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은 그리운 전우들.
그 시체들이었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내 손에 묻은 피.
혈육과 적들의 피로 더러워진... 절대 지워지지 않을 흔적.
죄의 흔적이었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동아줄처럼 내려온 목소리에 황제는 눈을 뜨고는 고개를 들어 그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상선이 침소 안에서 목욕을 준비해두고는 궁녀들과 함께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선. 벌써 그런 시간인가?"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늘 이런 상념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황제는 그 상념을 깨준 상선에게 감사를 느끼면서 몸을 일으켰다.
바로 다가온 궁녀가 그 자리에서 물을 준비했고, 황제는 옷을 벗고는 그 안에 들어갔다.
궁녀들은 황제의 옆에 딱 붙어서는 몸을 씻기고는 머리를 감았다.
"그래서... 준비는?"
오늘은 조정에 출근하지 않았다.
조정 회의가 없는 날이기도 했거니와 오늘은...
"거리의 통제와 경호 인원의 배치는 끝났습니다."
황제가 관도의 거리를 행진하며 민간을 살펴보는 날이었으니까.
보여주기 식이지만 관료들이나 관도의 시민들은 황제가 미복잠행하는 것보단 이걸 더 선호하긴 했다.
관료들 입장에선 미복잠행보단 훨씬 완전하고 변수가 적어서 관리가 편했고, 시민들 입장에선 황제가 조용한 미복잠행보다 볼거리도 화려하고, 황제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황제는 당연히 미복잠행 쪽이 편하지만 다 사정이 있는 법이다.
"원래라면 황후 폐하와 함께 해야겠지만... 이번에도."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황제는 황후가 없다.
그렇다고 다른 비를 데리고 할 수도 없다.
그 상황에서 다른 비를 데리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차별이니까.
사직이야 그만큼 중요했다고 넘길 수 있으나 이번 건 경우가 달랐다.
사직에 비해서 중요도는 떨어지는데 주목 받는 정도는 오히려 민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거라 더 심했으니까.
"황태후 폐하께서는 준비가 끝났느냐?"
"그렇습니다."
즉 이번에도 황제와 거리를 행진할 사람은 다름 아닌 황태후였다.
상선의 대답에 황제는 슬슬 침소에 즉석으로 마련한 탕에서 나왔다.
그러자 궁녀가 빠르게 황제의 몸에서 물기를 닦아내고는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화려한 황룡포를 입고, 늘 거르던 익선관까지 쓴 황제는 침소를 나섰다.
그런 뒤에선 상선과 궁녀가 따랐고, 황제는 그대로 준비된 거대한 가마에 올라타선 의자에 앉았다.
"황상께서도 이젠 준비가 되었으니 출발하거라."
미리 그 옆에 앉아 있던 황태후가 가마꾼들에게 명령하자 가마꾼들이 바로 가마를 들었다.
황제는 멀쩡한 두 다리로 걷지 않고 이렇게 행진해야 한다는 것을 참 우습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정해진 형식을 부술 생각은 없었다.
"기침 하셨습니까."
"네, 황상께서는 잘 지내셨는지요."
황태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준 황제는 의자에 앉아서 서서히 보이는 관도의 거리를 보며 말했다.
"확실히... 많이 변했군요."
황제의 눈엔 거리의 변화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저기에 공사 중인 것은 미친왕을 위한 전시관이고, 저 중앙부에 공사 중인 것은 전국을 달리게 될 열차의 역이었다.
새삼 참 많이 변했구나...
황제는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 모든 것이 황상의 은덕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황상이 황후와 함께 이 거리를 행진할 때가 이 어미는 벌써 기대가 된답니다."
황태후의 말에 황제는 상상해 보았다.
자기 옆엔 황후가 있고, 아이가 있는 모습을.
[괴물!]
"...."
황제는 무심결에 자신의 더러운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사람들의 환호조차도 황제에겐 야유와 저주의 말로 들렸다.
"황상. 손을 흔들어 주시지요."
환호화는 시민들에게 황태후가 손을 흔들어 주며 말하자 황제는 눈을 뜨고 시민들을 보았다.
눈을 뜨기 무섭게 들려오던 원성과 저주의 말이 사라졌다.
오히려 그들의 얼굴에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신뢰, 그리고 경외감.
공포에 젖어 자신을 보던 이들은 이제 없었다.
황제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면서도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바뀌었다고 한들 얼마나 바뀌었다고 저들의 반응이 이리도 달라진 것일까?
예전엔 두려움에 얼굴조차 들지 못해서 자신을 보지도 못하던 그들이 이젠 얼굴을 멀쩡하게 들고는 이쪽을 향해 함성을 보내고 있었다.
신기한 기분이다.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한참을 그렇게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따금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애써 무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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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도 변했구나.'
