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흠."
민망한 듯 헛기침하고 있는 기무자를 보면서 황제는 커피를 마셨다.
"너무 문제를 일으키진 말고."
끄덕.
어느새 안으로 들어온 시아가 황제의 옆에 꼭 붙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는 기무자에게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야기가 끊겨서. 뭔가 더 하실 말씀이라도..."
"음,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 가르침은 필요가 없겠군요."
아쉽지만 황제에게 딱히 가르칠 건 없겠다.
기무자는 그런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긴 자신이 누굴 가르친다고... 괜한 짓이었으니까.
"그럼 전 좀 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얼른 귀빈을 모시거라."
밖에서 대기하는 궁녀들에게 그리 명령한 황제는 기무자가 사라지자 시아에게 말했다.
"잠시만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 벌써 온 거지?"
"?"
"잠시 기다렸다고? 하긴 확실하게 정하지 않은 짐의 잘못도 있겠지."
이젠 얼굴만 봐도 대충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이 가능했기에 황제는 그리 답하고는 다시 정무를 보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시아는 그런 황제의 옆에서 황제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참... 애를 보는 거 같은 기분이구나."
황제는 그녀를 보면서 그리 말하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벌써 애가 생긴 기분이다.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으니까.
--
멍...
방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사하크를 발견한 사하라는 조금 당황했다.
'왜 저러고 있지?'
오히려 발정 난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무기력하게 있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뭐 하니?"
"어? 아, 아니..."
사하크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이내 사하라에게 작게 말했다.
"누님. 황제를 만났어?"
"아니, 합궁은 내일이니까 아마도 내일 보게 되지 않을까?"
그 질문에 덤덤하게 대답한 그녀는 편하게 의자에 앉아서는 면사를 벗었다.
그러자 조금 창백해 보일 정도로 새하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한 녹색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서 추욱 늘어졌고, 진한 노란색 눈동자는 날카로운 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까칠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나... 황제를."
"그 목 잘리고 싶은 거야?"
만나고 싶다고 말하려던 사하크는 까칠한 사하라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사하크."
그런 동생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사하라는 진심을 담아서 사하크에게 말했다.
"이 누님을 더 힘들게 하지 말렴."
이 이상 걱정 끼치지 말아라.
그녀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사하크도 그 순간 누나한테 부탁하는 건 포기했다.
"그러니까 좀 머리를 식... 사하크?"
사하라는 어느새 사라진 동생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난 몰라 이제."
하여간 사고나 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사하라는 그런 생각하면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일단은... 피곤해서 좀 자고 싶었으니까.
--
'대체 황제가 어떤 남자길래.'
사하크는 걸으면서도 스스로가 이렇게 황제를 의식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녀를 떠나보내고 몇 명을 더 만났지만 모두가 그에게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수이란 여자는 아예 대놓고 '폐하보다 얼굴도 못 나셨는데 성격도 별로네요.' 라는 말로 사하크에게 비수를 박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사하크는 그 잘난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을 정도가 되었다.
"폐하를 뵙고 싶습니다."
무작정 집무실까지 찾아가 그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금위대장에게 말을 건 사하크는 굳은 금위대장의 표정을 보고는 조금 겁을 먹었다.
"잠시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금위대장이 그렇게 말하고는 안으로 사라지자 사하크는 묵묵히 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안으로 들어가셔도 됩니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금위대장의 말에 사하크는 기대하면서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이 안에 들어가면 그 황제가 있는 걸까?
과연 어떤 얼굴일지 궁금했다.
"그래, 짐을 보고자 했다고."
집무실 안에 들어가자 커피향과 함께 먹 냄새와 종이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졌다.'
사하크는 황제를 본 순간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깨달았다.
다른 여인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저런 얼굴을 늘 보고 사는데 자신이 성에 찰리가 없겠지.
하지만 그런 사하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 것은...
자신을 그렇게 무시하던 여인이 황제의 옆에 꼭 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사하크는 수컷으로서의 패배감마저 들었다.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그저 모처럼이니 폐하를 뵙고 가르침을 받고자..."
되는 대로 말을 내뱉으며 사하크가 시아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황제가 시아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황제는 그런 사하크의 시선을 오해한 듯 했다.
