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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176화 (176/235)

이제부터 태학정의 판단에 불만이 있는 자는 황제에게 이야기하라.

그 선언은 선비들에겐 그야말로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았다.

만만하고 어린 태학정에게는 겉으로는 어르신 어르신 하면서도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던 선비들은 그런 태학정을 방패 삼아서 사사건건 별것도 아닌 일로 상소를 올리며 황제를 피곤하게 만들어왔다.

그 이유는 실로 간단한 것이...

황제의 행보가 선비들을 무시하는 행보 그 자체였고, 특히 관리들의 집단 상소에 대한 대처는 더욱 그런 그들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관직에 오를 그들에게 언제든 황제의 마음에 따라서 자기 자리가 아무런 보호 수단도 없이 위협당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불안이었으니까.

원론적으로는 물론 황제에게 그럴 권한이 있는 것이 맞다.

허나 그 지금의 황제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황제도 선비를 대놓고 무시하면서 관직에서 자르는 짓은 하지 못했다.

그 어떤 황제도 귀찮게 하려는 의도가 담긴 상소에도 집요할 정도로 답장을 보내는 미친 짓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답장의 내용을 읽어보면 전부 읽고 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너무 얼토당토않은 내용이면 답장이 없긴 했지만... 그걸 감안 해도 말도 안 되는 업무량이었다.

그런 황제에게 불만을 대놓고 이야기해보라고?

면전에서 하는 게 아닌 상소라서 할 말 못할 말 다 하는 거지 혈족도 마구잡이로 죽이는 미친놈 앞에서 그 누가 용감하게 할 말을 다하겠는가.

선비들은 당연히 반발했으나 태학정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금위군이 크게 반발하는 이들을 데리고 사라져 버리자 그 불만도 쏙 들어갔다.

"이렇게 간단할 줄은..."

이신은 자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금위대가 나서자 그렇게 언론의 자유니 선비들의 권리니 하던 것을 주장하던 이들이 조용해졌다.

"그런 것이다. 물론 이게 짐이 잘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

이런 분위기에서... 그 누가 제대로 바른 소리를 낼 수 있을까?

황제도 스스로가 꽤 위험한 수를 두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스스로의 타락을 방지할 수단을 망가트린 셈이니까.

"그러니 앞으로 그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다.

"제가... 말입니까?"

이신이 황제의 말에 놀란 듯 물었다.

폐하께서 선비들을 제압했으니 자신의 역할은 이제 끝난 것이 아닌가?

그런 이신의 얼굴을 본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뒤에서 서 있는 모용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러니 그대가 짐이 타락할 거 같거든 바른 소리를 내는 지식인의 역할을 해야지 않겠느냐? 그 어떤 말도 괜찮다. 처벌하지 않을 터이니. 만약 짐이 그 약속을 어긴다면... 모용진 그대가 이 목을 치거라."

"폐, 폐하!"

이신은 그 말에 화들짝 놀라서 반응했으나 모용진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모용진의 대답에 황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좀 걸을까?"

황제는 성큼성큼 앞서 걸으면서 눈이 소복하게 쌓인 태학의 길을 걸었다.

저기엔 이 제국에서 가장 많은 서적을 보관하는 도서관이 있었고, 저쪽에 설육 공이 직접 가르침을 주었다는 경연장이 있었다.

황제도 실제로 몇 번은 이곳에서 경연을 한 적이 있었다.

다른 곳을 보니 학당에서는 박사들에게 학도들이 열심히 교육받고 있었고, 몇 명은 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과연... 젊음이 느껴지는 곳이다.

황제는 사실 이런 곳에서 배워 본적이 없다.

"미령이 이곳에서 배웠겠구나."

학당을 보면서 황제가 중얼거리자 이신이 바로 반응했다.

"아, 그녀는 뛰어난 학도였지요. 특히 언문에 능하고, 사서를 외... 죄송합니다. 이제 비 전하셨죠."

한참 신나서 떠들던 이신이 그제야 그녀가 황제의 비가 되었다는 걸 깨닫고는 급하게 사죄했다.

"되었다. 흥미로웠으니까. 그래, 그랬단 말이지."

이야기할 거리가 늘었군.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모용진은 워낙 그런 시선을 같이 받아보니 덩달아 익숙한 반응이었다.

