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족에서도 유명한 명가라고 하면 모두가 백가를 말할 것이다.
그 유명한 유학자 백기와 그림을 그리면 그 안에 있는 것이 살아서 튀어나올 정도였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화백 백문휘가 바로 그 백가 출신이었으니까.
그런 백가에서도 최근에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젊은 화백이 바로...
"백하연이라는 거죠."
신난 얼굴로 떠드는 엘리자베르를 보면서 귀려는 대충 호응해주었다.
"흐응, 그렇구나."
"놀랍지 않나요?"
엘리자베르는 귀려에겐 영 호응이 없자 실망한 표정을 짓고는 아네스를 보았다.
"그 정도 화백이면 폐하의 초상화도 잘 그릴까요?"
"..."
그러나 아네스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녀의 화풍이나 실력이 아니라 오로지 페하의 초상화를 잘 그릴 수 있는지였다.
"으음... 레오니는?"
결국 아네스에게서도 원하는 반응을 얻지 못한 엘리자베르가 마지막 희망이라는 듯이 레오니를 보았지만...
"미안. 곧 점심 구보 시간이라."
시계를 보고 있던 레오니가 덤덤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근 레오니는 같이 운동하는 비들하고 함께 금위대 훈련받고 있었다.
그런 걸 왜 하는 건지 솔직히 엘리자베르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여, 열심히 해."
그래도 열심히 하는데 뭐라고 하기도 그랬기에 그저 응원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그 사람 이야기는 갑자기 왜 하는 걸까요? 우리 울보는?"
아네스가 의문을 표하자 엘리자베르가 바로 호들갑을 떨었다.
"나르타 씨한테 들었는데 이번 합궁 상대가 바로 그 사람이래."
"그래? 근데 황제도 피곤한 일이구나... 벌써 여자가 몇 명이야? 다 외우기도 힘들겠다. 그치?"
가만히 차를 마시고 있던 세이나에게 귀려가 조금 질린 표정으로 말을 걸자 세이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게요. 확실히 밤에 일을 하다 보면 피곤하실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워낙 바쁘셔서 자신을 안아주지 않는 것은 조금 서운했지만.
그래도 세이나는 그런 황제를 이해해주고 싶었다.
"그, 그런가요? 남자는 그런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요."
세이나의 말에 엘리자베르가 무슨 상상을 했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 답하자 아네스가 느긋하게 말했다.
"제국에선 이런 걸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하던가요? 과하면 오히려 부족함보다 못하답니다."
아네스가 짐짓 아는 척을 하자 엘리자베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대답했다.
"정작 아네스는 해 보지도 못했으면서... 아는 척은."
"어머나. 지금 선전포고하신 건가요? 전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답니다?"
꾸욱. 꾸욱.
엘리자베르의 말랑말랑한 볼을 마구 늘리면서 아네스가 화를 내자 귀려는 그 모습을 보며 재밌다는 듯이 웃었고, 세이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그런 둘을 말리려고 애를 썼다.
"그보다 원래 비라는 자리가 이런 거야? 뭔가 엄청 자유롭지 않아?"
간신히 둘의 싸움을 말리고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귀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듯이 말했다.
생각해 보면 자신도 비가 되고 나서 딱히 뭔가 의무같은 게 생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유로웠다.
당장 저기서 달리고 있는 여화 비나 레오니 비 같은 사람들을 보면 운동도 하고 금위대 훈련에도 참여하고 있었고, 미령 비는 아예 문관 일하고 있었으며, 달리아와 가비란 사람은 사냥을 간다고 멋대로 자리를 비우는 데 오히려 백부장을 호위로 붙여주었다.
키야란 사람은 얼굴도 못 봤지만 전국 유람을 떠난다니까 보내주었다고도 하고... 케르 비는 벌써 며칠 보이지도 않는데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들은 바로는 그 누구지? 수박족의 비와 딩키족의 비, 그리고 악골족의 비랑 같이 묘왕국으로 놀러갔다던가?
