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흑마 부대로 배치된 이휘라고 합니다."
도열해 있는 병사들 앞에서 선 아직 청년이라고 부르기도 곤란해보이는 소년이 차분한 어조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이는 이제 지학을 좀 넘겼을까?
솔직히 이런 전장에 올 정도의 나이는 아니다. 게다가 그 부대가 사실상 문제아들을 모아둔 부대라면 더더욱.
'이렇게 어린 애가 전장에 오다니...'
할바르는 그런 생각하면서도 일단 이 신입을 소개했다.
"이번에 이곳으로 배정된 신입이다. 모두 환영해주도록."
"와우! 잘생겼는데? 애인은 있어?"
바로 아비가 관심을 보였다.
이번 신입의 검은 머리는 비단처럼 고왔고, 검은 눈동자는 차분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순간 이목을 집중시키는 잘생긴 얼굴, 몇 안 되는 여자 병사들은 전부 이번 신입에게 관심을 보였다.
"없습니다."
신입의 대답에 몇 명이 환호하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신입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저 문제아들하고 선 넘지 마라. 인생 피곤해질 녀석들이거든. 좋은 여자를 만나. 너희들도 기대하지마! 우리 막내가 네놈들한테 가당키나 하니?"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산적 같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우우! 그럼 우린 나쁜 여자란 이야기인가요?"
아비가 그 말에 바로 반발하자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 온 문제아들이 그럼 좋은 년이겠냐? 꿈 깨 이것아. 아무튼 이제부터 내가 네 사수다. 할 일만 제대로 하면 딱히 불편한 점은 없을 거니까 안심하고."
남자는 신입을 향해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노빈손. 그냥 빈손 형님이라고 불러도 좋아."
"빈손 말입니까?"
그 빈손인가? 신입이 그런 생각하면서 물었고, 빈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같은 놈들이 한자를 알겠냐? 그냥 뭐라도 집어먹으면서 살라고 부모님이 주신 이름이지. 죽을 때도 빈손으로 가진 마라. 멋진 이름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빈손을 보면서 신입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뜻에선.
"좋은 이름이네요."
제법 좋은 이름이었다.
그 말에 빈손의 기분이 확 좋아졌다.
"이야, 뭘 좀 아는데? 세르나! 드디어 막내 탈출이네?"
그 말에 세르나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신입! 세르나 누님이라고 불러도 괜찮아. 그리고 오늘 빨래는 네가 하는 걸로."
"개소리 말고 네가 해라? 우리 막내는 오늘 나랑 막사 돌아볼 예정이거든? 가자 막내야."
자연스럽게 일을 떠넘기려는 세르나의 머리를 때려 준 빈손은 가만히 서 있는 신입에게 말했다.
"앞으로 방도 나랑 같이 쓰게 될 거고, 전장에서는 불침번도 나와 같이 서게 될 거다."
"네."
빈손의 말에 휘가 대답하자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대답은 시원시원해서 좋네. 신입은 여긴 왜 왔어? 사람 죽여 본적은 있어?"
"네."
"...그 얼굴로 태연하게 그런 말을. 무섭네."
죽여본 적이 있다는 휘의 대답에 빈손이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하긴... 애초에 그런 경험도 없는 놈이 이곳으로 배치될 일은 없겠지.
빈손은 그리 생각하면서 대충 기억해야 할 놈들을 설명했다.
"일단 할바르 백부장님은 알테고... 저기 저 덩치 큰놈 보이지? 대흘이란 놈으로 나 다음으로 짬이 되는 녀석이야. 방금 너한테 말을 건 아비와 동기면서 동향 사람. 내가 볼땐 둘이 사귀고 있어."
활을 정비하는 덩치 큰 남자를 가리키며 그렇게 설명한 빈손은 계속 걸으면서 다른 놈들도 소개했다.
"그리고 저기 뒤에서 무게 잡는 새끼 보이지? 비천이란 놈인데 뒷골목 출신이야. 말 안 들으면 암기가 날아올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진짜 한 번 날려 줘? 막내한테 나 음해하지 마."
