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선 기무자.
금문제 시절에 유명한 유학자로 주요 저서로는 주견록, 주일방, 견주일체록을 남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또한 관도 제일의 주조사이기도 했으나 그 이름은 솔직히 그 유명한 설육이나 장휘량에 비하면 무게감이 떨어지긴 했다.
그 기무자는 지금...
"흐아암."
마차 안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 강족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한심한 모습이었지만 이 마차 안에서 그의 정체를 아는 자는 없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 슬슬 황궁이 보이네요."
사하라의 말에 기무자는 눈을 떴다.
'무서운 기운이구나.'
벌써 느껴지는 오싹한 기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이 강렬한 기운의 주인이 누굴지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
사하크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기무자가 영 불만스러운 듯했다. 다만 누님이 무서워서 입을 다물고 있을 뿐.
저벅. 저벅.
그때였다.
엄청나게 큰 키의 미남이 마차를 향해 다가왔다.
'저게 금위대장...'
그 남자를 바로 알아본 사하크는 조금 감탄해버렸다.
그 유명한 금위대장을 실물로 보다니... 솔직히 소문보다 훨씬 잘생긴 남자였다.
'그래 봐야 나보단 아니지.'
그래도 이 정도면 뭐...
자신보단 못하다.
사하크는 금방 자신감을 가지고 금위대장을 보았다.
당연히 금위대장이 자신들을 맞이하러 온 줄 알았으니까.
"태사님의 친우 분이 오시는 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금위대장은 그런 사하크와 사하라를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가서는 아직도 비틀거리는 기무자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사하크는 눈을 크게 떴다.
뭐... 라고?
"그게 무..."
자신들이 아니라 이런 주정뱅이를 더 신경 쓴다고? 믿어지지가 않았으니까.
"그럼 가시죠."
허나 금위대장은 그런 사하크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기무자를 데리고 사라졌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자신을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무시하다니! 사하크는 열이 받았으나 사하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다른 곳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으니까.
'태사의 친우...'
생각 이상의 거물이었다.
지금의 황제가 태사를 얼마나 극진하게 대하는지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까.
동생이 더 무례하기 전에 말려서 정말 다행이다. 그녀가 그런 생각할 때 미령이 다가와서 말했다.
"구르타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환영합니다."
'오오!'
미령을 본 사하크의 눈이 반짝였다.
엄청난 미녀다.
저런 도도한 인상의 여자가 또 밑에 깔렸을 때 앙앙대는 맛이 있단 말이지.
사하크가 그런 생각하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사하라의 입이 열렸다.
"그렇습니다."
"따라오시죠. 그리고 그쪽은..."
사하크를 본 미령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적당히 황궁을 둘러보고 계시길 바랍니다."
스윽.
"그러면 그쪽이 안내해주는 건가?"
자연스럽게 팔을 어깨에 올리면서 사하크가 능글맞게 묻자 미령이 혀를 찼다.
"그 손이 잘리기 싫으면 내려놓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
생각 이상으로 싸늘한 말에 사하크가 당황하고 있을 때 어느새 금위대의 검이 그의 목에 닿아 있었다.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에 사하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비 전하께 이 이상 무례하면 곤란합니다."
금위대 병사의 덤덤한 말에 사하크는 깜짝 놀랐다.
비라니!
그렇다면...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아무리 그래도 그는 황제의 여인을 대놓고 건드릴 생각은 없었기에 곧바로 사과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에서 그런 짓했다간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었으니까.
'저 여자는 힘들겠네.'
아무래도 저 여자는 공략하기 힘들겠다.
사하크는 자기 목에서 사라진 검을 보면서 간담을 쓸어내리며 평가했다.
아무래도 저 여자는 외모에 홀리는 부류는 아닌 모양이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도 없을 거 같아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하지만 저 정도면...'
아깝긴 하네.
각이라도 보였으면 몰래 다시 한번 노려봤을 텐데...
사하크는 그런 생각하면서 순순히 황궁을 둘러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궁녀가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수준 높은데?'
슬쩍 궁녀를 살펴본 그는 감탄했다.
궁녀의 수준도 꽤 높다.
사하크는 그런 생각하면서도 감히 건드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궁녀 역시 일단 취급은 황제의 여인으로 취급된다.
함부로 건드렸다간 화를 입을 수 있으니 이마저도 각을 잘 봐야 했다.
'그게 맛있긴 하네.'
하지만 안 들키면 그만이지.
각만 잘 보면 저 부드러운 몸을 얼마든지 맛볼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그게 또 각별한 맛이라는 걸 사하크는 이미 여러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어디 보자...'
그러면 일단 누굴 공략할지 고민하던 사하크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멍하니 연못을 구경하는 백금발의 여인.
아름다웠다.
사하크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 여자를 향해 다가 갔다.
"무얼 보고 계십니까?"
이런 여자는 처음엔 점잖게 다가가야 한다.
