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보이는 것은 그날의 추억.
무섭고 엄하지만 그래도 든든하던 아버지, 믿을 수 있는 동생들, 그리고 포근하게 자기 뒤를 지켜 주던 어머니.
세월은 그에게서 참으로 많은 것을 앗아갔다.
든든하던 아버지는 떠났고, 믿을 수 있던 동생들은 믿을 수 없어졌다. 늘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먼저 가 버리고 없었다.
이제 황제가 된 태자는 과거를 그리워했으나 그 과거는 그저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었다.
혼자가 된 황제는 자기 아버지처럼 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앉아서 숨 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누구보다 믿을 수 있던 동생은 재상이 되고 나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누구보다도 든든하던 동생은 대장군이 되고 나서는 누구보다도 불안 요소가 되었다.
하루가 지옥 같았다.
금위대장조차도 신뢰할 수 없는 황궁은 겉으로 보기엔 참으로 평화로웠으나 황제는 늘 그 병약한 몸으로 온갖 걱정을 하며 살아야 했다.
바보 같은 일이었다.
암살 시도도 없었다. 물리적인 협박도 없었다.
그저 혼자서, 불안에 떨면서 여인을 탐하는 게 일에 전부.
그런 황제가 불안하지 않게 된 것은... 그녀를 만나고 나서였다.
지금의 황후인 모용지희.
그녀의 무력은 늘 불안에 떨던 황제에게 작게나마 안식을 주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여인이었다.
당연히 그런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들에겐... 조금 더 정이 가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아들이...
'그토록 뛰어나다면 더욱.'
성장하고 보니 확실히 태자는 다른 자식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자신처럼 별 볼일 없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먼저 태어났을 뿐인 장자가 아니라.
군계일학(群鷄一鶴).
혼자 눈에 띄는 그런 존재였다.
아마 황자가 아니었어도 어느 방향으로든 성공했을 거 같은... 자랑스러운 내 아들.
최근 황제의 낙은 그런 태자를 보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황제는 아버지에게 참으로 미안했다.
자신은 결국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가 지켜온 제국을 망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렸다. 참으로... 한심한 아들이었다.
그리고 좋은 아버지도 되지 못했다.
한심한 아들, 한심한 아버지. 한심한 황제.
그 어떤 것에서도 한심해...
늘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다면 이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하셨을까?
황제는 솔직히 두려웠다.
저승에서 아버지 앞에 서는 것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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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그래서 무서운 거지."
황제의 말에 진민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숙부님이 원래 이랬다고?"
미친왕이 무덤 뒤에서 발견한 것은 독문제 앞에서 셋이서 힘을 합쳐서 제국을 이롭게 하겠다고 맹세한 것을 기록해 세워둔 비석이었다.
제법 오래된 비석이었는데 관리가 잘되어 있어서 그 모습을 제법 멀쩡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황제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당장 권력에 눈이 멀어서 독을 타고, 목에 칼을 박는 형제들을 지긋할 정도로 보았으니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변질되기 쉬운 것이다. 아우야. 네가 바뀐 것처럼. 그리고 내가 바뀐 것처럼."
"...그러네."
미친왕은 그제야 완전히 이해했다.
자신도 바뀌었다.
형님도 바뀌었다.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함께 했을 그들의 관계가 바뀌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보이더구나. 난 사실... 아버지가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게 참으로 부러웠지. 형제와 우애가 좋아 보였으니까."
그 재상도, 대장군도 결국 무문제를 해하지 않았으니까.
황제의 눈엔 참으로 우애가 깊어 보였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저 자신처럼 견제할 필요가 없어서 방치되었을 뿐.
아버지도... 그 형제들 사이에서 참으로 고독했다는 걸.
겉으로는 살갑게 굴어도, 그 안에 있는 멸시를 느낄 수 있었을 거라는 것을.
황제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참으로 철이 없고 무심했구나."
그리 생각하면 황제는 참으로 아버지한테 미안했다.
조금은 더 신경 써줄 걸. 착한 아들이 되어서... 애교도 좀 부려주고 솔직하게 애정도 표현해 줄 걸.
그런 후회가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아버지는 황제로는 최악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그런 아버지를 사랑했으니까.
"형님..."
그런 후회를 읽은 미친왕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새삼... 자신이 한 짓이 참으로 쓰레기 같았다.
