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놀러 온 거야?"
황제가 이희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황실에 있는 온실이었다.
온실은 아직 2월임에도 불구하고 꽃으로 가득했고, 그 안에서 오르테가가 가지를 칠 때 쓰는 가위를 든 채 황제를 반겼다.
행색을 보아하니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이곳에 와서 가지를 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네! 놀러 왔어요."
이희가 해맑게 웃으면서 오르테가에게 대답했다.
그런 이희에게 반갑게 인사해준 오르테가는 가위를 놓고는 바로 황제에게 다가와서 안겼다.
꼬옥.
"그보다 다녀왔어! 오늘은 쉰다면서?"
꼬리가 달려 있다면 흔들고 있을 거 같은 오르테가를 보면서 황제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서 대답했다.
"그래, 그보다 여기 관리를 왜 네가 하고 있지?"
황제의 질문에 오르테가는 그제야 황제를 놓아주고는 다시 가위를 들면서 대답했다.
"음, 취미? 사실 심심할 때마다 내가 와서 관리하고 있었거든. 여행 끝나고 돌아와서 관리가 부족한 부분에는 조금 손을 쓰고 있었어."
그렇게 말한 오르테가가 곧 꽃으로 만든 차를 가져오겠다고 하면서 사라졌다.
황제는 그녀가 마련해 둔 것 같은 의자에 앉으면서 다른 비들에게도 말했다.
"모처럼 권유를 받았으니까. 차나 한잔 하지."
"아직 겨울인데 이렇게 꽃이 있다니 신기하네요."
그렇게 말한 이희는 신기한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꽃을 구경했고, 하연은 황제의 앞에 앉아서는 수첩을 꺼내서 만년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미르예프는 잠시 영상 마도구를 내려놓고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꽃을 둘러보고 있었다.
"꽃이 신기하느냐?"
그 모습을 보면서 황제가 묻자 미르예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제가 사는 곳엔 꽃이 적어서요. 이렇게 많은 걸 보는 건 언제라도 신기하네요."
그녀가 살아온 시베트는 영원히 녹지 않는 동토.
그런 곳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이 꽃이라는 것은 언제봐도 신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미르예프는 도저히 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겠는지 열심히 꽃을 구경하면서 그 향을 맡아보기도 하고 잎을 만져보기도 하는 등 바빴다.
"차랑 그리고 마리프한테 과자를 좀 받아왔어."
잠시 후 오르테가가 해맑게 웃으면서 과자와 차를 가지고 왔다.
향긋한 꽃차의 향기와 마리프가 솜씨 좋게 만든 과자의 달콤한 향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이야. 엄청 큰 잉어가 있지 뭐야? 한 번 잡아보고 싶었는데 혼날 거 같아서 참았어."
오르테가는 차를 마시면서 여행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온천에서 황태후 폐하와 서로 어깨를 주물러준 일이나, 온천에서 원숭이랑 마주친 일. 길을 걷다가 호랑이를 만나서 황태후 폐하께서 직접 처리한 일이나 커다란 잉어를 본 일.
그야말로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신나서 떠들고 있었다.
"그 잉어 말이죠. 20년을 넘게 살았으니까 그랬으면 조금 곤란하긴 하네요."
하연은 그 잉어에 대해서 기억하는지 덤덤하게 말했고 오르테가는 아쉬워했다.
"그렇겠지... 그래서 황실에서 그런 잉어를 키워 보는 건 어때? 지금부터라도. 나 한 번 그런 큰 잉어를 만져보고 싶은데"
"...?"
황제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 녀석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황실에는 이미 백 년은 넘는 세월을 산 잉어가 있는데."
그것보다 더 크고 오래 산 잉어가 이미 황실에 있는데 말이다.
그 잉어는 독문제의 총애를 받아서 온갖 귀한 영약을 먹은 잉어로 아직까지도 살아서 제국의 명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진짜? 전혀 몰랐어."
그 말에 오르테가가 충격 받은 얼굴로 대답하자 황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면 그럴 줄 알았어."
후룩.
달려드는 오르테가를 가볍게 자신의 무릎에 앉혀서 제압한 황제는 차를 마시면서 온실에 핀 꽃들을 구경했다.
황제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자신이 이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걸까?
너무나도 어색하고. 그래서 시간이 느리게 가는 기분이 든다.
황제는 아직도 점심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것에 놀랐다.
하루가... 이렇게 길었던가?
황제는 손까지 떨리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못할 짓을 하는 거 같은 기분이다.
그런 생각하면서도 황제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면서 차를 마셨다.
오르테가가 진정하자 그녀를 놓아주고, 비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며, 가끔은 입을 열었다.
