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답니다. 그래서 언제 하면 될까요?"
모용진을 보면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한 오르페나는 모용진에게 다가와서는 그 손을 가볍게 잡았다.
"금위대장님이라면 싫지 않거든요."
싱긋 웃으면서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모용진은 그녀의 오해를 바로 잡았다.
"...상대는 제가 아닙니다."
"어머?"
오르페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누구인가요?"
"제천 자사 라오허 님이십니다."
모용진의 대답에 오르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만나볼게요."
이번에도 흔쾌한 대답이었다.
"일단 만나보면 될까요? 혹시 금위대장님께서 데려가주시나요?"
"그렇습니다만..."
왜 이렇게 달라붙으시지?
모용진은 자신에게 찰싹 달라붙는 그녀를 부담스럽게 쳐다보았다.
거리가 가깝다 보니까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그 존재감을 과시하며 모용진의 팔에 닿고 있었고, 그녀가 너무 가까이에 있다 보니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안 와도 된다."
무심한 바아간의 대답을 듣고 살며시 미소를 지은 오르페나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갈까요?"
모용진은 자꾸만 자신에게 달라붙는 오르페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대로 구름을 타고 올라갔다.
"어머나. 신기한 능력이 생겼네요. 그러고 보니 머리색도, 눈색도 변했어요."
"두려우십니까?"
모용진은 느긋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덤덤하게 물었다.
용인이라면 기본적으로 기운에 민감할 테니까... 요괴가 된 자신이 두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뇨. 그 모습도 어울린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답니다."
그러나 오르페나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오히려 그 모습조차도 마음에 든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 미소가... 모용진은 왠지 거북하게 여겨졌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자꾸 붙으시는 거지? 모용진이 부담스러운 듯 그녀와 살짝 거리를 벌리자 오르페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몸을 밀착해 왔다.
"그... 왜 자꾸 가까이 오시는 겁니까?"
"어머, 위를 날아다니는데 조금 무서운 걸요?"
전혀 무서워하는 얼굴이 아닌데...
모용진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녀를 일단 내버려 두었다. 확실히 인생의 대부분을 궁에서만 지내온 그녀에게 갑자기 상공을 비행하는 건 무서울 수 있을 테니까.
우웅. 우웅.
모용진의 팔에 꼭 붙어 있던 그녀의 금색 뿔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저건 무슨 의미일까?
여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나쁜 상황은 아니겠지.
모용진은 그리 생각하면서 구름을 조종했다.
"뿔이 반짝거리고 있네요."
모용진은 별 다른 생각 없이 말했으나 그 반응은 전혀 가볍지가 않았다.
"네...? 어머나."
화아아악.
순식간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해 버린 오르페나가 갑자기 거리를 두더니 고개를 푸욱 숙였다.
"어머나. 그게... 그러니까. 죄송해요."
"?"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모용진은 그 말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이동을 계속했다.
오늘 안에 도착하려면 조금 부지런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
우웅. 우웅.
소리를 내며 반짝이는 오르테가의 뿔을 만지작거리면서 황제가 말했다.
"언제봐도 신기하구나."
"그, 그렇게 보면 조금 부끄러운데..."
그 말에 오르테가는 눈에 띄게 부끄러워하면서 거리를 벌렸다.
용인의 뿔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이렇게 반짝인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호감의 표시라서...
오르테가는 솔직히 얼른 뿔을 감추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반짝. 반짝거리는 것이. 예쁘구나."
"아, 아무튼 동생이 온다고? 진짜?"
황제의 말에 더욱 얼굴이 붉어진 오르테가가 금방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르테가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틀리길 바랐지만...
"그래, 금위대장을 보냈으니 곧 올 거다."
덤덤한 그의 대답에 오르테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왜? 어째서? 라오허한테 그 아이는 조금 그렇지 않아? 그보다 왜 하필 모용진이야? 그 아이한테..."
"어머나. 언니 오랜만이네요. 폐하도 오랜만이예요."
오르테가가 뭐라고 말하려던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안으로 들어온 오르페나가 느긋한 목소리로 인사해 왔다.
"많이 컸구나."
황제가 그녀의 변화를 보면서 작게 감탄했다.
초상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확실히 실물이 훨씬 나았다.
