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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188화 (188/235)

"네, 잘하고 있사옵니다. 그런 식으로."

별궁 안에서 몸에 부담이 가지 않을 정도로 운동하고 있던 나르타는 친절한 세헤라자드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몸을 풀어 주고 있었다.

"마리아 씨도 같이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나름 기분 좋게 땀을 흘린 나르타가 물을 마시면서 말했다.

세헤라자드도 그 부분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운동을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르테가 씨가 없으니까 뭔가 조용한 느낌이 드옵니다."

"그러게요. 역시 같이 갈 걸 그랬을까요?"

나르타는 황태후와 같이 여행을 떠난 오르테가를 떠올리면서 아쉬워했다.

그녀들도 제안을 받기는 했지만 어의들이 장거리 여행을 추천하지 않았다.

용인이 아닌 그녀들에겐 너무 먼 거리의 여행은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쉽사옵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분명 다 같이 여행하면 즐거웠을 텐데...

세헤라자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운동은 이쯤에서 끝내고 같이 차라도 마실까요? 마침 좋은 차를 하나 받았답니다."

나르타의 제안에 세헤라자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새로운 비 후보께서 오신 거 같던데요. 어떤 사람일지 정말 기대가 된답니다."

이번에는 어떤 사람일까?

나르타는 그런 기대를 담은 채 그녀와 만나볼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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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르타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새로운 비 후보.

백하연은 지금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서 손에 묻은 먹을 지우고 있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느긋한 하연의 말을 들으면서 궁녀는 묵묵히 할 일을 했고, 하연은 얌전히 그녀들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언제쯤 폐하를 볼 수 있을까요?"

하연의 질문에 미령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원하신다면 지금 주선해볼까요?"

"으음... 아뇨. 어차피 오늘 안에 보는 건 확실하니까요."

그렇게 대답한 그녀는 눈을 감고는 황제의 모습을 멋대로 상상해 보았다.

어떤 사람일까?

이목구비는 어떻게 생겼고, 머리는 어떤 모양일까? 키는? 근육이 많은 편일까? 아니면 적은 편일까?

그림을 그릴 땐 어떤 먹을 쓰는 게 좋을까?

송연먹? 아니면 유연먹? 어느 쪽이 어울릴까?

염료는 어떤 걸 쓰는 게 나을까?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갈 정도였다.

"음?"

하연이 상념을 끝내자 어느새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새하얀 한복을 입고 머리는 단정하게 정리된 그녀는 자기 몸에서 풍기는 장미향에 놀라면서도 순순히 눈을 감고는 처소에서 황제를 기다렸다.

모습을 보니까 준비는 다 끝난 거 같았으니까.

'누가... 오네요?'

그때 그녀는 이곳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드륵.

가볍게 문이 열리면서 그 발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잔뜩 기대하면서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그토록 소문이 자자한 황제를 실제로 보게 되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역시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신비한 금안.

그녀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느꼈다.

소문은 과연... 거짓이었다.

이번 황제가 천하의 절색이라는 말조차도... 그녀에겐 부족하게 느껴졌으니까.

알 수 없는 충동을 느끼면서 하연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기... 종이를 써도 될까요?"

"...음?"

황제는 자기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종이를 찾는 여인을 보면서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비도... 아무래도 멀쩡한 비는 아닌 듯했다.

--

"황태후 폐하! 황태후 폐하! 저기 봐요! 잉어가 있어요!"

호수에 얼음 밑에서 얌전히 겨울을 보내는 잉어를 가리키면서 오르테가가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이 참으로 귀엽다 생각하면서 황태후는 그녀를 따라서 걸었다.

"이곳도 꽤 좋구나. 온천도 마음에 들고."

"마음에 드셨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런 황태후의 중얼거림을 들은 흰머리가 성성한 중년의 여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백가의 비탕이라더니 과연 명문가의 비탕은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황태후는 그런 여인을 보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방금까지 몸을 담그고 있었던 온천은 확실히 피부가 좋아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좋았다.

"그보다 오늘이군요. 부족한 제 딸이 폐하께 누라도 끼치진 않을지..."

황태후를 향해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바로 황태후가 머무는 가오솬 지방에서 오랜 세월 그 위세를 떨쳐 온 백가의 수장으로 현재 황제의 합궁 상대로 떠난 백하연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대는 걱정이 너무 과한 것이 문제란다. 그보다 오르테가. 너무 그렇게 움직이진 말 거라. 이젠 혼자의 몸도 아니잖니?"

황태후는 백하연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조금 엉뚱하긴 하지만 그래도 예의를 아는 참한 처자였다.

그렇기에 황태후는 걱정하지 않았다. 당장 저기서 눈을 본 강아치처럼 신을 내고 있는 오르테가조차도 실수하지 않았으니까.

"네!"

하여간... 대답은 시원시원하다니까.

황태후는 그런 생각하면서도 더 제지하진 않았다.