그 밖에도 공방에서 맨날 예산을 타가는 비들도 있다고 하고, 황궁에 아예 마법 연구실을 만든 대마법사에... 주술 서적을 모으는 비, 주방에서 매일 요리하는 비들까지.
대충 귀려가 들어도 엄청 여기저기서 예산을 쓰고 있는데 황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런가? 황제의 비라는 위치에 있는데도 생각보다 너무 자유로운 느낌이 들어서 귀려는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대단하죠?"
"나도... 점집 같은 거 만들어달라고 하면 들어 줄까?"
세이나가 자신이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하자 귀려는 작게 중얼거렸다.
"점! 그러고 보니 귀려 씨는 유능한 점술가셨죠? 혹시 제 점을 봐주실수 있나요?"
"응?"
귀려는 갑자기 흥분한 얼굴로 눈을 반짝거리는 아네스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야 그렇긴 한데... 왜? 점에 관심 있어?"
끄덕. 끄덕.
그 질문에 아네스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귀려가 조금 신이 나서는 바로 수정구를 꺼냈다.
"사실 내 점은 엄청 비싼 점인데 말이야. 특별히 궁에서 사귄 친구니까 무료로 해 줄까? 무슨 점을 윈해? 건강? 아니면 금전? 그것도 아니면..."
"궁합점이요! 저와 폐하의 궁합점을 보고 싶어요!"
눈에서 불똥이 튈 거 같은 얼굴로 말하는 아네스를 보면서 귀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궁합점 말이지? 쉽지. 그건."
솔직히 재료만 있으면 그렇게 어려운 점은 아니다.
귀려는 차분하게 황제와 아네스의 생일을 듣고는 아네스의 머리카락을 하나 뽑아서 예전에 뽑아두었던 황제의 머리카락과 엮었다.
"폐하의 머리카락은 왜 있나요?"
"쉿! 넘어가."
세이나가 의문을 표했지만 귀려는 말을 돌렸다.
차마 자신과 황제의 궁합점을 위해서 몰래 뽑았다는 것은 아무한테도 알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걸 이렇게 태우면... 보인다."
가벼운 화염 주술로 그것을 태운 귀려는 그곳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수정구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어디? 어디요?"
아네스가 수정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으나 당연히 귀려에게만 보이는 것이었기에 안 보이는 게 당연했다.
"나한테만 보이는 거야. 어디 보자... 물과 물고기? 엄청나게 궁합이 좋은 거 같은데?"
생각보다 훨씬 좋은 조합이 나왔다.
그렇기에 귀려의 얼굴이 조금 불만스러워졌다.
"와아! 그런데 왜 귀려 씨는 표정이..."
"...왜. 아무튼 잘된 일이잖아."
기뻐하던 아네스가 그런 귀려의 반응에 의아한 얼굴로 묻자 귀려는 툴툴거렸다.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점괘에서는 황제와 자신의 궁합이 평범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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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들이 없으니까 뜻밖에 심심하구나.'
마리아는 무료한 얼굴로 연구실에서 시약을 툭툭 두드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매일 찾아와서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조를 땐 귀찮았는데 막상 일 때문에 떠났다고 하니까 심심한 기분이었다.
'황태후도 없고.'
이럴 땐 황태후를 찾아가서 장난이라도 치면 될 텐데 하필이면 황태후도 요양 겸 저 먼 온천 지대로 여행을 떠난 참이었다.
나르타와 세헤라자드는 둘이서 요가를 하는 모양인데 마리아는 오늘은 영 운동도 끌리지 않았다.
"심심하구나. 참으로 심심해."
슬슬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자기 배를 어루만지면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렇게 심심할 때면 더욱 이 아이가 얼른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나와서 이 어미한테 기쁨을 주면 좋을 텐데..."
