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고 계십니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황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모용진의 말에 자기 얼굴을 만져 보았다.
확실히 웃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모용진. 그자가 왔다."
황제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있었던 그 천하제일인과 마주했으니까.
"...노신이 말입니까?"
그 말에 모용진은 벌써 올 줄은 몰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생각보다 그리 신중한 자는 아닌 듯 했다.
"그래서 폐하가 보기엔 어떻습니까?"
모용진은 이쯤 되니 황제의 평가가 궁금해졌다.
과연 황제는 그 남자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화안금정을 지니고 있는 자신보다... 어떤 의미에선 황제의 눈이 더 정확한 경우가 많았다.
"그 남자를 딱 마주하는 순간. 짐은 느꼈지."
갑자기 자신의 앞에 그 노인이 나타났을 때, 황제는 그를 보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온몸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어."
황제는 아직도 흥분으로 떨리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보는 순간 느꼈다.
"이자다. 이자가 바로... 짐이 기다려온 자라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는데 황제는 그 전부터 느끼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데도 황제는 노인의 경지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의 강대한 기운의 깊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순간 알았다.
이자가 바로 자신이 그토록 기다려온... 진짜 강자라는 것을.
그 순간 심장이 두근거려서 황제는 진정할 수 없었다.
당장에라도 저 남자와 싸우고 싶다.
피를 보고 싶다.
저 목에 칼을 박고,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 반대가 되어도 좋으니 사실은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꾹 눌러왔던 광증이 다시 일어날 정도로 황제는 지금 흥분해 있었다.
그런 황제의 금안에 어린 광기를 본 모용진은 걱정되어 뭔가 말하려고 할 때였다.
꼬옥.
"뭔데 그렇게 살벌한 표정이야? 응?"
어느새 다가온 오르테가가 황제를 뒤에서 꼭 끌어안으면서 물었다.
참으로 가벼우면서도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목소리였다.
스르륵.
"오르테가."
그러자 황제의 눈에 보이던 광기가 사라졌다.
그걸 본 모용진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만.'
황제의 반응을 보니 너무나도 확실했다.
역시 폐하께서는 참으로 오르테가를 좋아하는 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모용진은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웃지?"
황제가 오르테가의 볼을 쫘악쫘악 늘리면서 불만스러운 얼굴로 모용진에게 말을 걸자 모용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폐하께서 오르테가 비 전하를 너무 총애..."
"더 말하면 그 입을 잘라버릴 테다."
황제의 날이 선 반응에 모용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놀리고 싶었지만 놀리기엔 눈앞에 황제가 저렇게 서슬 퍼런 눈을 하고 있으면 무서웠으니까.
"맞잖아. 왜 부끄러워하는데! 어?"
오르테가는 그런 황제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황제는 이번엔 자기 볼을 잡고 쫘악 늘리는 그녀를 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부끄럽다?
황제는 자신이 느낀 감정에 놀라고 있었다.
왜 부끄러웠지?
사실이 아니면 그럴 일은 없었을 텐데.
황제는 가만히 오르테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해했다.
하긴...
"뭐, 너니까."
사실이니까. 그러니까 부끄러웠던 거겠지.
황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녀석이 마구 늘려서 붉어진 뺨을 만지작거렸다.
"응? 그건 무슨 반응이야? 어?"
오르테가의 질문을 깔끔하게 무시하면서 황제는 모용진에게 말했다.
"아무튼 내일이다."
"네, 바로 준비하라 지시하겠습니다."
모용진의 대답을 들으면서 황제는 계속 귀찮게 구는 오르테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자 오르테가가 바로 손가락을 물었고 황제는 그걸 보고는 오히려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그녀의 입 안을 희롱했다.
"!"
오르테가가 깜짝 놀라서 황제를 보자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이러면 놓을 수밖에 없겠지."
"으으!"
그런 자신의 반응에 오히려 절대 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이 더욱 힘을 주는 그녀를 보면서 황제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하읏!"
황제가 갑자기 오르테가의 귓불을 잘근잘근 물자 오르테가가 결국 이상한 소리를 내며 황제를 놓아주었다.
그걸 본 황제는 그야말로 승리자의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자, 이제 끝."
황제는 그렇게 말하고는 오르테가를 돌려보냈다.
오르테가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지만 황제가 가볍게 손에 입을 맞춰주면서 부탁하자 순순히 돌아갔다.
그걸 본 모용진이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황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 명령했다.
"그대도 이만 퇴궁하거라 예비 신랑을 너무 오래 잡아두면 곤란하지."