'유력한 황후 후보 중에 한 명이라는 자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물론 아쉬운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유력한 황후 후보는 네 명.

나르타와 세헤라자드, 그리고 오르테가와 정말 내키지 않는 한 명.

전부 딸일 확률도 있겠지만... 그럴 확률은 그리 높지 않으니 분명 넷 중에서 황후가 나올 확률이 높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황태후는 그 한 명만 빼면 누가 황후가 되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싫지만.'

물론 그것은 개인적인 이유,

사실 황태후도... 그녀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능했고, 아름다웠으며,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비들 중에서 단연 연장자로 많은 사람의 지지도 받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황상의 주변엔 참으로 뛰어난 이들이 많아졌다.

믿을 수 있는지는 아직 확인해 봐야겠지만...

황태후는 요즘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좋은 일만 일어나서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친왕은 정신을 차렸고, 황상의 주변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당신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무문제를 떠올리면서 황태후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이럴 때마다 그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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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쉽네요."

황제의 거절에 그녀는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다짜고짜 그림이라니... 이 밤에 말이냐."

"이런 건 딱 영감을 받았을 때 그리는 게 더 좋거든요. 정말 아쉽습니다."

여전히 아쉬워하면서도 붓을 만지작거리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황제는 결국 기권을 하고 말았다.

"하... 그래 그럼 그려보거라."

"감사합니다!"

백하연은 그대로 단정한 자세로 정좌하고는 바닥에 종이를 펼쳤다.

그러고는 가볍게 먹을 갈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그녀가 먹을 가는 소리가 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차분한 소리가 황제는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뜻밖에 나쁘지 않구나. 가만히 있으면 되느냐?"

그래서 그런지 황제의 반응도 훨씬 너그러워졌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황제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편하게 있으셔도 괜찮습니다. 그 움직임조차도 영감이 되니까요."

"흠..."

생각보다 편한데?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가만히 그녀를 감상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황제를 감상하는 것처럼. 황제도 그녀를 감상하고 있었다.

먹을 다 간 그녀가 작은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붓이 움직일 때마다 선이 만들어지고, 그 선이 늘어갈수록 그림이 완성되기 시작했다.

황제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녀의 그림을 구경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 순간이 황제에게는 오히려 그림 같단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하연은 그런 황제를 마찬가지로 구경하면서 그림을 완성해나가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리고 또 그려도 계속해서 그리고 싶은 소재가 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한 번 그린 대상에는 딱히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서는 다시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같은 대상을 그린 작품이 없는 화백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더욱 신기한 일이었다.

몇 번을 봐도 다시 보고 싶고, 몇 번을 그려도 질리지가 않는 존재가 있을 거라고는 그녀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에.

"신기합니다."

하연은 완성된 그림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자기 그림에 불만스러울까?

이 부분은 좀 더... 아니 여기에서 좀 더 묘사를 섬세하게 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

자꾸만 아쉬운 점이 눈에 보였으니까.

그림이 원본을 전혀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아쉬운 걸까요. 제 실력에 이렇게 불만스러웠던 적은 없었는데..."

"잘 그린 것이 아니냐?"

황제는 의아했다.

물론 황제도 어느 정도 그림을 배우긴 했다. 그런 황제의 눈으로 봐도 그녀의 그림은 딱히 흠잡을 구석이 전혀 없었다.

"모르시는 겁니까? 당장 여기 이 눈밑도 어색하고, 여기 속눈썹도 좀 더 짧고... 얼굴 선도 좀 더..."

장황하게 자기 실수를 지적하는 그녀를 보면서 황제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세세하게 말해 봐야 짐은 감이 오지 않는구나."

"아, 죄송합니다. 흥분해 버려서..."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사과하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만큼 그대가 그것에 진지하다는 것이 아니냐. 오히려 잘 모르면서 선뜻 말한 짐의 잘못이 더욱 크겠지."

황제는 그리 말하면서도 그녀가 완성한 그림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사실적인 그림으로 자신을 살펴보니 참으로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흐음, 짐이 이렇게 생겼나? 거울을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이구나."

화아악.

당사자가 앞에서 그림을 평가해서 그런가?

아니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하연은 막상 황제의 평가를 면전에서 듣고 있으니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그녀는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저기..."

"?"

그녀가 조금 진정해서는 황제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제가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 그녀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얼굴을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도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이번 부탁은 어떤 의미에선 참으로 들어 주기 쉬운 부탁이었다.

"얼굴 뿐이겠느냐."

황제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먹으로 더러워진 그 손을 잡자 황제의 손도 더러워졌으나 황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그 손을 자기 얼굴로 가져갔다.

"다른 것도 만져도 되는 시간이거늘."

화아악!

그 가벼운 행동에 그녀의 얼굴이 그야말로 홍당무처럼 변해 버렸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으니까.

자신이 지금... 눈앞에 있는 황제와 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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