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스물세 번째? 대충 그 정도겠군요."
리처드는 느긋하게 검을 닦으면서 뜻밖에 정상적인 말투로 말했고, 그걸 본 사유우이는 느긋하게 마유주를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 생각보다 훨씬 더디네요."
사유우이는 생각보다 긴 기다림에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원래 합궁이라는 게 굉장히 장기적이랍니다. 그래서 순번이 뒤로 갈수록 황후가 될 확률은 0에 가까운 것이죠."
그런 그녀를 위로하듯 리처드가 말하며 검을 가죽으로 감쌌다.
물론 그걸 감안 해도 이번 황제의 합궁은 좀 많이 길어졌다는 건 인정하지만.
처음에 합궁에 부정적이던 황제를 생각하면 오히려 빠른 편으로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진 마시길."
리처드는 그녀의 불안을 이해했기에 그녀를 위로해주었고, 사유우이는 감사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해주셔서 고마워요."
"뭐, 그쪽과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지요? 황후는."
애초에 야만족 황후라니? 솔직히... 장자를 낳아도 황제가 허락할 리가?
리처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덤덤하게 말했고, 사유우이도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리처드의 말대로다.
황제가 설령 그녀와 합궁을 한다고 해도 그녀의 대우는... 좋지 않을 것이다.
사유우이도 그걸 느끼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다른 비와 비교해서도 그리 좋지 않을 거라 리처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한 번의 합궁이 그녀에겐 황제와의 마지막 접점이 될 수도 있고.
'여전히...'
폐하께 그녀의 대한 보고를 올릴 때마다 느끼고 있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유해진 것 같은 황제라고 해도, 여전히 이들에겐 악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감정은 쉽게 풀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어려운 문제군.'
그렇기에 리처드는 차라리 그녀에겐 이렇게 합궁이 늘어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황제에겐...
그리고 이들에겐.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거 같았으니까.
--
늘 꿈을 꾸고는 했다.
대륙 최고의 여성 격투사로 우뚝 선 자신의 모습을.
그래서 일까?
키린은 늘 그 꿈을 이룬 그녀를 동경했다.
"아... 역시 한 끝. 아니 좀 더 모자라네."
땅에 쓰러진 채 키린은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던져 버린 베베라는 덤덤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시비라니. 전혀 변한 게 없구나."
가볍게 손을 털며, 베베라는 마치 그녀를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러는... 그쪽은 참으로 유해졌네."
키린의 말에 베베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확실히 예전에 비하면 유해졌다고 볼 수 있겠지.
그때 그녀는 스스로가 최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렇기에 굳이 남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거든."
"...황제야?"
키린의 질문에 베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이나 도전했고. 다 졌어.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깔끔했다.
그렇기에 베베라는 순순히 인정할 수 있었다.
"...그 정도라고?"
키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세상에서...
최강의 격투가는 그녀였다.
그 무카보다도... 심지어 아버지보다도.
키린은 그녀가 최강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패배했다고? 그것도 세 번이나?
키린은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들었음에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 그만큼... 대단한 분이야."
그렇게 말하는 베베라의 얼굴엔 존경심이 엿보였다.
존경심이라니 이상해.
자신이 알고 있는 최강은 그녀인데.
왜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걸까? 어째서...
'절대 못 이길 거 같은 얼굴인 거야...'
자신의 목표이던 그녀가...
그런 얼굴을 하는 게 키린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상대는 언제든 해주겠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면 곤란해. 우리 사이니까 넘어가 주는 걸 명심하고."
베베라가 그런 키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중하게 경고하고는 저 멀리 사라졌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키린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저... 슬슬 단장하실 시간입니다."
궁녀가 그런 그녀를 보면서 머뭇거리며 말을 걸자 키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
베베라가 본 것은 무엇일까?
솔직히 키린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황제가 보여 준 것은... 놀랍긴 하지만 넘어서지 못할 정도의 것으로 보이진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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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셋은 예전부터 알고 지낸 것이냐?"
서류에 직인을 찍으면서 황제가 질문하자 케르는 털을 고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냐. 나랑 베베라, 그리고 키린은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다냐!]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녀 셋이 같은 스승에게 무술을 배운 사이였다니...
"무카인가?"
[으음, 솔직히 우리 아빠는 남을 가르치는 일은 잘못한다냐. 그래서 무술의 기초는 다른 곳에서 배웠다냐. 애초에 내가 그 여자를 만난 것은 수박족이 있는...]
"관동에서 만난 것이겠군. 그럼 베베라도..."
의외다.
그 베베라는 카산의 걸작이라 불릴 정도인 딩키족의 자랑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녀를 저 먼 관동까지 유학을 보냈다는 것은...
"아하, 그 사람이구나."
황제는 그녀 셋의 스승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무술의 기초를 가르치며, 다른 곳에서도 유학을 올 정도로 뛰어난 격투가이고, 그 키린을 가르칠 정도의 위명이 있는 사람은 사실 한 명밖에 없으니까.
"무아 바쿠. 그 밖엔 없겠구나."
[냐...]
케르의 반응을 보니 정답이었다.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이해가 갔다.
