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가셨다고."
황제는 기무자가 홀연히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자유롭고, 또 그렇기에 잡을 수 없는 이들이 신선이니까.
그런 점에선 이리 많은 신선을 만나고, 그들에게 나름대로 가르침을 받은 것은 기연이라고 밖엔 볼 수 없었다.
"그래, 거기다가."
"네!"
"인장을 찍어 줄 테니 재상에게 이걸 전하거라."
"네!"
"태학정이 보낸 서찰에 대한 답장을 썼으니 바로 보내도록 하고."
"네!!!"
그야말로 몰아치듯이 일을 시키는 황제였으나 사하크는 아무런 군소리도 없이 그 일을 전부 처리했다.
"..."
그 동생이 황제를 보좌하게 되었다는 말에 놀라서 찾아온 사하라는 그 변한 모습에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참으로 착하고 성실한 아이더구나. 역시 소문은 마냥 믿을 것이 못 되는 모양이야."
사하크가 사라지자 사하라에게 차를 내어준 황제는 그리 말하면서 잔잔한 미소를 지었고 사하라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황제의 높은 평가에 사하라는 어안이 벙벙하였으니까.
성실...? 착해?
그 어느 것도 사하크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때 사하크가 어느새 돌아와서는 꾸벅 고개를 숙이자 황제가 말했다.
"그것만 정리하고 좀 쉬거라."
"네!"
'이건 대체...'
저렇게 공손한 사하크라니?
사하라가 여전히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황제가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그녀를 위로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차기 구르타의 왕이니 이렇게 미리 정무를 보는 것을 곁에서 배우는 것은 좋은 경험이니."
"네? 아, 예...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페하께서 거둬주셨는데 그 누가 걱정을 하겠습니까."
아무튼 저런 변화 자체는 긍정적인 일이다.
무엇보다 황제에게 정무를 배우는 것 같은 호사를 저 동생이 언제 누려볼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사하라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전 준비하러 이만..."
"그래, 가보거라."
오늘 있을 합궁 준비를 위해 사하라가 떠나는 걸 확인한 황제는 쉬면서 책으로 유학을 공부하는 사하크에게 말했다.
"공부는 잘 되어가느냐?"
"그게 이 부분이 사실 잘 이해가..."
사하크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가리키며 묻자 황제가 대답했다.
"칠정 논쟁 말이구나. 그 부분은 말이다. 여기 이 노기가 쓴 칠정욕구론을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우니 이걸 보며 공부하거라."
황제는 책장에 꽂혀 있던 칠정욕구론을 꺼내서 사하크에게 넘겨주었다.
칠정 논쟁에 대해선 노기가 쓴 책이 무지한 자들도 이해하기 쉽게 쓰여졌으니까.
아직 유학에 있어선 무지한 사하크에겐 이 책이 더 어울렸다.
애초에 사하크가 읽고 있던 책은 황제가 이번 경연을 위한 준비를 위해서 읽고 있던 책으로 어지간한 유학자도 이해하기 힘들었으니 사하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머나. 둘이 정말 사이가 좋으시네요."
그때였다.
한참 황제가 그렇게 책을 소개하고 있을 때 집무실로 들어온 나르타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가? 그보다 무슨 일로 왔느냐."
황제가 그 질문에 덤덤하게 대답하자 사하크는 힐끔 나르타를 보고는 얌전히 책을 덮었다.
일단 얌전하게 공부도 하고, 정무도 배우고 있었지만 그의 가장 큰 목표는 바로 황제가 여자를 대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였으니까.
"어머, 보고 싶어서 찾아오는 것도 안 되나요?"
'음...'
뭐지? 오히려 여자 쪽이 더 적극적인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사하크는 그런 생각하면서도 얌전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과연 황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으니까.
"안 될 것이야 없겠지. 그럼 편히 쉬다가 가거라."
'...끝?'
사하크는 그 말을 끝으로 정말 여자에겐 눈길 한 번 안 주는 황제를 보며 조금 질려 버렸다.
저런 미인이 저렇게 꿀이 떨어질 거 같은 눈길을 보내는 데도 황제는 오히려 서류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다.
"군에서 무구의 점검을 요청했구나 이 서신을 공방에 보내거라."
"네."
나르타가 자신을 보던 말던 다시 일에 집중하는 황제를 보면서 사하크는 일단 황제가 시킨 일을 하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짧은 시간을 함께 했지만 사하크가 본 황제는 그야말로 일에 미친 남자였다.
조정에서 회의를 마치고는 바로 개인 단련.