사하크는 그런 생각하면서 멋들어진 목소리로 점잖게 말을 걸었다.
"...?"
멍...
사하크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자신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본 순간 그 아름다움에 정신을 잃을 뻔했으니까.
순진무구한 저 커다란 군청색 눈동자도, 백옥 같이 고운 피부도, 앵두 같은 입술도, 여성스러운 곡선이 아름다운 그 몸마저도 완벽했다.
"누구."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구르타의 왕자 사하크 키르키에르입니다.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아가씨의 성함을 들어도 될련지요?"
"시아."
무심하게 대답한 여인은 바로 사하크에게 관심을 끊었다.
애초에 그녀의 눈엔 별로 관심도 가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그런 무심한 여인의 반응에 사하크는 더욱 몸이 달아서는 계속 말을 걸었다.
"그래서 여기서 뭐 하고 계시던 겁니까?"
"..."
그녀는 이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른 황제를 보고 싶은 생각 뿐이었으니까.
그저 멍하니 호수를 구경하던 그녀는 슬슬 시간이 되었다 여겼는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저, 저기!"
사하크가 그녀를 불렀으나 어느새 시아는 저 멀리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아쉬운 얼굴로 뻗었던 손을 거뒀다.
'이럴 수가...'
자신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을 줄이야.
이런 경험은 생소했기에 사하크는 큰 충격을 받고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충격에서 벗어나려면...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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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벌써 온몸이 찌릿하구만.'
기무자는 금위대장을 따라 걸으면서 그런 생각했다.
황제가 자신이 오는 걸 벌써 눈치채고 있었다니... 솔직히 예상 밖이었으니까.
"모셔왔습니다."
"들여보내거라."
안에서 듣기 좋은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고 금위대장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기무자에게 말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집무실인가.'
기무자는 그리 생각하면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호오... 과연 휘량 누님이 그런 말을 할 만하구나.'
기무자는 황제를 보자마자 크게 감탄해버렸다.
이리도 잘생겼다니.
보고만 있어도 술맛이 좋아지는 기분이다.
기무자는 황제의 얼굴을 구경하면서 술을 마셨다.
"오는 길이 고단하진 않으셨습니까. 기무자 님."
그런 기무자를 향해 황제가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호오, 거기까지 알고 있었느냐? 대단한 아해로다."
과연 그 강상의 제자구나.
기무자는 작게 감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긴 데다가 이리도 뛰어나기까지 하니 그 까탈스러운 막내가 자랑할 만도 하였다.
"대충 짐작하였을 뿐입니다. 일단 여독을 푸시지요."
"괜찮아. 자네의 비 후보 덕에 편안하게 왔으니."
뭐, 그동안 신세를 졌으니 이 정도는 말해 줘도 되겠지.
기무자가 그리 생각하며 말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비 후보에게는 제가 따로 사례하겠습니다."
'절대자가 저런 반응이라니... 과연 제국이 용을 품었구나.'
아무리 태사의 친우라 하나 제국의 절대자가 굳이 저렇게 저자세로 나올 이유는 하나도 없다.
기무자는 황제를 보면서 높은 평가를 내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저 무력만 뛰어나고 잔인한 황제가 아니다.
조금만 대화해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금문제가 생각나는구나.'
기무자는 그런 황제를 보면서 금문제를 떠올렸다.
금문제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자라면 거지에게도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자였다.
필요하다면 평민도 중히 썼으며, 필요가 없다면 부모라고 해도 가차 없이 잘라 내는 냉정한 자이기도 했다.
'혈육도 과감하게 잘라 내는 자가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그런 점에서 기무자는 지금의 황제가 참으로 무서운 황제란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군요."
그렇기에 기무자는 황제를 향해 공손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술이 확 깰 정도로.
지금의 황제는 기무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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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손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늘 생각하거라.]
존경하던 스승님은 늘 그리 말하고는 했다.
그 시절 어린 기무자는 그런 스승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손에 담긴 것이라니.
그의 손에 잡힌 것은 오로지 붓이요. 술 뿐이었으니.
그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은 스승님이 편히 눈을 감으시고, 홀로 남았을 때였다.
손에 담긴 것.
그것은 스스로가 걸어온 인생이었다.
손을 보면, 그 속에 담긴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볼 수 있었다.
기무자는 황제의 손을 보았다.
피로 젖어 있었다.
그 손에 묻은 피가 이 황제가 걸어온 길이 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삶을 살았군요."
기무자는 황제가 내준 커피를 마시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황제는 그리고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 말대로 황제의 인생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참으로 많은 이를 죽였다.
그 사실을 그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 업이 제가 지옥으로 가야 할 이유겠지요."
황제의 덤덤한 말에 기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이게 아닌데...'
저렇게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는데.
기무자는 당황하면서도 겉으로는 덤덤하게 커피를 마셨다.
나름 신선답게 멋지게 가르침을 주고 싶었는데 저렇게 쉽게 인정해 버리니까 뭔가 민망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