무카가 타격 기술에 정점이라면 무아는 온갖 격투 기술을 섭렵한 육각형의 격투사다.
애초에 무카는 감각에 의존하는 부분도 크니 딱히 누굴 가르치는 재주는 없으리라.
당장 케르가 말한 스승도 무문제의 비 출신 묘인과 무아였으니.
"...슬슬 시간이구나. 그만 쉬도록 해라."
한참 케르와 그 일을 이야기하던 황제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벌써 저녁이 되었다.
황제는 그렇기에 케르를 보낸 뒤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래... 베베라와 키린이."
당연히 둘이 오늘 서로 겨뤘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결과는 당연히 키린의 패배.
놀랍진 않았다.
베베라는 황제가 언제 붙어도 늘 간담이 서늘해지는 여인이었으니.
키린이 쌓아온 것이 대단하긴 하나 베베라의 신체 능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상심이 크겠구나.'
그녀 정도의 호승심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탈탈 털렸으면 좌절감이 클 것이다.
베베라는 황제처럼 딱히 손속에 여유를 두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그 드높던 자존심이 많이 꺾였으리라.
"그래서 뭘 하고 있느냐?"
걱정이 된 황제가 궁녀에게 묻자 궁녀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얌전히 단장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침소에서 대기 중입니다."
그런 궁녀의 대답에 황제는 의외라는 듯이 반응했다.
"별 반응은 없었느냐?"
"네? 아, 네. 없었습니다."
당황한 얼굴로 대답하는 궁녀를 보면서 황제는 책상을 두드렸다.
'...흠, 보기보단 감정을 숨기는데 능한 건가?'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궁녀들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들거라."
"네? 아, 예."
침소에 가까워졌을 때, 갑자기 황제가 용포를 벗어선 궁녀에게 건네주자 궁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그것을 받아들였다.
"거리를 두고...."
꽈악.
황제는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전혀 놀라지 않으면서 태연하게 키린의 주먹을 잡았다.
애초에 황제는 이미 그녀의 기습을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기습은 썩 훌륭하나 마음이 흔들리고 있구나. 무아는 늘 명경지수를 강조한다 들었는데."
"...아. 역시 그랬군요."
하얀 앏은 면옷을 입은 그녀는 자기 매끄러운 다리 곡선이 드러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황제를 보며 웃었다.
그녀는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 기습을 깔끔하게 막으면서 순식간에 자신을 제압하는 황제를 보니 확신이 들었다.
폐하께선...
"너무하시네요. 그땐 봐주신 거였나요?"
자신을 봐줘도 너무 봐주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이 순식간에 강해질 수는 없으니 지금 황제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그때 황제는 자신을 봐줘도 한참 봐주고 있던 셈이었다.
"...개미를 밟는데 전력을 다 할 정도로 짐은 악질이 아니다."
"개, 개미요?"
키린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자신을 개미 취급할 줄이야.
우스운 건 키린은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압도적인 강함에 매력을 느꼈다.
"새삼 반해 버릴 거 같네요."
그녀가 입술을 핥으면서 말하자 황제는 덤덤하게 그녀의 주먹을 놓아주며 말했다.
"그건 고맙구나."
'이번이 스물세 번째... 인가.'
황제는 이번 합궁이 벌써 스물세 번째 합궁이라는 걸 깨닫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몇 명이 남았지?
마지막에 남아 있는 합궁 상대를 생각하면 아직도 한숨만 나왔다.
'참을 수 있을까?'
과연 자기 눈앞에 야만족의 여인이 있는데...
자신은 살심을 억누를 수 있을까?
황제는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폐하?"
키린이 황제의 팔을 꼭 끌어안으면서 의아한 얼굴로 묻자 황제는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고민할 필요는 없다.
아니 지금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여자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애초에 합궁을 하는데 다른 여인을 생각하는 건 무례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황제는 그 고민을 지웠다.
"후후, 전 준비가 되었답니다?"
더욱 몸을 밀착해 오면서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황제는 말했다.
"그래, 그래야지."
지금은 그녀에게 집중해야 할 때니까.
황제는 야만족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그러고는 그대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 작은 가슴을 가져다 대는 그녀를 황제는 그대로 안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던 키린은 곧 싱긋 웃으면서 물었다.
"보기보다 적극적이시네요?"
"길게 끄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황제의 대답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품에 안겼다.
단단하면서도 따스한 느낌이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황제의 품에 안겨서 침대로 향했다.
부드럽게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은 황제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단단한 근육이 그녀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았다.
새삼 황제가 얼마나 단련을 해왔는지가... 그 몸만 봐도 느껴져서 그녀는 더욱 호감이 갔다. 이 근육과 흉터는 황제가 쌓아온 강함의 증거이자, 흔적이었으니.
"와..."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며 그녀가 손을 뻗어 황제의 복근을 매만졌다.
이리도 단단하고... 이리도 인간의 몸이 아름다울 수 있다니.
곳곳에 난 흉터조차도 전혀 흉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홀린 듯이 황제를 만지작거렸고, 황제는 묵묵히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이 정도 시간은 처음일 그녀에게도 필요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