비천이 바로 반박해왔으나 빈손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저기서 허수아비 치고 있는 놈은 료라이. 그나마 믿을 수 있는 놈이니까 참고하고..."
저기서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무리하는 놈은 황보철궁, 백부장하고 잡담하는 녀석이 한울... 그런 식으로 설명하던 빈손의 시선이 한참 투덜거리면서 빨래를 하는 세르나에게 닿았다.
"저 조막만한 녀석이 바로 세르나. 우리 중에서 제일 연약할걸?"
"아씨! 진짜 한 번 뜰래요?"
세르나가 발끈하자 빈손은 바로 손에 기를 피어냈다.
"대신 너 죽는다?"
"...아! 빨래 해야지, 다음에 붙어요."
바로 도망치는 세르나를 보면서 빈손이 피식 웃었다.
"저런 놈이야. 아무튼 모두 나쁜 놈들은 아니야. 이상한 놈들은 맞지만. 뭐..."
빈손의 눈이 휘를 향했다.
"문제아들이라는 거지."
"...그렇군요."
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한참을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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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출정이네. 긴장한 건 아니지?"
그렇게 막내가 들어오고 제법 시간이 흘렀다.
출정 명령이 내려와 모두가 준비하고 있는 지금.
빈손은 여유롭게 검을 닦으면서 휘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래, 그래. 우리 막내 든든하네."
그 대답에 빈손은 기분 좋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신입의 활약은 놀라웠다.
힘들기로 유명한 흑마 부대의 훈련을 전부 낙오되지 않고 따라왔고, 사람들과도 나름대로 잘 어울렸다.
부대 일도 잘해서 할바르 백부장도 아끼는 모범 병사였다. 문제아들만 모인 이곳에서 그래서 더 눈에 띄는 녀석이라고 해야 하나?
빈손도 이 부사수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업무도 금방 배우고, 무엇보다도...
강했다.
"막내만 믿고 간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빈손이 달라붙자 휘는 그런 빈손을 뗴어내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한심한 소리는 하지 마세요. 빈손 형님."
"난 너무 나약해서 보호가 필요하다고."
엄살을 부리는 빈손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휘는 군장 정리를 끝내고는 말했다.
"그러면 군장도 제가 대신 매드립니까?"
"그래 주면 정말 고맙..."
따악!
"저 녀석 엄살을 너무 받아 주지 마라. 버릇 나빠지니까."
어느새 다가온 대흘이 그런 빈손의 머리를 후려치고는 휘에게 말했다.
"죽을 수도 있는 곳이다. 각오는 단단히 해 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그 대답에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대흘은 빈손의 귀를 잡고는 질질 끌고 가며 말했다.
"상등병사들은 전부 집합이다. 따라와."
"윽! 부사수는! 부사수는!"
"상등병사만이라고. 네 귀는 장식이냐?"
서로 투닥거리면서 저 멀리 사라지는 둘을 보면서 휘가 다시 군장을 풀고, 새로 정리하고 있을 때 바로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막내야! 첫출정이지? 살인은 해봤어?"
"세르나 선배.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휘가 세르나를 보면서 공손하게 말을 걸자 세르나는 흐뭇해했다.
"그래, 선배. 헤헤. 내가 선배지? 아무튼 살인은 해봤어? 손 떨면 못 지켜 준다?"
능청스럽게 다시 묻는 세르나에게 휘는 덤덤하게 말했다.
"손에 피 냄새가 날 정도는 했습니다."
킁킁.
"그 정도인가?"
휘의 손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던 세르나는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곱상한 얼굴로 제법 험하게 살았나 보다? 너?"
"심심하십니까?"
그런 세르나를 힐끔 본 휘가 묻자 세르나는 숨기지 않았다.
휙!
목검을 던져 준 세르나는 휘가 그걸 가볍게 잡아내자 당당하게 말했다.
"대련하자! 이번엔 안 진다고!"
"..."
휘는 목검을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쉬고는 자세를 잡았다.
"후회하실 겁니다."
그 말에 세르나는 잠깐 움찔했다.
애초에 막내는 현재 아무한테도 진적이 없다.
