기 위해서 방문했을 때였다.
그 조그마하고 더러운 다락방에 죄인처럼 갇혀 있던 모습이 어찌나 기억에 남던지...
"황제한테 반하기라도 한거야?"
그런 그녀가 저런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얼굴을 하게 될 줄이야... 참으로 신기했기에 그녀는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했다.
"...폐하를 만난 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전 신을 만났답니다. 신을 사랑하는 건 무녀에겐 당연한 일이죠."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지신만 들을 수 있게 신통력으로 물은 귀려는 지신의 대답을 기다렸다.
[신이라...]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황궁에서 느껴지는 황제의 기운은 신의 기운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으니까.
"그 정도인가..."
지신이 딱히 부정하지 않자 귀려는 놀란 듯 중얼거렸다.
신이라고 불릴 정도의 기를 인간이 가지는 게 정말 가능한가? 하긴 지렁이도 가능한데 인간이 불가능할 거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 아직도 내 제안은 유효한데 생각은 있어?"
금세 상념을 끝낸 귀려가 웃는 얼굴로 제안했다.
그녀의 별 모양 눈동자가 반짝이는 걸 본 세이나가 고민했다.
"사실 많이 고민했어요. 별을 받는다면 분명히 이 빛을 잃은 두 눈동자도 빛을 되찾을 수 있으니까요."
지신을 믿는다면.
그래서 별을 받는다면...
태어날 때부터 빛을 잃었던 이 두 눈이 다시 빛을 찾고 볼 수 있게 된다는 제안은 세이나에게 있어서 정말이지 매력적이었으니까.
예전에 그녀는 카미나리 가문의 무녀였기에 거절했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꼭 보고 싶은 게 있긴 하지만 그래도 거절할게요. 죄송해요."
이제 세이나는 폐하를 섬기는 무녀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다른 신을 섬길 생각은 없었다.
"유감이네... 난 순수한 호의로 제안한 건데... 이게 다 지렁이가 덕이 부족한 탓이지 뭐."
"하하..."
세이나는 그 대답에 어색하게 웃었다.
지신을 지렁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역시 이 사람 뿐일 거다.
그건 그만큼 지신의 총애받는다는 증거.
신의 신부라고 불리는 무당인 그녀가 황제와 합궁 상대로 뽑혔다는 게... 오히려 세이나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보다 무당은..."
"아, 그거 개놈들이 헛소리하는 거잖아. 뭔 무당이 신의 신부여. 그럼 내가 이 지렁이 아내야?"
[끔찍한 소리군.]
지신도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본 귀려가 웃으면서 말했다.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개소리 때문에 거절한 거야?"
"...그런 것도."
없진 않다.
세이나가 부정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자 귀려는 그야말로 박장대소했다.
"크하하하! 너 까였다. 지렁아."
[...인간에게 까인다고 나한테 무슨 상관이냐. 애초에 난...]
"쉿! 지렁이의 생식 같은 건 관심이 없거든? 그래서 세이나. 어떻게 생각해. 그냥 힘을 받는다던가 그런 건 허울이고, 본질은 내가 네 두 눈을 고쳐주겠다는 거야."
귀려는 세이나의 턱을 잡고는 자신 쪽으로 끌고 오면서 말했다.
"그래도 무녀라 불리던 사람이니까 더욱 본질을 봐야지. 다시 한번 제안 할 게. 별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어?"
그녀의 진지한 제안에 세이나는 망설였다.
"저, 전..."
세이나는 눈을 감았다.
사실상 지신을 굳이 섬기지 않아도 눈을 고쳐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이다.
그럼에도 변화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
그 어떤 것이라도 그녀에게 변화는 두려웠다.
다락방에서 나오는 걸 두려워했던 것처럼, 쿠류로 돌아가서 대모와 직접 마주하는 걸 두려워했던 것처럼.
세이나는 언제나 변화가 두려웠으니까.
하지만...
"네. 그렇다면 바뀌고 싶어요."
용기를 내서 바뀌는 게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이젠 아니까.
그 사람이 가르쳐 주었으니까.
세이나는 눈을 고쳐보기로 각오했다.
"좋은 생각이야."
그 대답에 귀려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가볍게 세이나에게 자기 기운을 흘려 넣었다.
그러자 그녀의 빛을 잃고 공허하던 눈동자에 변화가 생겼다.
