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라오허는 의자에 앉은 채, 자신의 붉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천장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형님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위 형님과 비견되는 외모를 자랑하던 타마드 형님이야 죽었으니까 당연히 제외하고. 카무란은 솔직히 남자다움이 부족했다.
민이 자식은 경박함이 얼굴에서 뚝뚝 묻어나왔으니 라오허는 나름 그래도 살아남은 형제 중에선 형님을 제외하면 외모는 자신이 제일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무란마저 결혼을..."
그 진민이 자신을 포함한 셋 중에서 가장 먼저 결혼한 것도 충격이었긴 했다... 심지어 진민의 결혼식은 형님이 직접 주관하여 국혼으로 치러졌으니까.
물론 신랑의 상태가 말이 아니긴 했지만.
그때 진민은 처벌을 받은지 얼마 안 된 때여서 눈은 뽑혀 있었고, 혀도 잘려 있었다.
뭐, 거기까진 충격이긴 해도 이해는 했다.
민이 녀석은 사실상 철 좀 들라고 형님이 억지로 결혼 시킨 느낌도 없잖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카무란마저 가정을 꾸리니 라오허는 뭔가 패배한 기분이 들었다.
카무란은 순수하게 취미 생활을 하다가 같은 취미를 가진 처자를 만나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으니까.
'분재를 모으다가 결혼이라니...'
같은 취미를 가진 여성을 우연히 만나서 결혼해? 그게 말이 되나? 다른 것도 아니고 황족이?
그 모든 건 형님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생각해보면 형님은 자신들을 딱히 정략결혼 용도로 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뭐, 나야 자업자득이긴 하지.'
라오허는 생각해 보면 자신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딱히 노력한 적이 없었던 거 같았다.
여자가 궁하면 창기를 사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딱히 이성을 만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카무란이 결혼한다고 괜히 억울한 건 없다. 없는데...
그렇다고 패배한 느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형님은 전혀 도움이 안 될 테고."
라오허는 순간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형님한테 조언을 구해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 형님은 대부분이 정략결혼이라 별 도움은 안 될 거 같았다.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대충 명문가에서 처자 한 명을 구해 줄 거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이상하게 내키지 않았다.
고를 거면 자신이 직접... 남이 고른 여인이 아닌, 자신이 고른 여인과 하고 싶었다.
[라오허. 당신은 황제가 되어야 합니다.]
욱신.
그때 갑자기 어머니의 말이 떠올려 라오허는 심장이 욱신거렸다.
바보같이... 어머니는 이런 미련한 자신이 황제가 될 거라고 믿었다.
진륜족의 지지받아서 황제가 되길 빌었다.
결과는... 그녀는 라오허가 보는 앞에서 황제에게 살해당했다.
라오허는 기억하고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자기 아들만은 살려달라면서... 빌던 그녀의 모습이.
"...미안."
그래서 라오허는 늘 어머니에겐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정말 미안... 어머니."
그 어머니를 형님에게 팔아넘긴 사람이...
라오허 본인이었으니까.
--
"여전히 주술엔 영 성과가 없는 모양이군요."
라오허는 실망한 어머니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을 비녀로 정리하고, 그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한 사나운 인상의 미인이 그런 라오허를 엄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오허는 그런 시선을 받을 때마다 스스로가 작아진 것 같아서... 한 없이 비참하기만 했다.
"황후의 아들은 그리 잘났는데... 이래서야..."
"...죄송합니다. 어머니."
주술을 배우지 못했다.
공부는 그럭저럭 잘했지만, 무술에 재능이 있진 않았다.
악기는 누구보다 잘 다뤘지만 그게 황제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라오허를 그의 어머니는 늘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다.
황후의 아들이자 장남인 형님은 무술도 제일 뛰어났고, 공부는 형제 중에서 카무란 다음으로 잘했으며, 주술에도 재능이 있으나 자신과 달리 그쪽에서 관심이 없다고 포기한 경우였다.
서예도 뛰어났고, 그림도 잘 그렸으며, 악기를 다루는 것에도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능했다.
그야말로 모든 걸 다 가진 완벽한 형님.
그 정도면 가무에도 뛰어나겠지.
모든 걸 비교해봐도 라오허는 형님을 이길 방도가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아무리 어머니가 형님과 자신을 비교해봐야... 라오허는 그저 비참할 뿐 아무런 방도도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봐야... 형님을 넘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 어미를 닮아서 얼굴은 제법 볼 만하니 다른 작전으로 가야겠지요. 쿤륜 가의 지지를 얻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어머니의 날이 선 질문에 라오허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아니, 사실 알고 있었다.
라오허는 그런데도 일부러 모른다고 대답했다.
하기 싫었으니까.
"나르타 양과 혼인을 주선해 보겠습니다."
"..."
싫어.
그런 거 싫다.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서 억지로 결혼하는 것은 싫었다.
하물며... 그게 자신에게 이렇게 비참한 현실을 알려 준 상대라면 더욱 싫었다.
"싫... 습니다."
그렇기에 라오허는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걸 본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거절은 듣지 않겠습니다. 이젠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제 폐하의 수명도 경각에 달했다.
시간이 부족하다. 태자는 이미 프리아를 품에 안으면서 갈라졌던 한족의 지지를 어느정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모용가와 주가가 붙었으니 이대로 가다간 태자가 황제가 되는 건 기정사실일 것이다.
그러니 더욱 빠르게 진륜족의 지지를 얻고, 아직 태자를 지지하지 않고 재상에게 붙어 있는 한족들이 있을 때 재상과 연합하여 태자를 쳐야 했다.
다행히 프리아는 멀다.
거사를 빠르게 진행한다면 프리아의 지원이 오기 전에 태자의 목을 칠 수 있다.