오히려 태학정인 이신이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그래, 그대의 동생이라고."

"...네? 아, 예."

처음엔 갑작스러운 황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신은 곧 그 의미를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은 적이 있지."

"...좋은 말은 아닐 거 같습니다."

이신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의 여동생은 명가의 딸이라는 자각이 딱히 없는 아이로... 무림에 몸을 담겠다고 설치던 적도 있을 정도의 말괄량이었다.

"무림이라... 그건가? 무과 시험에서 떨어진 떨거지들이 모여 있는 곳."

"뭐, 그렇죠. 무과급제할 실력도 없는 놈들이 뭔가 거창한 칭호 달고 행패를 부려대는 통에 미칠 노릇입니다."

황제의 직설적인 말에 모용진은 푸념했다.

말이 무림인이지 그곳에 속한 놈들은 그냥 관직에 오를 실력도 없는 놈들이 협이니 의니 하면서 민폐를 끼치는 놈들이 태반이다.

황제가 가진 무림인에 대한 이미지가 그러했고, 사실 대부분의 귀족들 역시 굳이 입 밖으로 안낼 뿐이지 무림인에 대한 인식은 비슷했다.

당장 이신도 그 직설적인 표현에 당황했을 뿐이지 황제의 말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허나...

"그런 걸 동경하는 젊은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겠지."

겉으로만 들으면 협의를 중요시하며 여행을 다니는 이들이다. 그런 걸 동경하는 철없는 젊은이들이 있어도 이상할 건 아니지.

"그러고 보니 무림에 천하제일인이 있다더군요."

"천하제일?"

모용진의 말에 황제가 반응했다.

"그런 곳에 어찌? 뭐, 진흙 속에 진주가 있을 수도 있겠지."

천하제일이 어찌 그런 변변찮은 곳에?

황제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무에 관한 건 어지간하면 황제는 직접 보고 판단하고 싶었다.

"태학정은 어찌 생각하느냐? 천하제일이 무림에 있다고 믿느냐?"

"신은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그런 쪽엔 영 무지한 터라..."

이신이 난처한 얼굴로 대답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용진에게 물었다.

"그래, 태학정은 무인이 아니니 모를 수도 있지. 그렇다면 금위대장은 어찌 생각하나??"

"폐하가 계신 데 그런데에... 그래도 일단은 보고 판단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모용진이 처음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려다가 황제의 낯빛을 살피고는 급하게 말을 수정했다.

"그렇지. 은둔고수라는 말도 있지 않으냐. 모든 강자가 무관에 뜻을 두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순수하게 무를 추구하다가 엄청난 경지에 도달한 자가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몰라. "

그 말에 공감하며 황제의 말이 길어졌고, 그 순간 이신과 모용진은 황제가 무슨 말을 할지 바로 알아차렸다.

"천하제일인이라... 찾아보거라."

"...네."

모용진은 어김없이 일거리가 되자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솔직히 황제의 눈치를 봐서 봐야 알 거 같다고 말하긴 했지만 모용진은 그 무림에 있다는 천하제일인에게 큰 기대가 없었으니까.

"태학정."

한참 그렇게 걷던 황제가 걸음을 멈추고는 이신을 불렀다.

"저 나무를 기억하느냐?"

중앙에 자리 잡은 아직 그리 크지 않은 느티나무를 보면서 황제가 물었다.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신은 바로 대답했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름 아닌... 이 나무는 폐하께서 그가 태학정이 되던 날에 선물한 것이었으니까.

"이젠 제법 컸어. 작은 묘목이었는데."

"그렇습니다."

황제의 말대로... 그 조그마하던 묘목이 어느새 이 정도로 컸다.

이신은 새삼 자신이 태학정에 오른지도 2년이 되어간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중엔 더욱 크겠지."

물론 아직 작은 편이긴 하다.

그렇기에 이신은 고개를 끄덕였고, 황제는 덤덤하게 나무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때까지 그대가 이곳을 든든하게 지켜줬으면 좋겠구나. 그래... 그대가 진짜 어르신이 될 때까지."

황제의 말에 이신이 감동을 받은 얼굴로 물었다.

"폐하께서도 그때까지 같이 해주시는 겁니까?"

그런 이신의 당돌한 질문에 황제는 피식 웃었다.

