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의무방어전-165화 (165/235)

오스반 왕국의 수도 비엘나.

그곳에 있는 왕궁.

그곳에서도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된 건물에서 한 여인의 떼를 쓰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싫어! 싫어! 가기 싫단 말이야!"

애처럼 투정을 부리며 완강히 거부하는 여인을 보며 외알 안경을 쓴 중년의 남자는 식은땀을 흘렸다.

분홍색 양갈래 머리에 아직 어린 애 같은 풋풋함이 느껴지는 동안의 얼굴.

이게 정말 20살 성인 여성의 얼굴인가 싶다가도...

그녀의 봉긋하게 솟은 가슴과 여성스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프릴 드레스의 감싸인 몸을 보면 성인인 게 이해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그 커다란 분홍색 눈동자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제국은 무서운 곳이잖아요. 아바마마. 전 정말 가기가 무서워요."

남자.

아니 이반은 그 애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지는 알고 있었다.

어린 딸 아이가 제국에 갔던 시절...

그곳에서 본 것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물며...

그녀에게 그 공포를 안겨주었던 당사자에게 보내는 것이니 충격이 오죽할까?

남자는 그녀가 그토록 완강하게 거절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허나 어쩔 수 없구나. 우린 졌다."

남자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말했다.

그 옛날.

호기롭게 그는 타마드를 지지하고 나섰지만... 그 일을 위해서 참석한 즉위식에서 본 것은 그들을 순식간에 쓸어 버리는 공포스러운 황제 단신의 무위였다.

그때를... 이반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쪽은 딸 아이인가?]

지금도 상상만 하면 온몸이 떨리고 속이 울렁거린다.

사방에 있는 시체에 덜덜 떠는 딸의 앞에 서서... 그 공포스러운 황제의 신발에 입을 맞추면서 충성을 맹세했던 그때가.

아직도 그의 기억에 생생했다.

'...보내고 싶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가신의 딸을 보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가뜩이나 저번에 타마드를 지지했다가 실패한 뒤로 이반은 오스반 내부에서도 권력을 크게 잃었다. 즉, 황제의 비가 된 가신의 딸이 황제를 등에 업고 자신을 끌어내리고자 한다면... 자신은 이 자리를 지킬 수 있나?

이반 스스로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겁에 질린 딸에게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르."

훌쩍.

눈물을 그치고 자신을 보는 딸 아이를 향해... 이반은 단호하게 말했다.

말투는 단호했지만, 이반의 마음은 이미 만 갈래로 찢겨져 있었다.

"이건 이제 부탁이 아니란다. 명령이다. 이번 합궁을 위해 제국으로 가거라."

"...네, 아바마마."

그 단호한 명령에 힘겹게 울음을 그치고, 엘리자베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는 이반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지만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었다.

이반은 속으로 간절하게 바랐다.

부디... 이 아이가 그 공포의 황제에게.

'죽지만은 말아다오.'

죽지만은 않기를.

이반은 많은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저... 황제의 손에 이 아이가 죽지만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엘리자베르라면 그 울보인가요?"

자신의 팔에 착 달라붙어 있는 아네스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황제의 기억에서도... 그녀는 울고 있었다.

뭐, 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상황이었지만.

그녀가 얼굴에 튄 피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겁에 질린 얼굴로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난다.

그래서 자비를 베풀었다.

원래라면 이반은 그 자리에서 죽어야 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특별히 기회를 주었다.

부녀가 살 수 있는 기회를.

다행히 이반은 바로 그 기회를 잡았고, 황제는 실제로 그 둘을 멀쩡히 살려서 보내주었다.

"...생각해 보면 아주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구나. 짐은."

그런 점에서 아주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던 걸까?

황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네스가 웃는 얼굴로 한참을 그렇게 황제에게 밀착해 있었다.

"후후, 오랜만에 볼 걸 생각하니 벌써 기대가 되네요. 아직도 눈물이 많을까요?"

한참을 그렇게 황제에게 머리를 기대며 즐기던 아네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가볍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그러셨죠? 물건이 완성되었다고. 한 번 보러 다녀와야겠네요."

그녀가 타흘라에게 주문해 둔 물건을 확인하러 간다는 말과 함께 사라지자 다시 혼자가 된 황제는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침소 대신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저벅. 저벅.

따라오는 상선과 궁녀를 돌려보내고... 황제는 혼자서 무덤을 찾았다.

관리가 잘 되어 있는 무덤을 보면서 황제는 그대로 털썩 주저 앉았다.

마음이 심란할 땐 결국 이곳에 오게 되었다.

이곳은 황제에게 있어서 동료들이 남긴 흔적이었으니까.

자신과 함께 했다는, 지금도 함께 있다는... 정말이지 소중한 흔적.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덤에 앉아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을 뿐.

"폐하."

그때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황제는 의외라는 듯이 반응했다.

그만큼 이 목소리는 이곳에서 들릴 일이 없는 목소리라 생각했으니까.