뒤에서 황제의 호위를 위해서 뒤따르던 모용진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놀랐다.
당장 작년만 해도 달랐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는 모두가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황제와 황태후는 그런 그들 사이를 묵묵히 지나가고는 했다.
그야말로 침묵의 행진이었다.
지금은 모두가 황제를 존경하며, 우러러보는 게 느껴진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신경 쓰는 건 황제가 얼마나 잔인한지가 아니다. 스스로가 먹고살기 좋냐 아니냐지.
그런 점에서 지금 황제는 금문제 이후로 가장 좋은 황제일 것이다.
가장 나쁜 황제는 무문제일 테고.
황제는 피로 이 모든 것을 이뤄냈다.
하지만...
'그것이 너한텐 좋지만은 않았겠지.'
피로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은... 그만큼 부작용이 있는 법.
겉으로는 의연해 보이는 그라도... 그토록 많이 죽였는데 멀쩡할 리가 없다.
검에 묻은 진득한 피가 검을 망가트리듯이.
그가 흐르게 한 피는 그의 몸에 흔적으로 남아서 그를 갉아먹고 있으리라.
'넌 어떤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런 점에서 참으로 궁금했다.
넌 대체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지?
모용진은 그가 아니라서 황제가 대체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저 황제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멀쩡하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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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기본적으로 밤을 좋아하지 않았다.
옛날엔 합궁 때문이었지만, 사실 합궁이 아니라고 해도 밤을 좋아하진 않았다.
'라오허 문제도 해결되었고.'
행진을 끝내고 돌아온 황제는 라오허가 상대와 잘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오르페나는 당분간 황궁에 남고 싶어 했기에 방을 빌려주었고, 라오허에겐 이번에 라오허의 상대가 된 여인과 머물 수 있는 궁을 빌려주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뜨거운 밤을 보내고 있겠지.
'...그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미소를 짓던 황제는 이내 들려오는 환청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야근을 하거나 합궁을 할 때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이렇게 혼자 있을 때나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면 늘 이런 환청을 들었다.
자신을 원망하는 소리, 살려 달라는 애원, 저주의 말들.
그것들이 황제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꿀꺽.
황제는 언제나처럼 약을 먹고는 물을 마셨다.
그러자 들려오던 환청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미칠 듯한 졸음이 황제를 덮쳤다.
'자야지.'
늘 이런 식이다.
그는 미친 황제.
그래서 약이 없으면 혼자서는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 하는 형편없는 황제.
그게 지금의 황제였다.
겉으로는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속은 황제 스스로도 알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조용하구나.'
황제는 드디어 찾아온 정적에 눈을 감고는 잠이 들었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황제는 잠이 들어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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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슬슬 다시 합궁을 진행해볼까 하는구나. 이만하면 제법 쉰 셈이니."
다음날 아침.
조정에서 회의를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온 황제가 말하자 모용진은 달라붙고 있는 세르나를 밀어내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빠르네요."
모용진에게서 밀려난 세르나를 주박술로 묶어 버린 오르페나는 그런 모용진의 근처에 서서는 물었다.
"어머나. 아직도 합궁 중이셨나요? 전 아네스 님이 계시길래 당연히 끝난 줄 알았답니다."
오르페나가 오늘 아침에 본 아네스를 떠올리며 말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 10명이 남아 있지."
"다음 합궁 상대는 오스반족의 엘리자베르 공주님이십니다."
미령이 황제의 말에 덤덤하게 보고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반이면 이반의 딸이던가?"
오스반의 국왕 이반 본 드비체를 언급하는 황제를 보며 미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미 와 있나?"
그러면 당장 오늘이라도 진행이 가능할텐데.
황제가 그리 생각하며 묻자 미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휴식 선언을 하셨기에. 아무리 빨라도 이틀은..."
미령의 대답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때까지 준비해 두거라. 그리고 라오허를 데려오도록."
황제의 명령에 미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지자 이번에 황제는 모용진에게 말했다.
"너도 나가거라. 꼴도 보기 싫으니까."
어느새 착 달라붙어 있는 오르페나를 보면서 혀를 찬 황제는 바닥에서 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르나에게 턱짓 했다.
"오르페나. 풀어 주거라. 짐의 백부장이다."
"네, 알겠습니다."
오르페나가 세르나를 풀어 주기 무섭게 세르나는 바로 오르페나와 모용진을 떼어놓고는 모용진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본 황제는 깊은 한숨을 쉬고는 무거운 어조로 선언했다.
"전부 나가."
황제가 살기마저 흘리자 셋은 모두 덜덜 떨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걸 본 황제는 깊은 한숨을 쉬고는 눈을 감았다.
'피곤하구나...'
저런 치정 싸움을 보는 것도 꽤 피곤한 일이다.
황제는 처음으로 그 치정 싸움의 원인인 모용진이 밉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