그 조그마하던 아이가 저리 성장하다니... 몰라볼 정도였으니까.
"그러는 폐하야말로 더욱 멋지게 변하셨네요. 언니가 조금 부러운 걸요?"
오르페나가 그 말에 웃으면서 말하자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말이라도 고맙구나. 금위대장은 이만 돌아가도 좋다."
"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용진이 그대로 물러나자 오르페나는 아쉬운 얼굴로 모용진을 보았다.
그 광경을 오르테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았으나 황제는 하필이면 그때 명단을 확인하느라 미쳐 보지 못했다.
"아무튼 오늘은 푹 쉬고 내일 한 번 내 동생을 만나줬으면 좋겠구나. 강요하는 것은 아니니 너무 부담을 가지진 말 거라."
황제의 자상한 말에 오르페나는 미소를 지었다.
"상냥하시네요. 언니가 정말 부러워요."
"너 자꾸 헛소리 할래! 따라와!"
오르테가가 화난 얼굴로 오르페나를 끌고 가자 황제는 피식 웃었다.
오르페나는 오르테가의 손에 끌려가면서도 여유롭게 그런 황제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마주 손을 흔들어 준 황제는 다시 명단을 살펴보았다.
'가망이 없을지도 모르겠어.'
오르페나와 잠깐 대화를 나눠봤는데 도저히 그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황제는 다음에 라오허에게 소개해 줄 여성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명단을 뒤졌다.
--
"너... 왜 제안을 받아들인 거야! 내가 모를 거로 생각했어?"
그녀를 끌고 자기 처소로 돌아온 오르테가는 여전히 느긋한 표정인 오르페나를 향해 따지듯이 물었다.
오르페나는 그런 오르테가의 시선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방을 둘러보았다.
"너..."
"어머나. 언니. 방이 참 예쁘네요. 이 수는 언니가 놓은 건가요?"
능청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오르페나의 모습에 오르테가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너... 좋아하는 사람 있잖아."
움찔.
떨리는 눈으로 오르테가가 오르페나를 응시하며 말하자 잠시 멈칫한 오르페나가 다시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 꽃은 정말 예쁘게 수놓았네요. 마음에 들어요."
"말 돌리지 말고!"
오르테가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오르페나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그녀의 눈을 확인하고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언니는 정말 상냥하네요.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건데요."
오르페나는 가볍게 책상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엔 체념이 가득했다.
"제가 마음에 두었다고... 상대가 마음에 둔다는 법은 없는걸요."
아주 예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결코 그의 마음에 들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의 마음 속엔... 누군가가 가득 들어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 용왕의 딸이고, 그 위치가 가진 무게가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답니다?"
게다가 애초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제안하신 분이 그 황제고, 자신은 용왕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사실 자신이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적어도 오르페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 마음따윈 전혀 중요하지 않답니다."
"중요해!"
오르테가는 체념한 듯한 그녀의 말에 화를 내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는 슬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중요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당장 넌..."
그렇게...
"그렇게 울 거 같은 얼굴인데..."
슬픈 얼굴인데.
어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르테가는 그녀가 이대로 포기하지 않았으면 했다.
"어머나. 제가 아직 부족한가 보네요."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폐하께서 원하시는 걸요."
"그 녀석 말이 뭐가 중요하다고! 당장 내가 그 녀석한테 말해 줄게! 그 녀석도 말했잖아. 그냥 만나만 보라고."
오르테가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으나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정말 그런 뜻일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마음대로 제가 거절해 버리면 상대는 뭐가 되는 걸까요? 다른 사람도 아닌 그 폐하께서 권유해준 자리를 거절하는 게 얼마나 무례한 짓인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요."
"...그, 그건."
정론이었다.
그렇기에 오르테가가 머뭇거리자 오르페나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전 이미 마음을 굳혔답니다."
오르페나의 의지가 가득 실린 말에 오르테가도 더 말하지 못했다.
그저...
그런 그녀의 뜻을 존중해 줄 수밖에 없었다.
--
"검을 휘두르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요?"
푸른 머리를 곱게 땋은 귀여운 소녀가 검을 휘두르고 있는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서 정리했고, 그 검은 눈동자는 깊었다.