이 시간이 황제에겐 너무나도 평화로워서... 싫진 않은데 자신이 이러고 있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황태후께서 일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생겨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내일...'
다시 전부 확인해 봐야지.
황제는 그리 다짐하면서 내일 일정을 속으로 조율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자서 일어나는 시간을 빠르게 하면 조정에 가기 전에 오늘 황태후께서 처리한 일을 확인해 볼 시간을 낼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게 좋겠어.'
겸사겸사 미리 장계도 좀 읽어보고 태학에 들려서 태학정과 경연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도 되겠다.
황제는 그러니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된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비들과 시간을 보냈다.
참으로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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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운 겨울에 폭포를 맞으면서 노신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무리하고도 무례한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이곳까지도 들려오는 소식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도전이라...'
그 황제가 자신에게 도전한다는 말을 썼다는 것 자체가 노신은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다.
이 대룩에서도 황제의 무용(武勇)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 황제의 도전이라...
노신은 스스로가 황제에게 쉽게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이 대결은 정말 많은 것이 달려 있었으니까.
'질 수는 없지.'
오랜 세월... 무림은 그저 무로는 관직에 오르지 못할 패배자들이 머무는 곳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물론 노신도 그런 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건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무과 시험에서 무려 열 번의 낙방.
결국 그는 무관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무에 매진했다.
오랜 세월 무에 매진하여 얻은 강함.
그래서 얻은 것은 천하제일인이라는 과분한 명예.
그러나 알고 있었다.
무림에서의 천하제일인은 겉으로는 거창하나... 실질적으로는 그 누구도 그를 진짜 이 대륙 전체의 천하제일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대장군, 그리고 금위대장.
기나긴 역사에서도 그 정도 되는 무관들이 실질적인 천하제일의 무인으로 인정받았고, 지금 세간에서 실질적인 최강으로 인정받는 이는 다름 아닌 젊은 황제였다.
그렇기에 노신은 기쁘기도 했다.
그런 황제가... 스스로 도전하는 입장에 서며 자신을 인정해준 것이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증명하고 싶었다.
무림은 더 이상 그런 패배자들만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들은... 이제 그들에게도 통할 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는 자리를 원한 것이었다.
노신은 그곳에서 증명할 생각이었으니까.
자신이 정말 천하제일이라는 과분한 칭호를 짊어질 자격이 있다는 것을. 무림은 이제 더 이상 패배자들의 장이 아니라는 것을.
실질적인 최강인 황제의 앞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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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게에. 좋아요오! 이제 정말 잘하는데요오?"
차를 마시고, 온실을 구경한 황제는 그녀들과 헤어져서는 지금 요리를 하고 있었다.
마리프의 조언을 받으면서 황제는 오늘 저녁에 먹을 요리를 직접 하고 있었다.
그녀의 칭찬에 고기 산적을 만들던 황제는 웃었다.
"그런가? 늘었다니 다행이구나."
이젠 능숙하게 불 조절까지 하는 황제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리프와 설화는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황제가 요리를 할 때 늘 어려움을 겪던 것이 바로 무언가를 구울 때의 불 조절이었으니까.
"오늘은 휴일이었다면서요? 재미있게 노셨어요?"
설화가 해맑게 웃으면서 황제에게 꼭 붙어오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법 즐겁긴 하더구나."
나름 재미가 있긴 했다.
문제는...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더구나."
황제는 솔직하게 말했다.
막상 일하지 않으니까 마음이 영 불편했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해도 자꾸만 일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고 마음이 영 불편해졌다.
"그, 그렇군요. 전 그냥 일을 안 하면 즐거울 줄 알았는데요."
설화가 그 대답이 의외라는 듯이 중얼거리자 황제는 생각했다.
놀기만 하는 게 정말 재미있을까?
황제는 오늘 같은 나날이 반복되는 미래를 생각해봤다.
즐겁겠지,
분명 재미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편하지는 않겠지."
그게 편하지는 않을 거 같았다.
그제야 황제는 자신에게서 일을 도저히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만 할 때는 막연히 일에서 떠나서 유유자적하면 편해지고 즐거울 거 같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휴식이 주어지니까 실감했다.
그렇게 쉰다고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짐은 아무래도 일하는 게 좋은 모양이라서."
나중에 선위하고 나면 할 일을 찾아보는 편이 좋을까?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능숙하게 접시에 식사를 올려 두었다.
역시 뭔가를 하지 않으면 몸이 버티지 못한다.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미래에 자신이 할 일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식당을 차려볼까? 그것도 아니면 검을 가르치는 도장을 열어볼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사업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았다.
어느 것이든 황제는 일만 할 수 있다면 상관이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