그러고는 집무실로 돌아와 가볍게 아침 식사하면서 정무를 보고... 그 후엔 잠깐 점심 식사를 하면서 공부를 하고, 그 뒤엔 다시 정무를 보고...
가볍게 차를 마시고는 다시 정무를 봤다.
그야말로 미친 거 같다.
사하크는 황제의 옆에서 일하면서 정신이 피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전부 직접 확인하십니까..."
사하크는 솔직히 놀랐다.
이 정도 업무량이라니... 과로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대부분의 일을 황제가 최종적으로 점검해 보는 모습엔 결벽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건 천성이라 어쩔 수 없더구나."
확인할 수 있는 건 다 확인해야지.
그 질문에 황제는 그리 말하면서 보고서를 읽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해서... 장형 60대로 처벌하고, 흠..."
보고서 내용 자체는 별거 없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어느 평민이 지방에 머물던 장가의 사람에게 무례를 범해 장형 60대로 처벌하고 마무리 지었다는 정말 별거 아닌 보고서.
하지만...
황제는 자꾸만 이 보고서가 눈에 걸렸다.
"어떻게 보느냐?"
"음? 별거 아니지 않습니까?"
사하크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평민이 무례하면 장형 60대 정도야... 그의 입장에선 당연했으니까.
"흠... 장가라."
황제는 장계를 살피면서 턱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봐도 영 찜찜했다.
이렇게 일을 신속하고 빠르게 처리한 것도 마음에 걸렸고, 기록도 무슨 짜 맞춘 것처럼 정확하고 세세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냄새가 나는구나. 모용진."
"네."
황제가 부르자 바로 나타난 금위대장을 보고 사하크가 움찔했으나 황제는 신경 쓰지 않으면서 말했다.
"금위대에서 직접 조사하거라."
"위조가 있었으면 어찌할까요?"
꿀꺽.
설마 황제에게 올리는 장계에 위조를 가한다고?
사하크는 황제의 눈치를 살폈고 황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 일에 관여한 자는 장형 100대, 후에 일가 전체를 소금광산으로 보내고."
그 일에 관여한 자는 장형 100대에 일가 전체를 소금광산으로 보낸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게 한 황제는 사하크의 얼굴이 창백해지건 말건 신경 쓰지 않으면서 말했다.
"주모자는 극형으로."
물론 그럴 일이 없어야겠지만.
황제는 그리 말하고는 모용진을 내보넀다.
"만약 정말 조작이 되었다면 사건은 어찌 처리하실 건가요?"
나르타가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자 황제는 덤덤하게 장계를 넘기면서 대답했다.
"재조사를 명해야겠지. 만약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힘없는 자들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라면 과중처벌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감히 거짓 장계로 황제를 능멸하려 한 것이니 과중처벌은 피할 수 없었다.
황제는 그리 말하면서도 그저 자신이 과민하게 반응한 것이길 바랐다.
"후후, 폐하다우시네요."
그 대답에 나르타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 완고함이 좋았다.
어떤 일에도 저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하면 역시 너무 콩깍지가 씌인 걸까?
나르타는 그런 생각하며 웃었고, 사하크는 왜 분위기가 좋아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가 뭘 한 거지? 솔직히 말해서...
'그냥 일만 하는 거 같은데...'
사하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금 멋지긴 하네.'
확실히 일에 몰두하는 황제의 모습은 멋있긴 했다.
혹시 이건가?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매력 요소?
사하크는 그런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부지런히 황제가 시키는 일을 계속했다.
일단은... 좀 더 지켜보면 더 명확해질 거 같았으니까.
--
"..."
여화는 산에 올라가 바위 위에 정좌하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최근엔 신체의 단련보단 정신 단련에 더욱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 아침 단련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여화는 눈을 감고 계속 명상에 잠겨 있었다.
공기의 흐름을 느끼고, 이 세상에서 흐르는 기의 흐름을 느낀다.
어느새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오직 자신과 자연 뿐.
새들이 자연스럽게 여화의 어깨에서 쉬다가 사라지고, 고라니는 여화를 신경 쓰지 않으면서 뛰어다녔다.
"후..."
한참 후 명상을 끝낸 여화가 눈을 뜨고는 몸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돌아가야지.
그녀는 산을 내려와 황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해 두는 편이 좋겠지."
"그렇군요. 배웠습니다."
'?'
여화는 황제가 처음 보는 남자를 대동하고 바쁘게 어딘가로 향하는 걸 발견하고는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다.
"폐하!"
"여화구나. 흠, 단련하고 오는 길인가?"