"하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방해꾼이 있어서는 곤란하겠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나가 있거라."
"싫어."
"명령이다."
바로 거절하는 시아에게 황제가 덤덤하게 명령하자 시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순순히 집무실을 나섰다.
"자, 이제 편히 이야기해보거라."
황제의 말에 시아를 보던 사하크는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의 황제에게 그가 가장 물어보고 싶은 건 단 하나였으니까.
"어떻게 해야지 여심을 그렇게 장악할 수 있습니까?"
"...?"
그 질문에 황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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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이 되어도 딱히 바뀐 게 없구나.'
황제가 내준 방에 있는 침대에 누워서 기무자는 자기 손을 보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신선들에 비하면 자신이 제일 부족하다는 것을.
주술은 천선보다는 못했고, 지식은 도선보다 부족했으며, 음악은 음선에 미치지 못했고, 검은 검선보다는 모자랐다.
반대로 말하면 모든 걸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는 실력이라는 거지만 기무자는 늘 이 어중간한 점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멋지게 가르쳐보고 싶었거늘.'
막내의 제자에게 조금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무리였다.
참으로 이것저것이 담겨 있는 이 손은 그래서 그런지 뭐든 어중간하게 만들어 버렸다.
어중간한 인생을 살아온 자신에게 그보다 더 어울리는 손은 없겠지.
기무자는 그리 생각하면서 허탈하게 웃으며 술을 마셨다.
그런 점에서 그는 술이 참 좋았다.
술에 취해 있으면 이런 잡생각은 안 해도 되니까 말이다.
"그래 모처럼이니 나가서 마셔야지."
딸꾹!
어느새 거나 하게 취한 기무자가 밖으로 나와서는 달을 보면서 술을 마셨다.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다.
그런 생각하며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뒤에서 뜻밖에 술상대가 나타났다.
"홀로 적적하게 자작하실 거면 같이 드시지요."
털썩.
황제가 기무자의 앞에 앉으면서 말하자 기무자는 눈을 크게 떴다.
"호오! 절대자와 같이 마시는 술자리 만큼 또 귀한 것이 없지."
취해선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기무자는 껄껄 웃으면서 황제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좋은 술입니다."
황제가 가볍게 한 잔을 마시고는 말하자 기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신주거늘. 보통은 못 마시는 거란다. 껄껄."
그 주선이 직접 빚은 신주다.
애주가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마시고 싶은 귀한 술이라는 이야기였다.
정작 황제는 술을 안 좋아하는 쪽이라서 별 감흥이 없어 보였지만.
"고민이 있는 눈치구나."
기무자의 말에 황제는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신선의 눈은 못 속이겠군요."
황제는 지금 참으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오늘 어떤 자가 찾아와서 여심을 사로잡는 법을 배우고 싶다더군요."
황제에겐 참으로 곤혹스러운 질문이었다.
"잡아본 적이 없는걸 물어보니 어찌 대답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여...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그저 모르겠다는 대답 밖에 들려줄 수 없었다.
애초에 황제는 왜 그런 걸 자신에게 물어보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손에 피를 묻히는 법이라면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
황제는 말했다.
애초에 황제가 잘하는 것이 그런 것이었으니까.
누군가를 죽이고, 겁주고... 인생의 대부분을 그런 식으로 보낸 황제에게 여심을 물어봐야 알 턱이 없었다.
"허나 전혀 관련이 없는걸 물어보는 건 참으로 난처하더군요."
"하하! 그렇지. 나도 그런 적이 참으로 많았어."
이 손에 담긴 것은 전혀 다른 것인데.
그렇기에 줄 수 있는 것도 다른 것인데...
그런 생각은 기무자 역시 해봤으니까.
"그러면 무시하면 그만이야.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해 봐야 누가 줄 수 있겠어!"
기무자의 그리 말하며 호쾌하게 웃자 황제는 그 모습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말거라. 황제는 초인이 아니야. 인간이지.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야. 오히려 완벽을 추구하다가 망가지는 것을 더욱 경계하는 것이 옳지."
"...그렇죠."
그 말에 황제는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작게 중얼거리더니 술을 마셨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으, 으응?"