형님은 이렇게 가족을 생각하는데... 그때의 자신은 참 빌어먹을 놈이었으니까.
"나도 좀 미안하네.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줄 걸."
그런 마음에 괜히 사고만 친 과거에 자신이 참으로 한심해서... 미친왕이 아버지의 무덤을 보면서 미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한테는 기대도 안했을 테니 쓸데없는 걱정이구나."
황제가 그 말에 피식 웃으면서 말하자 미친왕이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너무하잖아. 정말."
미친왕의 그런 반응에 황제는 무덤에 그렇게 아버지가 좋아하던 감주를 뿌려주고는 제사상을 치우는 궁녀들을 보고 있었다.
"기일에 올 수 있는 형제가 너무 적구나. 이게 어쩌면 짐의 불효겠지."
오늘은 바로 무문제의 기일이었다.
당연히 합궁도 미뤄졌으니 황제는 이른 아침부터 제사를 진행했고, 제사가 끝나자 무덤 앞에서 형제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라오허는 진작에 피곤하다고 자러 갔고, 카무란은 온김에 타흘라와 이야기를 나눠본다고 훌쩍 가 버렸으니...
비들도 황제의 눈치를 보다가 황태후와 함께 가 버린 지금, 이 무덤 앞에서는 황제와 미친왕 뿐이었다.
황제는 아버지의 기일에 올 수 있는 형제가 고작 3명뿐이라는 사실에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리아를 포함한 성을 잃은 여자 형제들은 애초에 황제가 그 성을 잃게 만든 순간 이런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으니 더욱.
몇 명 정도는... 남겨둘 수도 있었는데 그때의 황제는 그러지 못했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광기에 잠겨서 그저 죽이는 것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거의 자신은 참으로 미친놈이었다.
그걸 황제는 다시금 뼈저리게 실감했다.
"모처럼이니 연주 한번 해 보거라."
황제가 우울해지려는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 미친왕에게 제안하자 미친왕이 질색했다.
"응? 갑자기? 그건 라오허 전문이잖아. 다시 불러와. 난 연주 못해."
미친왕은 악기하고는 도무지 친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건 역시 라오허가 전문이었다.
"정말이지... 되었다. 짐이 하마."
그 반응에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푸욱 내쉰 황제는 궁녀들에게 시켜서 악기를 가져오게 시켰다.
공후를 들고 온 궁녀가 황제가 연주할 자리를 마련하자 황제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연주를 준비했다.
띵.
가볍게 현을 건드려본 황제가 곧 연주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처음엔 조금 어색한 손동작이긴 했지만, 황제는 금세 능숙해져서는 금방 미친왕의 귀에도 익숙한 음색을 뽑아냈다.
"이건..."
미친왕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건 아버지가 평소 즐겨 듣던 음악이었으니까.
맑고 청아한 음색이 이곳에 울려 퍼졌다.
참으로 능숙한 솜씨였다.
미친왕은 오랜만에 연주하는 형님의 모습이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라울 정도로 익숙하고, 어딘지 모르게 그립기까지 했다.
'그러네...'
생각해 보니 애초에 이 백몽가(魄夢歌)는 형님이 악기를 다루는 법을 배우고 처음으로 연주했던 곡이었다.
그 장휘량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며 지은 곡으로 유명한 곡이기도 했다.
'여전히 잘하네.'
새삼 형님은 못 하는 게 없구나.
미친왕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형님은 연주에 집중하느라 모르는 눈치였지만 궁녀들이 어느새 가만히 서서는 그 연주를 들으면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이해했다.
그만큼 형님의 모습은 멋있고 매력적이었으니까.
"휘유! 형님! 멋지십니다. 여심을 울리시네요."
"...개소리 지껄일 시간은 있나 보구나."
뭔 헛소리지?
황제는 그런 생각 하면서 연주를 끝냈다.
그러고는 멍하니 있던 궁녀들에게 공후를 돌려주고는 미친왕에게 말했다.
"이만하면 되었겠지. 슬슬 돌아가자. 바람이 차다."
미친왕의 손이 추위로 붉어진 걸 확인한 황제가 그리 말하면서 장갑을 던져 주었다.
"고마워. 털실로 짠 거네? 누가 만든 거야?"
딱 봐도 정성스럽게 짠 흔적이 보였기에 미친왕이 장갑를 끼면서 묻자 황제가 대답했다.