그 공허한 눈동자에... 황금색 별이 생겨났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어둡던 세이나의 세상이 빛을 되찾고 밝아졌다.
"어때? 심안이 아닌. 두 눈으로 본 세상은?"
"...처음이 폐하가 아닌 게 아쉽네요."
세이나가 그녀를 보며 아쉽다는 듯이 말하자 귀려는 투덜거렸다.
"그놈에 폐하. 폐하.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이젠 좀 많이 궁금하네."
그 세이나가 이렇게 황제란 사람한테 빠져 있을 줄은 몰랐기에 귀려는 불만스러우면서도 그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오래 볼 수 있는 건 아니야. 심안을 늘 유지하던 너한테는 그리 부담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고마워요. 귀려."
세이나는 처음으로 본 세상을 신기한 듯 둘러보다가 귀려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이지 엄청난 것을 자신에게 주었으니까.
그녀에겐 정말 감사한 마음 뿐이었다.
"고마우면 나중에 밥이라도 사던가. 그렇다고 진짜 네가 먹던 것처럼 밥만 사진 말고?"
"네! 그 저 일단 비로서 받는 품위유지비 같은 게 있거든요. 얼마든지 사드릴게요."
세이나가 자신있게 대답하자 귀려가 관심을 보였다.
"품위유지비? 그거 얼마 정도... 아니다. 곧 확인하면 되겠지."
어차피 자신도 그렇게 될 테니까.
돈 이야기에 잠시 눈이 돌아갔던 귀려는 금방 이성을 되찾고는 어느새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궁녀들에게 다가갔다.
기껏 도망쳤는데 바로 들킨 걸 보니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그 치장인지 뭔지 할 거면 얼른 끝내줘."
꾸벅.
고개를 숙이는 궁녀를 보면서 그녀는 귀찮은 치장이라는 단계를 끝낼 각오를 굳혔다.
'생각보단 그래도 나쁘지 않을지도?'
설마 이곳에 세이나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친구가 있다는 게 참 위안이 되는 터라...
귀려는 점점 이곳에서 생활하는 미래가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
"신기하구나."
황제는 신난 얼굴로 자신을 찾아온 세이나를 보면서 감탄했다.
별 모양의 눈동자가 신기하긴 했지만...
"이제 정녕 보이느냐?"
그 멀었던 눈이 다시 보이게 되었다는 게 더욱 신기했으니까.
"네, 네..."
황제가 진짜로 그녀가 보이는지 확인하려고 가까이 다가가서는 두 눈을 살펴보자 세이나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그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 확실히 보이는 모양이구나. 신기하구나. 그녀에게 그런 능력도 있단 말인가."
과연 그런 능력을 쓸 수 있다면 귀가의 혈족을 유출하는 걸 꺼릴 만도 하지.
현자조차도 이미 빛을 잃은 눈을 다시 보게 할 수는 없었거늘...
황제는 어째서 그들이 그토록 귀가의 혈족을 외부에 유출하기를 꺼려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굉장하죠? 제 친구지만 정말 굉장한 거 같아요."
그렇게 말한 세이나는 실실 웃으면서 황제의 얼굴을 감상했다.
이상하게도 얼굴을 이렇게 실제로 보니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적잖이 기쁜 모양이구나."
그 모습을 보면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그녀가 한동안 그 기쁨을 누리길 기다려주었다.
'신기한 눈이군.'
별이 담긴 눈이라...
지신의 힘일까?
황제는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 지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말이다.
--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그녀의 말.
조금 커다란 지렁이였던 자신은 아마 태초부터 인간이었던, 그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 말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지신은 자신이 아마 천신보다도 평생 인간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천신이 사라진 세상에서도...'
지신은 그저 작은 민족에 국한된 신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 전체에서 추앙받던 천신과는 그 근본부터 달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남들보다 커다랗게 태어난 지렁이가, 그걸 본 한 주술사에 의해서 수호신으로 탈바꿈했다.
그 신앙이 점점 퍼져서 수호신에서 신이 된 존재.
그게 지신이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과연...'
지신은 조용히 집무실에 있는 황제를 살펴보았다.
보기만 해도 신성이 흔드리는 강렬함.
지신은 황제의 앞에 서자 자신이 신이 아닌 한낱 미물이 된 거 같은 착각이 들었다.