"대흘이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대흘이 이곳에 온 건 참으로 신기했다.

그렇기에 황제는 의외라는 듯이 질문했다.

"여긴 어쩐 일이냐?"

"...폐하께서. 이쪽으로 향하시기에."

대흘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황제 쪽으로 걸어왔다.

털썩.

그대로 황제의 옆에 주저앉은 대흘은 들고 온 술을 땅에 뿌리고는 말했다.

"이 말 안 듣는 망아지들이 어지간히 폐하의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대흘이 덤덤하게 말하자 황제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모양이다. 망아지라... 하긴 도저히 제어가 안 되는 녀석들이긴 했지."

말 안 듣는 망아지.

정말이지 이 녀석들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국경 방위 사령관의 눈 밖에 났으나 그럼에도 실력은 있어서 퇴역 당하지 않은 병사들이 모여 있던 곳이 바로 이곳.

할바르의 부대였으니까.

그런 점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입 병사였던 황제가 이 부대로 발령이 난 건 어쩔 수 없는 필연이었다.

사실 그곳으로 보내진 것도... 명분은 정찰이었지만 야만족들에게 죽으라고 보내졌다는 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뿐이지.

"그대는 그때가 그립지 않나?"

난 그리운데... 황제가 그런 생각하면서 묻자 대흘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립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냉정한 말이었다.

황제가 그 말에 놀랄 때 대흘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폐하를 섬길 수 없었으니까요."

"...고맙구나."

그 말이... 황제는 그리 싫지 않았다.

자신에게 저리 충성해준다는 게 정말... 기뻤다.

"폐하. 저희가 잔인하였다는 건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와 저희들의 힘이면... 좀 덜 잔인해도 괜찮았겠지요."

대흘은 덤덤하게 말했다.

알고 있었다.

자신들에겐 이미 그럴 힘이 있었다.

그럴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허나 우리가 굳이 그래줄 이유 역시 없습니다. 폐하의 손이 더러워진 것이 그 죄의 흔적이라면... 폐하께서 이룬 이 제국은 그 성과의 흔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에 굳이 자비를 베풀어줄 이유도, 의무도 없었다.

적어도 대흘은 그렇게 생각했다.

폐하께서는 그것을 죄라 여기셨지만 대흘은 그것을 죄라 여기지 않았다.

"이 제국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런 대흘의 말에 황제가 묻자 대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역으로 질문했다.

"반대로 그들의 목숨에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대흘은 솔직하게 말했다.

"무례한 말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전 그 목숨에 이 제국만큼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폐하께서는... 인간의 목숨이 제국보다 귀하다 여기시겠지만."

대흘은 무덤에 손을 얹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 목숨으로 쌓아 올린 이 제국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목숨을 귀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도 있을 수 있겠구나.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대흘에게 말했다.

"점점 실력이 늘어가는 모습을 보니 조만간 벽을 넘겠구나."

"아직 부족한 실력입니다."

대흘은 그리 답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 겸손한 모습이 황제는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브레드도 은퇴하고, 리처드마저 자리를 떠나게 되면. 그대와... 세르나가 해 줘야 할 텐데."

세르나의 재능은 참으로 뛰어나다.

금위대에서도 그 성장이 두드러지는 이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가 대흘이고, 다른 하나는 세르나였다.

물론 세르나는 중책을 맡기기엔 조금 가벼운 느낌도 있지만... 황제는 그건 세월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르나는... 힘들 거 같습니다. 차라리 아비를 믿어보시지요."

아비라... 그 역마살이 낀 녀석이 도움이 될까? 차라리 료라이가 더 성장하길 기대하는 게 마음이 편하리라.

"세르나가 모용진을 참으로 귀찮게 하더구나. 그 조막만 한 것이 모용진 취향일 리도 없거늘."

"그건... 그러게 말입니다."

황제는 냉정하게 말했고, 대흘도 부정하지 않았다.

"오르페나 공주님이 그런 점에선 좀 더 앞서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황제는 부정하지 않았다.

생긴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의 차이는 부정하지 못한다.

요괴가 된 모용진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인간보단 좀 더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용인을 더 선호할 수 있겠지.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모용진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물론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날이 차구나. 슬슬 돌아가자."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선 대흘에게 말했다.

"가비가 조만간 재료를 구하기 위해 떠난다고 하던데... 달리아와 같이 갈 모양이더구나."

아무래도 둘이 사냥을 해서 활의 재료를 모을 모양인데... 달리아나 가비나 제법 무위가 뛰어나긴 하나 그렇다고 단둘을 보내기엔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 그대가 동행하거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제의 명에 대흘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황제는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럼 가자."

그런가... 이 제국 자체가 짐의 흔적이란 말인가.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는 기운으로 제국 전체를 가볍게 훑었다.

'나쁘지 않구나.'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다.

자신이 지은 죄의 흔적은 아마 평생 지워지지 않겠지만... 이 흔적 역시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거니까.

황제는 그리 다짐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밤이 깊었으나...

오늘은 편히 잘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