장계를 들고 있던 황제는 여화의 옷차림을 보며 물었고 여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근에는 명상을 통해서 정신을 단련하는 걸 중점으로 하고 있거든요. 그보다 그 남자는 누군가요?"
여화가 호기심을 담아서 사하크를 보며 묻자 황제가 대답했다.
"짐의 밑에서 일하면서 정무를 배우고 있는 아이란다. 소개하거라."
그 말에 사하크가 바로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여화 비 전화를 뵈어서 영광입니다. 전 구르타의 왕자 사하크 키르키에르라고 합니다. 부족한 몸으로 폐하께 배우고 있으니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그렇군요."
사하크는 여화의 외모를 보고 크게 감탄하긴 했지만 두려움에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대륙에서도 몇 안 되는 검강 사용자.
그런 압도적인 강자 앞에서 그 누가 겁먹지 않을 수 있을까?
당장 여화란 여자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사하크가 겁을 먹기엔 충분했다.
"머리가 좋아. 잘 배우니 가르치는 맛이 있더구나."
황제는 사하크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비들에게 조금 실례를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황제에겐 치기 어린 젊은이가 하는 약간의 실수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흐음..."
여화는 사하크를 보았다.
확실히 좋은 사람으로는 안 보이지만...
"폐하께서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뭐, 폐하께서 마음에 드셨다니 상관은 없겠지.
여화는 그리 생각하면서 꾸벅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강한... 분이시네요."
여전히 그녀의 기운에 위축되어 있던 사하크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강하다니. 고작 이 정도의 경지에 만족해선 곤란하겠지. 터무니없이 모자라."
"그, 그렇군요."
사하크는 놀랐으나 새삼 눈앞에 황제가 어떤 존재인지 실감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앞에서 강함을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었으니까.
소문은 늘 과장되는 법이라지만 사하크는 황제의 소문은 오히려 축소된 게 더 많은 거 같은 기분이었다.
타악.
"흘리지 말거라."
사하크가 다른 생각을 하느라 흘릴 뻔한 장계를 잡아주며 황제가 말했다. 그 모습에 아찔해진 사하크는 바로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잠시 정신을..."
"뭐, 되었다. 보통은 그대가 할 일이 아니니. 아무튼 장계는 모두 황실 서고에 보관해 두니 위치 정도는 숙지하거라."
애초에 황제가 굳이 다 읽은 장계를 들고 사하크와 함께 황실 서고로 가는 이유는 앞으로 자주 그곳에서 필요한 자료를 꺼내와야 할 사하크에게 황실 서고에 대해서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이곳이다. 그 자료는 ㅎ1-234 책장에 넣어 두고."
"와... 엄청 세부적으로 정리되어 있네요."
책장을 살펴보며 사하크는 감탄했다.
이곳이 바로 황실의 모든 기록과 장서들이 보관되어 있다는 황실 서고.
그 규모도, 장서의 양도 상상을 초월해서 사하크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ㅎ1-234. 짐이 더 말해 줘야 하느냐?"
"아, 죄, 죄송합니다."
황제가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하자 사하크는 다급하게 자신이 들고 온 장계를 ㅎ1-234 책장에 꽂아두었다.
"그보다 폐하께선 이걸 전부 기억하고 계십니까?"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가끔 직접 찾아보기도 하니 말이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한 황제는 서고의 관리 상태를 살펴보았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모습에서 관리가 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나쁘지 않았다.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언제든 살펴보거라 제자리에 정리해 두기만 하면 문제는 없을 테니."
"그, 그래도 됩니까?"
황실 서고를 열람하는 것은 어지간한 귀빈도 쉽게 얻을 수 없는 특권이었다.
그걸 자신에게 준다고?
사하크는 믿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래, 일을 하려면 많이 아는 편이 좋으니까. 짐이 이곳에 있는 장계의 절반 정도는 숙지하고 있으니... 그대는 그래. 근 10년 분량의 장계만 숙지하거라."
"...네?"
사하크는 황제의 덤덤한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신이 무얼 들은 거지?
"1, 10년 분을 말입니까?"
공포에 질린 얼굴로 사하크가 덜덜 떨면서 말하자 황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야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겠느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그리 당황하지? 장서를 전부 읽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최소한의 장계만 파악하고 있으라는 이야기인데."
그런 사하크의 반응에 황제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에 모여 있는 장계의 수는 대략 100만 개.
그중에서도 고작 10년 분이면 아무리 많아도 3천 개를 넘기지 않을 텐데? 그걸 다 숙지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황제의 눈은 그리 말하고 있었고, 사하크는 그런 황제를 보며 확신했다.
이 남자를 섬기기로 한 것은 스스로 지옥문을 연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