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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202화 (202/235)

"미가 대체 무슨 짓을..."

이른 아침.

리처드는 눈을 뜨자 보이는 광경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어제 실컷 술을 마신 건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뭘한 거지?'

그 뒤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새근. 새근.

리처드는 자기 옆에 누워 있는 아파리를 보면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왜 이 여자는 홀딱 벗고 옆에 누워 있는 거지?

불길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으니까.

"일어나셨습니까?"

그때 눈을 뜬 아파리가 이불로 자신의 나신을 가리면서 느긋하게 인사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미한테."

리처드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 보며 따지자 아파리가 고민했다.

그리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음... 성인 남녀가 할 일을 했죠?"

"와, 왓?"

그 대답에 목소리까지 떨리면서 리처드가 당황스러워했다.

남녀가 할 일을 했다니!

기억도 없는데 이게 무슨... 혼란스러웠으니까.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나요? 가벼운 불장난이었다고 생각하면 그쪽도 마음이 편할 텐데요."

그녀는 그런 리처드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말했다.

불장난이라니!

리처드는 기겁하면서 말했다.

"미는 그런 거 아주 싫어해!"

이제 불장난하고 놀 나이는 지났다.

적어도 리처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것치고는 제법 적극..."

꾸욱.

"아하하, 그, 그게 무슨 소리? 미는 아무것도 몰라."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급하게 아파리의 입을 막은 리처드는 현실을 부정하다가 이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미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

"그래 주면 전 고마운데요."

아파리의 대답에 리처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다.

웃긴 건 막상 이런 일이 닥치자 리처드는 마냥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 늘 술이 원수지. 언젠가 이리 될 줄 알았는데..."

이게 다 할바르 그 자식이 술을 마시는 걸 자랑해서 그런다.

결국 아파리가 제안한 술자리를 거절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이거라니... 리처드는 머리가 아팠지만 그래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자각은 있었다.

물론 다 큰 남녀가 하룻밤의 불장난을 즐긴 거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리처드는 이제 그러고 놀기엔 제법 나이가 있었으니...

이젠 솔직히 책임을 져야 할 나이였다.

적어도 리처드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 말은?"

"더 말할 필요도 없잖아?"

리처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를 덮쳤다.

순식간에 리처드의 아래에 깔린 아파리가 붉어진 얼굴로 잠시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어, 어라?"

그 모습은 좀 리처드의 마음에 들었다.

늘 무뚝뚝한 줄 알았는데 지금은 딱 그 나이의 여자처럼 보였으니까.

"책임을 지기로 한 이상 곱게는 안 보내줄 테니까. 각오하라고."

리처드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로 말하자 아파리는 그런 리처드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네."

그리고는 살며시 미소를 짓으며 대답하는 그녀를 보면서 리처드는 그대로 그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일을.

이젠 기억할 수 있는 일로 만들 생각이었다.

--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도 괜한 걱정을 하는구나."

집무실에 온 황제는 어의가 준 약을 마시고는 작게 투덜거렸다.

솔직히 몸은 다 나았는데 괜한 걱정 같았으니까.

"네, 그보다 뒤에..."

어의가 황제의 뒤에 껌처럼 찰싹 붙어 있는 시아를 보면서 머뭇거리자 황제가 말했다.

"신경 쓰지 말 거라."

오늘 아침부터 와서는 이러고 있는데... 황제도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덥썩.

이렇게 붙어선 식사도 안 하고 있기에 황제는 마리프가 주고 간 샌드위치를 그녀에게 직접 먹여주고 있었는데 주는 족족 얌전히 받아 먹는 모습이 무슨 아기새 같았다.

"더."

"그래, 그래."

황제는 그녀에게 샌드위치를 다 먹여주고는 재상이 올려 둔 안건을 살펴보았다.

'관도 전역에 역 건설이 조만간 완료... 열차 시범 운행에 대한 승인 요청인가.'

황제는 직인을 찍으면서 시아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셈이냐."

"?"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에게 대롱대롱 매달린 그녀를 보면서 황제는 체념했다.

정말이지 대화가 잘되지 않는 여인이었으니까.

결국 황제는 그녀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 것을 포기했다.

'오늘 내내 이럴 생각인가?'

황제가 그런 생각하면서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흐응."

기분이 좋은 듯 그 손길을 눈을 감고 즐기고 있는 그녀의 반응을 보니 그래도 딱히 자신을 싫어하진 않는 거 같아서 황제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별일은 아니겠지.'

뭔가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붙어 있는 건 아니겠지.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시 정무에 집중했다.

어느새 황제에게 그녀의 존재는 신경 쓰이지도 않게 되어버렸으니까.

--

"그래서요? 역시 성공이죠?"