물론 상등병사들과 붙어본적이 없긴 하지만... 병사들 중에선 상등병사 중에서도 적수가 없을 거 같단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럼 간다!"
퍼억!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호기롭게 달려들던 세르나의 목검이 부러지고 휘의 발차기가 정확히 세르나의 복부에 박혔다.
"커헉!"
"정말이지... 의무실 다녀오겠습니다."
쓰러진 세르나를 보면서 한숨을 쉰 휘가 세르나를 들쳐 메고는 다른 병사들에게 말했다.
"봤냐? 방금 검?"
세르나를 들고 사라지는 막내의 모습을 보던 병사 한 명이 멍한 얼굴로 묻자 다른 병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보이지도 않았다.
실력만은 상등병사들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진 않는다고 평가 받던 세르나가... 애초에 반응조차 못할 정도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어디서 저런 괴물이 갑자기 들어온 걸까?'
병사들의 머리엔 그런 의문이 피어올랐다.
아무리 봐도... 막내는 평범한 병사는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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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사령관님께서 우릴 슬슬 치우고 싶은 모양이다."
할바르의 말에 이곳에 모인 상등병사 10명은 집중했다.
"우리 흑마 부대는 적지로 들어가서 정찰 업무를 진행한다. 기한은 복귀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사실상 죽으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대흘의 말에 할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사실상 사령관은 흑마 부대에게 적지로 들어가 뒤지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 그런데 그렇다고 안 갈 놈은 있냐?"
"..."
모두가 침묵했다.
그들은 군인이었다.
아무리 불합리한 명령이라도 명령 불복종은 있을 수 없었다.
하물며 그 뒤에 있는 게 국경 방위 사령관이면 더욱.
"뭐, 까짓거 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예 거기 눌러앉죠?"
여전히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거 같은 빈손의 장난스러운 말에 할바르는 한숨을 쉬었다.
"웃음이 나오냐? 야만족의 전사 중에서 강한 놈들이 몇이나 되는데. 작정하고 그 새끼들이 지들 터전에 진을 친 우리를 치면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음, 지형 이점도 제대로 못 받을 테니까 사흘?"
빈손의 태연한 대답에 할바르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느꼈다.
사흘? 사흐으으을?
"미친 놈아. 10만은 기용할 여력이 되는 야만족 상대로 백여명 정도 되는 우리가 무슨 수로 사흘이나 버티냐. 어? 하루라도 버티면 기적이야. 미친 놈. 진짜 미친 놈. 정신이 나간 놈이라고는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미친 놈인지는 몰랐어!"
아비 역시 비슷한 생각하는지 바로 욕설을 내뱉었다.
할바르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주는 아비를 보면서 간신히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버터야 하는 건 사실이지요."
그 와중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은 대흘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고, 한울 역시 공감했다.
"일단 지형부터 제대로 선점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정찰보단 생존에 중점을 두고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울의 말에 료라이가 바로 지도를 펼쳤다.
"고지대에 강물이 흐르고 있어서 식수 보급도 원활하고, 이곳이 최선이지 않을까요?"
료라이의 말에 할바르는 지도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본대에서 보급을 받아오기도 적당한 거리군. 보급을 받아올 수 있는 상황일 때의 이야기지만."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지만 어찌 되었든 할바르는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쓰레기 같은 놈. 부하를 죽일 생각만하고, 모용가만 아니었어도 오르지도 못할 자리에 있는 개새끼.'
사령관에 대한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할바르는 이 문제아들을 한 명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보니 할바르는 문득 한 친구가 떠올랐다.
그 녀석이... 있었다면 살릴 수 있을까?
리처드가 있었다면... 걱정하지 않았을 거다.
이 문제아들을 전부 살릴 수도 있었을 테지.
그만큼 리처드는 강했고, 이 흑마 부대의 병사들 수준도 다른 부대의 병사들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최고의 정예병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엔 리처드가 없다.
아무리 강병이라도, 아무리 정예병이라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리처드 같은 숫자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괴물이 없는 이상 말이다.
'적어도...'
설령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아서 최악의 상황에 빠지더라도.
이 부대에서 가장 어린 휘와 세르나 정도는 살리자.
할바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상등병사들과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