황제의 반응에 기무자는 조금 당황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가르침이라니?
기무자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황제에게 가르친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제 손에 담긴 것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살아온 인생이기에. 피로 얼룩진 인생이라 해도 제가 살아온 인생을 자신이 부정해서는 안 되겠지요."
황제는 자기 손을 내려다 보면서 그리 말했다.
황제는 기무자의 말을 듣고 느끼는 게 있었다.
완벽을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 완벽한 인간은 없으니까.
그러니 없는 것에 몰입할 필요도,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 내 인생을 내가 부정해서는 안 되지."
기무자는 자기 손을 보았다.
참으로 어중간한 손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게 자기 인생이었다. 그걸 부정해선 안 되겠지.
"여비가 필요해서 이곳을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황제의 말에 기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지."
생각해 보니 그걸 잊고 있었네.
기무자가 그런 생각할 때 황제가 조용히 주머니를 내밀었다.
"작은 성의입니다. 받아두시지요."
"허..."
금으로 가득한 주머니를 보면서 기무자가 감탄했다.
꽤 거금일 텐데... 이렇게 선뜻 줘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으니까.
"국고를 이리 함부로 써도 되는 건가?"
"그럴 수는 없지요. 제 사비를 털어 넣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제의 말에 기무자는 그 주머니를 챙겼다.
저렇게 말하는 데 안 받는 것도 도리가 아니었으니까.
그걸 보면서 황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 자 그럼 다시 한잔할까?"
기무자가 황제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하자 황제는 그대로 술을 깔끔하게 마셨다.
"크으! 잘 마시는구만. 한 잔 더!"
기무자의 주정에 어울려주면서 황제는 그렇게 밤을 지샜다.
황제의 인생에서 가장 많이 마신 날이었다.
--
[짐은 모르겠구나. 그런 것과는 연이 없는 삶을 살아서.]
사하크는 황제의 대답을 곱씹어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것과 연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참으로 믿기지 않는 말이었으니까.
그 얼굴로, 그렇게 여심을 홀려놓고선 그런 말을 해 봐야 사하크에겐 기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긴 쉽게 알려줄 마음은 없겠지.'
사하크는 아쉽지만 황제의 비결을 듣는 건 포기했다.
자신이어도 그런 비결은 쉽게 말해주지 않을 테니까.
'벽 느껴지네.'
사하크는 시무룩한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솔직히 열등감마저 들었다.
자신은 황제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러다 보니까 사하크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열등감에 괴로워하지 말고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
"폐하! 일어나셨습니까?"
황제는 아침 일찍 들리는 간드러진 목소리에 잠에 깨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제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솔직히 어떻게 처소로 돌아왔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꿀물을 준비했습니다."
"고맙구나... 헌데 그대가 왜 여기에?"
황제는 사하크가 내민 꿀물을 마시면서도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있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네? 폐하께서 절 받아 주지 않으셨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폐하를 보필하겠습니다."
"...?"
황제는 이 남자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좌라니...?
황제는 그런 걸 뽑은 기억이 없어서 당황했다.
"허나 분명 그러셨는 걸요."
사하크가 선택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열등감에 괴로워하기 보단 아예 우상화하자고.
애초에 못 이기는 게 당연하다면 아예 가까이에서 섬기면서 배워 보자고.
그런 결심을 했으니까.
사하크는 황제를 섬기고자 했고, 다행히 황제는 그런 사하크를 어제 받아주었다.
"...뭐. 상관없나."
단편적인 기억에 분명 그랬던 것도 같아서 황제는 체념했다.
뭐... 보좌할 사람이 한 명 정도 있다고 문제 될 것은 없겠지.
구르타의 왕자라면 신분 역시 확실하니 그리 나쁠 건 없었다.
"그럼 준비하고 따라오거라. 바로 조정으로 가야 하니."
황제가 어느새 들어온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용포를 입으면서 말하자 사하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뒤따르겠습니다."
'흠, 소문과 다르게 깍듯한 아이군.'
이 정도면 민이와 어울려도 상관없으려나?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사하크를 데리고 조정으로 향했다.
얌전히 자기 뒤를 따르면서도 상선에게 착실하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배우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름 잘 써먹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