"그럴 리 있겠느냐."

그때쯤이면 황제는 자식에게 양위하고 본인은 느긋하게 취미 생활을 즐겨볼 생각이었다.

"그, 그러시군요. 허면 저 역시..."

지금의 황제가 아니면 딱히 섬기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이신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머뭇거리며 말하자 황제가 단칼에 잘랐다.

"그건 그때 가서 미래의 황제에게 따지거라. 짐은 그대의 퇴직을 윤허할 생각이 없으니."

참으로 고약한 상관이다.

이신은 그런 생각하면서도 웃었다.

"그만큼 제가 필요하단 이야기시군요!"

"...그리 긍정적이니 또 싫구나."

그 말에 툴툴거리면서도 딱히 부정하지 않는 황제를 보면서 이신이 실실 웃었다.

"정말이지... 저놈은 당체 믿을 만한지 모르겠구나."

"그래도 다른 놈을 못 믿어서 폐하께서 아끼시는 것 아닙니까? 그냥 기뻐하게 두시지요."

그 웃는 게 마음에 안 드는지 투덜거리는 황제에게 모용진이 달래듯이 말하자 이신은 웃었다.

"그래도 전 믿을 만하다는 이야기지요?"

아직도 저러고 있는 건가?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투덜거렸다.

"징그럽다. 사내 놈이 웃는 걸 보는 것도 고역이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황제는 입가는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 말이죠. 폐하께서 절 싫어하시는 줄 알고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모릅니다."

이신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가 황제를 두려워했던 근원적인 이유는... 자신이 정말 황제의 사람이 맞긴 한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제는 기뻤다.

확실하게... 폐하께서 자신을 폐하의 사람이라고 말해주어서.

이신은 그게 정말 기뻤다.

"호불호를 따지자면 그대는 불호야."

"너무하십니다!"

황제의 단호한 말에 이신이 서운한 표정을 짓자 황제의 얼굴이 악귀처럼 변했다.

"허면 짐이 일 처리도 시원찮고, 보고는 매번 늦으며, 쓸데없이 걱정만 끼치고 손도 많이 가는 부하를 뭐가 예뻐서 좋아해야 하느냐?"

"그, 그건..."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서 이신의 말문이 막혔고, 모용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니 좀 제대로 하거라. 짐도 그대 말고는 믿고 맡길 자가 없다는 것에 참담할 지경이니,"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잘해야지."

황제의 엄한 말에 이신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 보겠습니다."

"제발 그래 주면 좋겠구나. 짐이 이렇게 시간을 내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그대가 이해하고 있다면 말이다."

황제는 당장 이신을 만나기 위해서 개인 단련 시간도 포기하고 왔다.

당장 황궁으로 돌아가면 쌓인 보고서와 상소를 살펴보고, 인가를 내려 줘야 했다.

이신은 새삼 이 황제가 역대 황제 중에서 가장 바쁜 황제라는 걸 실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황권이 강할수록 황제의 업무 부담도 늘어난다.

역대를 따져봐도 최고의 황권을 구가한다고 평가 받는 지금의 황제라면... 당연히 그만큼의 업무가 늘어난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이신이 사관들의 기록을 살펴보아도... 역대 황제 중에서 지금의 황제만큼 일을 많이 하는 황제는 없었다.

그제야 이신은 폐하께서 자신에게 시간을 써 준 것이 얼마나 큰지 깨닫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반드시... 이번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 표정을 본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제법 좋은 표정을 보여주는구나.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이신에게 이곳에 오기 전부터 준비해두었던 새 곰방대를 하사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럼 수고하거라. 가자."

모용진을 데리고 사라지는 황제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이신은 황제가 쥐어 준 고급스러운 곰방대를 보면서 다짐했다.

'선비들의 수준을 올리는 것이 우선이겠지.'

지금 태학의 수준은 처참한 수준이다.

당장 폐하께서 지적하신 대로 선비란 자들이 진서를 제대로 쓰지 못 하는 이들이 태반이었으니까.

일단 교육부터 새로 해야 할 것이다.

박사 자격을 가진 이들도 재심사와 재교육이 필요한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참으로... 손볼 곳이 많다.

이신은 그리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황제가 할 일이 많듯이... 자신 역시 할 일이 참으로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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