아들이던 딸이던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이 아이가 마법사의 재능을 타고 나는 것.
그것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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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은 처음 보았지만 참으로 아름답네요."
크라이스는 자기 안내를 받으면서 황궁을 둘러보던 그녀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하자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은 제국의 정수가 담긴 곳. 그 아름다움은 제국 제일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과연..."
크라이스의 자부심이 깃든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런 자부심을 느낄만한 곳이었다.
"당장이라고 도화지에 그리고 싶은 광경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하, 합궁 후에는 얼마든지 그리셔도 됩니다. 원하는 화구가 있다면 이 대륙을 뒤져서라도 제가 구해 오겠습니다."
"정말입니까?"
반짝.
그 대답에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이렇게 적극적인 모습이라니? 이곳에 오면서도 얌전한 반응만 보여주던 그녀였기에 그 반응은 더욱 놀라웠다.
"붓도 좀 더 이 정도 크기에 작은 붓이 필요한데요. 그리고 염료도 기왕이면 투르크의 염료를 구할 수 있을까요? 그곳의 염료가 좋아서요. 또... 아산에서 구할 수 있는 먹이 그렇게 좋은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지, 진정하세요."
쉬지 않고 요구사항을 쏟아 내는 그녀를 보면서 크라이스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 모습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안경을 고쳐 쓰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해 버려서..."
"아, 아뇨. 열의가 대단하시군요. 반드시 내일까지 전부 구해 두겠습니다. 요구사항이 있으면 적어 주세요."
"내일이요? 세상에! 과연 제국이군요."
엄청난 속도다.
그녀는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걸릴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하하, 마법부대는 장식이 아닙니다. 저희 마법부대는 주술부대와의 협력으로 대륙 어디라도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했으니까요."
자부심이 느껴지는 크라이스의 말대로 최근 금위대의 마법부대와 주술부대는 콰오콴의 주술을 응용하고 마법과 결합하여 이 대륙 어디든 하루 만에 이동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냈다.
이 대륙 어디든, 알려진 곳이라면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그거 정말 대단하네요."
그녀의 감탄에 크라이스는 만족스럽게 웃고는 슬슬 도착한 별궁에 그녀를 맡겼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크라이스 마법부장. 이만 돌아가도 좋습니다."
미령은 안경을 가볍게 고쳐 쓰면서 크라이스를 돌려보내고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환영합니다. 백하연 비 후보. 저는 페하의 합궁 상대를 관리하는 일을 맡은 박미령이라고 합니다."
그 소개에 잠시 눈을 꿈뻑거리던 백하연이 바로 반가운 얼굴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미령 비 전하께서 직접 이렇게 봐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꾸벅.
공손하게 인사한 백하연이 안경을 고쳐 쓰면서 그녀를 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은 마치 그녀를 평가하고 있는 듯 했다.
생각해보면 둘 다 안경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미령에게선 사무적인 딱딱함이 느껴진다면 백하연에게는 예술가 특유의 종잡을 수 없는 분위기 풀풀 풍겼다.
"손에 묻는 건 먹일까요?"
"네, 방금까지 작업을 하고 있었던 터라. 그보다 아름다우시네요. 언젠가 한 번 당신을 그림으로 그려도 될까요?"
기본적으로 화백이란 자들은 미인을 사랑한다.
그런 점에서 미령은 하연의 기준으로 봐도 그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상관없습니다."
"좋습니다. 벌써 기대가 되네요."
그 대답에 하연은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처음 본 비부터 이런 미인이라면 그녀는 벌써부터 그릴 게 많아서 기대가 되었으니까.
"페하께서 엄청난 미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천하의 절색이요. 천신의 걸작이라고."
그런 점에서 사실 그녀는 황제에게 관심이 많았다.
정말 그 소문대로의 미인이라면.
한 번 그것을 화폭에 담아보고 싶은... 그런 순수한 욕구가 그녀에겐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