소녀는 그런 남자가 휘두르는 검을 보고 있는 게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르페나 공주님. 거기 계셨습니까?"
듣기 좋은 저음이 귀를 간지럽히자 소녀는 기분이 좋아져서 그를 보았다.
"네, 그보다 검을 휘두르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요? 언니는 그렇게 재미있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요."
오르페나의 질문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재미없죠. 검을 휘두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지루하고 힘들고, 재미를 느끼긴 힘들죠."
의외였다.
그렇게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데... 정작 재미가 없다니 뜻밖이었으니까.
"그럼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건가요?"
오르페나가 순수하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본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이...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그야...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 사람을 지키려면 지금 보다. 그 누구보다도 강해져야 한다면서 그는 웃었다.
"지키고 싶은 사람..."
오르페나는 그 말을 곱씹으면서 눈앞에 있는 청년을 보았다.
누군가를 위해서 강해진다.
그런 말을 할 수 있구나...
오르페나는 그가 조금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저 다녀올게요."
"너무 멀리 나가지 마세요. 제대로 된 호위는 꼭 달고 다니시고요."
오르페나는 그의 당부에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거리로 나섰다.
그때는 몰랐다.
그가 제대로 된 호위를 달고 다니라는 충고를 한 이유를 말이다.
--
푸아악!
덜덜...
오르페나는 자기 앞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용인 무사를 보며 구석에 웅크려선 몸을 떨었다.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지만... 눈앞에 인물들을 이길 수 없었다.
"용인 맞지? 푸른 머리에 노란 눈동자. 그보다 이야... 미래가 기대가 되네."
덜덜 떠는 오르페나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흉악한 외모의 남자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깝네. 조금만 나이가 찼으면 맛 좀 보는 건데."
맛을 본다고?
그 말에서 느껴지는 탐욕에 오르페나가 더욱 애처롭게 떨자 뒤에서 시체를 정리하던 검은 옷의 남자가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의뢰인한테 보낼 준비나 해. 그보다 그 용왕의 딸 주변 경호가 이리 개판일줄은 몰랐네."
마지막까지 버틴 용인을 제외한 나머지 호위 전부를 혼자 죽인 그 검은 옷의 남자는 싸늘하게 말하면서 용인의 경호 태세를 비웃었다.
'아빠...'
오르페나는 아버지를 속으로 애타게 불렀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현재 황실에서 재상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올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들이 이 시간을 노린 것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호위는 잘 달고 다니라니까."
그때였다.
위에서 들리는 한숨 섞인 목소리에 오르페나는 위를 보았다.
그곳엔 있었다.
그 남자가...
그것만으로도 오르페나는 너무 기쁘면서도,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오, 오라버니..."
"뭐야 넌."
흉악한 얼굴의 남자는 그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검을 던졌다.
그는 그 검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잡아서 구겨버리고는 그들을 비웃었다.
"누구긴."
파직. 파지직.
그 순간 주변에서 전류가 튀기 시작했고, 검은 옷의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저, 저건..."
우득!
"커억!"
어느새 접근한 그가 흉악한 얼굴의 남자를 향해 주먹을 꽂아 넣었다.
그 남자는 새우처럼 몸을 꺾더니 그대로 거품을 물면서 쓰러졌다.
"이만하면 알잖아."
"모용가의..."
검은 옷의 남자는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그를 보면서 검을 뽑았다.
그걸 본 그는 오르페나에게 다가와서는 그대로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이젠 안심해도 된다는 듯한 그 낮은 목소리에, 그 부드러운 손길에... 오르페나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모, 모용진 오라버니..."
울먹이는 얼굴로 안겨 오는 오르페나를 가볍게 안아준 모용진은 부드럽게 그런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며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주었고, 그 틈을 검은 옷의 남자는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파지직!
그러나 의미가 없었다.
모용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번개를 내리쳐 그 남자를 구워 버렸으니까.
"다 끝났으니까요."
그 광경을 그녀가 보지 못하게 눈을 가려주면서 모용진이 그렇게 말했다.
두근.
그때 오르페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면서 모용진을 쳐다보았다.
잔잔하게.
느리지만 확실하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였다.
그녀가... 그를 남자로 의식하게 된 것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