"아니, 굳이..."
그런 배려는 필요가 없는데... 모용진은 그런 생각이었지만 황제는 가볍게 무시했다.
"물론 시킨 일은 다 마무리하고."
"네, 그러겠습니다."
황제의 말에 모용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떠나갔다.
'내일인가...'
모용진마저 떠난 집무실에 홀로 남아서 황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조금 소란이 있긴 했지만 황제는 다시 내일 있을 대결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황제는 아까처럼 피를 보고 싶다던가 그런 충동은 들지 않았다.
그저 검을 나누고 싶어졌다.
황제가 다시 눈을 뜨자 그 눈은 이젠 그저 차분했다.
황제는 그날 대결에 쓸 천지인을 꺼내서는 닦기 시작했다.
그런 황제의 마음은... 더없이 고요했다.
--
'내일인가...'
노신은 손을 뻗으면 구름이 잡힐 거 같은 높은 산 위에서 명상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솔직히 두려워졌다.
마지막에 황제에게서 느낀 그 한계를 알 수 없는 기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 강렬한 기운은 노신의 뇌에 강렬하게 자리 잡았으니까.
'두려워하지 마라.'
순간 두려움에 스스로 잡아먹힐 뻔했다.
그런 자신을 다독이면서 노신은 새하얀 검을 닦았다.
스승님이 남겨 주신 이 검을 가만히 닦고 있다 보면 노신은 금세 마음이 차분해지고는 했다.
백운검.
이 세상에서도 손에 꼽는 명검이자, 무림에서도 최고 보물로 치는 귀한 물건이었다.
스윽.
노신은 어느새 거울처럼 반짝이는 그 검에 자신의 얼굴을 비쳐보았다.
이 검은 노신에겐 단순한 검이 아니었다.
우연한 기연으로 얻은 이 검은 노신의 인생 대부분을 함께 한 동지였으니까.
많은 강적과 함께 싸웠고, 많은 위기를 함께 넘겼다.
노신에게 있어서 이 검은 이미 가장 오랜 친우요,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부탁한다... 친우여.'
그렇기에 노신은 이 오랜 친우에게 부탁했다.
당장 내일 자신과 함께 고생할 녀석이니까.
노신은 이 친구와 함께 내일 하늘에 닿을 생각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사람이 가득 차 있는 경기장.
그곳에서 한 남자가 마치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
그 남자는 바로 황제로, 황제는 이른 새벽부터 이곳에 와서는 벌써 몇 시간 째 가만히 서 있었다.
오늘은 모든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황제는 오로지 그와의 대결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어느새 경기장은 사람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고, 먹을 것을 사는 사람, 황제의 얼굴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 귀빈들을 보면서 수근대는 사람.
정말 많은 사람이 이곳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었지만 황제의 귀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황제는 모든 감각을 그 남자가 오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타악.
그리고 그 순간...
노신이 가볍게 경기장 위에 섰다. 그야말로 전조도 없이.
아무도 느끼지 못한 그야말로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오오!"
그제야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노신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감탄했다.
법복을 입고, 민머리에 새하얀 턱수염을 길게 길은 노인은 구름처럼 새하얀 검신을 지닌 검을 뽑고는 그것을 지팡이처럼 짚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단순한 스님이 아닌, 그야말로 세상의 이치에 통달한 신선 같은 느낌이 물씬 나고 있었다.
"준비는."
그 모습을 보면서 황제는 천지인을 뽑았다.
신검이 등장하자 노신은 눈을 크게 떴다.
백운검도 분명 명검이기는 하나 상대는 무려 천신이 인간에게 하사했다는 절대 부러지지 않는 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황제는 그런 그의 반응을 보면서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를 상대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했으니 걱정하진 말거라."
황제는 그리 말하고는 자세를 잡았다.
준비는 끝났다.
이젠... 서로의 기량을 가늠해보는 일만 남았을 뿐.
황제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전략으로 나설 생각이었다.
'예상 밖이군.'
황제의 자세를 본 노신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상당히 수비적인 자세다.
소문으로 상상한 황제는 뭔가 굉장히 호전적일 거 같았는데... 실제 황제는 자세만 보아도 굉장히 수비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럼 시작이다.'
노신은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리고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서걱!
"!"
하늘에 닿을.
그 순간이 말이다.
황제가 순식간에 자기 팔을 자른 노신의 검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보지도 못했다.
그의 검로를.
황제는 자신이 그의 검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백로(白路)."
노신은 그런 황제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드디어 시작이었다.
하늘에 닿기 위한.
그의 도전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