로라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묻자 통신 마도구 너머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네, 그 약이 정말 효과가 있어서... 아무튼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로라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고마울 건 없었다.

오히려... 로라는 그녀에게 감사하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약이라고 해봐야 아버지한테도 먹힐 정도의 수면제 정도였고.

"저야말로 부족한 우리 대디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요."

로라가 지금 통신 마도구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파리였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황제에게 듣고는 먼저 그녀에게 접촉해서, 둘 사이가 이어질 수 있도록 조력한 것이 바로 로라였으니까.

"대디도 이젠 새시작을 해야 할 테니까요."

로라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바친 시간이 참으로 많았고, 자신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왔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로라는 아버지가 이젠 새로운 시작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억지로...]

여전히 죄책감이 남아 있는지 아파리가 머뭇거리면서 대답하자 로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대디도 아주 마음에 없었으면 애초에 폐하한테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을 걸요?"

로라는 확신했다.

애초에 거리를 둘 수 있게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아버지도 아주 마음이 없진 않다는 증거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잘 부탁드려요."

로라의 말에 아파리는 그러겠다고 대답했고, 로라는 통신을 끊고는 중얼거렸다.

"아, 갑자기 폐하를 보고 싶다..."

둘이 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갑자기 폐하가 보고 싶어졌다.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그, 그러니까... 애정 행각도 좀 하고 싶었다.

로라가 그런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보러 가지 그래? 요새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커피를 마시던 타흘라가 의자에 늘어져서는 말하자 로라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인데 어쩔 수 없잖아."

정말 보고 싶지만...

로라는 뭔가 마무리를 짓지 않고 쉬는 것은 천성이 허용하지 못했다.

"냉장고는 차가운 거니까 이번엔 뜨거운 거? 발상은 간단한데 제법 괜찮은 물건이 만들어졌네."

음식을 데우기에 딱 좋은 마도구가 될 거다.

타흘라는 로라가 지금 열심히 만들고 있는 마도구를 그렇게 평가했다.

"물론 지금 구성이면 양산은 힘들어. 알고는 있지?"

타흘라가 그녀가 구상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차분하게 말하자 로라는 부정하지 못했다.

"으으, 그래서 지금,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잖아."

얄미운 녀석.

타흘라는 최근 열차 설계가 완전히 끝나서 그런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바다까지 달릴 수 있는 녀석이라나? 그게 정말이라면 이젠 브리탄까지 그 열차라는 것으로 갈 수 있다는 게 된다.

물론 타흘라는 그걸로 만족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지금은 이 정도지만 좀 더 개량하면 속도를 올릴 수 있을 거 같거든. 뭐, 그건 당장은 무리지만..."

지금은 조금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타흘라는 최근 자신이 너무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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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끌. 술이 다 떨어졌나아?"

산길을 걷던 기무자는 호리병을 뒤집어보면서 늘어지게 하품했다.

물론 그건 그냥 장난이었다.

기무자가 가볍게 호리병을 때리자 다시 술이 콸콸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주선 기무자.

그는 지금 모처럼 선계를 벗어나서 느긋하게 유람을 즐기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좀 나가!]

술만 마시면서 쳐자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고 설육에게 쫓겨났으니까.

'어디로 갈까... 흐르는 데로 가는 것도 상관은 없지만.'

그렇게 생각한 기무자는 취기로 붉어진 얼굴로 비틀거리면서 걸었다.

'일단 여비가 필요하겠지.'

기무자는 그런 생각하면서 방향을 정했다.

역시 여비를 구하기 위해선.. 막내의 제자를 찾아가는 게 가장 확실할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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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황제는 미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황제에겐 그리 나쁠 것도 없는 제안이었다.

"네, 아무래도 이런 상황이니 그냥 오늘 합궁을 하심이..."

미령은 그렇게 말하면서 여전히 황제의 등에 찰싹 붙어 있는 시아를 힐끔 쳐다보았다.

저런 상태로 오늘 내내 황궁을 돌아다녔으니 그런 결정이 내려져도 할 말이 없었다.

벌써 저렇게 애정 행각을 하고 다니니 차라리 그냥 해버리자는 여론이 생겨났으니까.

"그렇다는구나."

황제가 시아에게 묻자 시아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간단한 대답이 나왔고, 황제는 미령에게 말했다.

"그럼 데려가서 준비시키거라."

"준비?"

시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황제가 말했다.

"그래, 준비."

"...갈게."

순순히 황제와 떨어진 그녀는 미령을 따라서 사라졌고, 황제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이 축축하구나. 좀 씻어야겠어."

그녀가 착 달라붙어 있어서 그런지 그녀가 흘린 땀으로 푹 젖어 있었으니까.

"바로 준비하라 지시하겠습니다."

상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걸음을 옮겼다.

황제는 씻고 나면 바로 처소로 향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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