"황태후께서."
"아하, 난 형님의 비가 만든 건 줄 알고 걱정했잖아."
형님 쓰라고 비들이 만든 걸 쓸 정도의 배포는 없었기에 미친왕이 그렇게 말하면서 안심하자 황제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으면 네놈한테 안 준다."
"어후, 뜨거워라. 겨울인데도 덥네. 벌써 여름인가?"
호들갑을 떠는 미친왕의 머리에 혹을 만들어 준 황제는 단호하게 말했다.
"머리를 다치고 나서 헛소리를 하거라."
"으으으..."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혹을 어루만지는 미친왕을 데리고 황제는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와 형제들의 최후는 솔직히 좋다고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민아. 우리는 저리 되지 말자."
"...엉? 어, 어."
이제 그 수가 얼마 남지도 않은 우리 형제는 저런 결말을 맞이하지 말자.
황제는 그리 말하고 있었고 미친왕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황제는 결국 다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저런 멍청한 표정이라니.
자신과 비슷한 얼굴로 그런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으니 황제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널 보면 웃겨서 미치겠구나."
"내가 광대야? 취급이 진짜 너무하네."
그 반응에 미친왕은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황제의 뒤를 따랐다.
"끝났어?"
한숨 자고 왔는지 머리가 완전히 붕 떠 있는 라오허가 뒤늦게 합류하면서 느긋하게 하품하자 황제는 그 머리를 수기로 가라앉혀주고는 대답했다.
"그래. 식사나 하자. 카무란은?"
"나 자고 막 와서 모르겠는데?"
"제사는 끝났습니까?"
그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카무란이 느긋하게 걸어오면서 물었다.
"그래. 식사는 했느냐?"
"적어도 식사는 같이 해야죠. 제가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습니다."
카무란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상선에게 식사를 준비해 두라고 시킨 월화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그곳에서 식사할 생각이었으니까.
"이번 합궁은 만주족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태학정 어르신의 동생이라지요?"
카무란이 황제를 따라 걸으면서 바로 근황에 대해서 물어오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학정에게 물어보니까 소식이 짐보다 늦더구나."
"엥? 친동생 일인데? 그게 말이 돼?"
라오허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면서 되묻자 황제가 피식 웃었다.
"모를 수도 있지. 나도 친동생이 독 넣기 전까진 몰랐으니까."
"아하하. 형님? 그... 말에 가시가 있으신데?"
그 말에 미친왕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하자 황제가 바로 대꾸했다.
"음식에 독이 있는 것보단 낫지 않느냐."
"아하하..."
완전히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로 이 겨울에 땀까지 뻘뻘 흘리는 미친왕을 보면서 황제는 가볍게 말했다.
"반응을 보니 이젠 양심은 생긴 거 같아서 참으로 안심이 되는구나."
"그러게 철들었다야. 대단한 놈이야. 저거."
라오허가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질을 하자 카무란은 난처한 미소를 짓고는 그저 미친왕을 안쓰럽게 볼 뿐이었다.
처음부터 황제한테 굴복한 라오허나, 처음부터 중립을 표방한 카무란과 달리 미친왕은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이런 화제로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을 뿐이었다.
"적당히 놀리거라."
그걸 보면서 황제가 조금 제지하자 라오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대단한 강아지 납셨어. 충견이야. 충견."
미친왕이 반격을 위해서 라오허를 바로 비꼬자 라오허가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넌 그럼 뭐냐. 맹견인가? 아니 미친 짓을 했으니까 광견인가? 광견주의라도 붙여 줘?"
"..."
완패였다.
애초에 이번엔 가진 무기에서 차이가 났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사이가 좋군.'
황제는 그런 둘을 보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둘은 예전부터 사이가 저리 좋으니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물론... 그런 황제의 생각을 둘이 알았다면 발작을 했겠지만...
황제는 애초에 저렇게 유치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이가 좋다는 가장 좋은 증거로 생각했다.
언제든 싸울 수 있는 사이라는 건...
반대로 말하면 언제든 화해할 수 있는 사이라는 뜻이니까.
황제는 앞으로도 형제들의 관계가 이토록 원만하면 좋겠다는 생각했다.
그래야...
지금은 지옥에서 아버지 앞에 설 용기가 나지 않지만...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고개를 숙인 채 아버지 앞에 설 수 있을 거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