그녀가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라오허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전... 이제 더 이상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겠습니다."
"라오허!"
자신에게 화를 내는 그녀를 보면서 라오허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그런 라오허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라오허는 그 손길마저 외면했다.
어머니는 알고 계실까?
그렇게 형님과 자신을 비교할 때마다... 자신은 형을 뛰어넘고 싶기보단 형한테 그냥 복종하고 싶어질 뿐이었다는 걸.
그리고...
이미 자신에겐 그런 어머니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생겼다는 것을.
모르셨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죽었고, 그렇게 그 와중에 아들의 목숨만은 살리고자 했겠지.
어리석고, 참으로 어리석은 나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동정하면서... 라오허는 상념을 끝내고 눈을 떴다.
"...떠나자."
라오허는 불현듯 잠시 여행을 떠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홀로 그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겸사겸사 인연이 있으면 인연도 찾으면서...
그야말로 대책도 없이, 계획도 없이.
돌아다니고 싶었다.
라오허는 그렇게 여행을 떠났다.
--
"...라오허가."
재상과 식사하고 있던 황제는 급하게 찾아온 상선의 보고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제천 자사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 모습을 본 재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황제가 상궁에게 상을 치우라 지시하면서 대답했다.
"...가출이라도 한 모양이구나. 금품 몇 개랑 사라졌다고 하니."
황제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작게 중얼거렸다.
"멍청한... 어딜 가던 호위는 대동하라고 그리 말했거늘."
"폐하...?"
재상이 황제의 움직임에 뭔가 불길함을 느낄 때였다.
"다녀오마."
휘익!
"네? 폐하. 폐하!"
황제가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재상은 당황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
이미 가고자 하는 폐하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 뿐더러...
'폐하께서 자사를 그리 아끼실 줄은 몰랐군.'
동생이 가출한 걸 잡으러 가겠다는데 딱히 막을 명분도 없었으니까.
물론 의외이긴 했다.
제천 자사인 라오허는 황제를 제외하고 진이라는 성을 쓸 수 있는 3명 중 한 명이긴 하나. 솔직히 예전부터 폐하께서 총애하는 게 눈에 보이던 카무란이나, 친동생인 진민과 달리 그리 황제께서 신경 쓰는 형제란 느낌은 들지 않았으니까.
실제로 그래서 라오허에겐 유독 무례하게 구는 대관들도 있을 정도였고...
하지만...
아무래도 폐하께선 스스로가 살려 두고 황족으로 내버려 둔 형제들을 전부 아끼는 모양이었다.
하긴 제국에서도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제천을 맡긴 것부터가 어쩌면 형제 중에선 가장 신용하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제천 자사면 그저 이름 뿐인 친왕을 준 진민이나, 변방의 작은 도시 자사를 맡은 카무란에 비하면 훨씬 중하게 쓰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다녀오십쇼.'
그렇기에 재상은 황제를 말리기 위해서 사람을 부르기보단 그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만큼 재상은 지금의 황제를 신뢰하고 있었고.
지금의 제국은...
황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흔들릴 제국이 아니었으니까.
--
"...막상 나오긴 했는데. 이거."
그런 황제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작정 제천을 나선 라오허는 봇짐을 진 채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그의 복색은 평범한 행상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길이 어딨지?'
라오허는 길을 찾지 못하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단 행상인 신분으로 여기저길 돌아다녀볼 생각이었는데... 벌써 길을 잃고 막막해졌다.
"여긴 어디지?"
사방이 온통 나무다.
애초에 산 그거 별건가? 하고 호기롭게 발을 들였는데...
한 번 길을 잃고 나니까 걷고 또 걸었는데 길조차 보이지가 않았다.
'망했나.'
생각해 보면 무슨 배포로 여행을 결심한 거지?
당장 자신의 몸을 지킬 힘도 없는데.
라오허는 충동적으로 한 결정을 후회하면서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다.
길을 잃어 버린 라오허에게 남은 것은 그저 직진 뿐이었다.
'벌써 어두워지는 거 같은데.'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주변은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밤의 산이 위험하다는 건 라오허라도 알 수 있는 상식이었으니까.
'...불빛?'
그때 그런 라오허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저 멀리서 보이는 불빛이었다.
라오허는 반사적으로 그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집..."
놀랍게도 그곳에 있는 것은 조그마한 초가집이었다.
라오허는 놀랐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에선 구원이나 다름없었기에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거 안에 아무도 없습니까?"
끼이이익.
그 말에 문이 열리더니 한 여인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시죠?"
듣기만 해도 귀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은 라오허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름다웠다.
비녀로 곱게 정리한 윤기 넘치는 검은 머리카락도, 수수한 새하얀 한복으로도 엿볼 수 있는 고혹적인 몸매도.
무엇보다도... 애수를 자아내면서 남심을 흔드는 매력이 있는 눈망울까지.
라오허는 붉어진 얼굴로 그녀의 시선을 피하면서 헛기침했다.
"크흠! 그게 길을 잃어서 그런데... 하룻밤만 머물게 해주실 수는 없습니까?"
"아녀자 홀로 사는 곳에 남정네를 들이는 것은 아무래도..."
그녀가 주저하듯이 말하자 라오허는 아쉬운 얼굴로 물러났다.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최선을 다해서 다른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허나 늦은 밤에 산을 홀로 돌아다니게 두는 것도 정이 없는 일이겠지요. 비록 부족한 집이지만 조그마한 방 하나를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딱하다는 듯이 라오허를 보면서 제안하자 라오허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후후,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두근.
자신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면서 라오허는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처음이었다.
여인을 보면서 이토록 두근거리는 것은.
그렇기에 라오허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라오허는 자신의 얼굴에서 묘한 기대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