"뭘 그리 보고 있느냐."
[...내가 보이는 건가?]
지신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거는 황제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소수였으니까.
지신은 그 소수에 황제가 포함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놀라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흠, 이게 바로 귀가의 신인가. 신이란 존재가 실제로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구나."
황제는 그런 그를 차분하게 살펴보면서 '신보단 커다란 지렁이가 인간 행세를 하는 거 같구나.'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지렁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
그리고 지신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신이 되었다고 해서... 근본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천신이 자신의 근본인 인간을 끝내 부정하지 못하고 사라졌듯, 지신 역시 자신의 근본인 지렁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지신의 근본이 지렁이였을 줄은 몰랐구나."
[천신의 근본이 인간인 것만큼 충격적인 일이긴 하지.]
"..."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고, 지신은 그런 황제의 반응을 보고 이미 이 황제가 천신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놀라운 일이구나 이미 알고 있었나?]
"어떤 눈치 없는 선조 덕에 알게 되었거든. 그보다 짐을 찾은 이유가 무엇이지?"
그 말에 지신은 침묵했다.
왜 황제를 택했나?
금문제와 이 황제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 외모도 외모다만... 인간 같지 않은 신성이 느껴지는 점에서 둘은 확실히 닮아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
그렇기에 궁금해졌다.
금문제와 이자는 어떤 점에서 같기에... 천기도 없는데 신성이 느껴지는 것일까?
자신과 같은 지기(地氣)가 있는 것도 아니거늘...
신기한 일이었다.
지신은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그 이유와... 그것이 피를 통해서 유전이 되는지를 말이다.
"그렇군."
황제는 더 추궁하지 않았다.
신 같은 절대자들에겐 그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많은 시간을 지닐 수록.
그 호기심이라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큰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황제는 공감할 수 있었으니까.
"짐 역시 호기심이 생겼어. 그러니 확인해 보도록 하마. 그대의 대리자란 여인을."
[실망시키진 않을 거다.]
지신의 말에 황제는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시각은 밤이 되었다.
침소로 걸음을 옮기면서 황제는 자신을 뒤따르고 있는 지신에게 물었다.
"어떤 여인이지?"
[그대는 눈이 없는가?]
"...까칠하구나."
직접 확인하라는 건가? 황제는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소의 문을 열었다.
청순한 얼굴에 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황제를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앙증맞은 붉은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와씨! 깜짝 놀랐네. 황제고 나발이고 기척은 하고 열지?"
"..."
이건 뭐지?
황제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혼란에 빠졌다.
그만큼... 황제에게 이렇게 거칠게 말하는 여인은 처음 보았으니까.
--
"하... 더럽게도 번거롭네."
치장에만 3시간을 썼다.
귀려는 그야말로 녹초가 되어서는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새하얗지만 한눈에 봐도 엄청 귀한 비단을 쓴 게 느껴지는 한복을 입고, 그녀는 천장을 보고 있었다.
"황제의 침소라서 그런가 되게 좋네."
침대도 고급스럽고, 이불도 고급스럽고, 천장엔 멋들어진 그림까지 그려져 있다.
주변에 장식된 사치품들도 전부가 역사적인 명품들, 과연... 황제의 침소다웠다.
"아니 근데 그 황제란 놈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벌써 밤이 다 되어가거늘, 그녀는 그런 생각하면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옷이 마구 펄렁거렸다.
벌컥.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고, 귀려는 그쪽을 보고는 순간 깜짝 놀랐다.
'저게 뭐야?'
자신보다도 윤기가 넘치는 거 같은 검은 머리, 보는 순간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신비한 금안.
키도 제법 크고, 몸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얼굴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걸 본 귀려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를 향해 말했다.
"와씨! 깜짝 놀랐네. 황제고 나발이고 기척은 하고 열지?"
"..."
스스로가 말하고도 이게 황제에게 할 말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런데도 귀려는 여전히 자세를 굽히진 않았다.
죽이려면 죽이라지.
그런 생각하면서 황제를 보고 있자니 조금 당황한 표정이던 황제는 곧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확실히 실망을 시키진 않는구나."
"...?"
왜 웃지?
귀려는 전혀 예상 못 한 반응을 보여주는 황제를 보면서 그대로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황제가 왜 웃기 시작한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