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시간이구나."
황제는 일을 하던 중에 손목시계를 보았다.
최근에도 로라가 자주 손봐서 그런지 손목시계는 요샌 틀린 법이 없었다.
'리처드는 재혼이라...'
솔직히 황제에겐 그 소식이 조금 의외긴 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가 그토록 증오하던 야만족 출신의 여인과 맺어진 것은 놀라웠으니까.
하긴...
'그런 남자였지.'
그러나 황제는 이해했다.
그때 이미 그가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나.
용서하자고.
리처드는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이 이미 모든 것을 용서했음을 증명해주었다.
그들도... 리처드를 이젠 용서했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지금은...'
상대만 생각하자.
황제는 상념을 지우고는 자기 무릎을 베고 잠든 시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뒤에 뒤에 있던 궁녀들에게 말했다.
'처소로."
끄덕.
궁녀가 조심스럽게 시아를 안아 들고는 사라지자 황제는 졸고 있는 사하크에게 말했다.
"피곤할 테니 이만 돌아가거라."
"네? 아, 예."
황제는 홀로 남은 집무실에서 뒷정리를 위해서 몸을 움직였다.
상선이 바로 거들려고 했으나 황제가 말했다.
"그대도 오늘은 좀 쉬거라."
"...알겠습니다."
늘 수고해준 상선에게 휴식을 주고 황제는 본격적으로 정리를 시작했다.
자신의 손으로 서류를 정리하고, 비들이 와서 마시고 간 찻잔을 닦았다.
부족해진 커피콩은 추가하고, 찻잎도 새로 꺼내서 넣어 둔 황제는 바닥을 빗자루로 쓴 다음에 의자까지 늘 있는 자리에 두고 나서야 등불을 껐다.
'이렇게 혼자 걷는 건 오랜만이군.'
원래는 늘 뒤에서 상선이 함께 했는데 없으니까 참 신기한 기분이다.
궁녀들의 인원 배분에 문제가 생겼는지 아직 궁녀들이 오지 않아 혼자 욕탕으로 온 황제는 혼자서 옷을 벗고는 처음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목욕물을 준비하고 몸을 씻었다.
전장으로 가출했을 때는 애초에 마실 물조차 귀한 전장에서 씻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었고, 황실에 있거나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씻는 것은 늘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신기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일 텐데.'
생각해 보면 누군가를 씻겨 준 적은 있는데 정작 자신을 씻긴 적은 없었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실실 웃고는 몸을 씻고, 스스로 몸을 닦고, 옷을 입었다.
그제야 궁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욕탕으로 뛰어왔으나 황제는 개의치 않았다.
"인원 공백을 제때 메우지 못한 점을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이 무례는 당장 목..."
"그만 되었다. 모처럼 좋은 경험이었으니."
상궁이 다급하게 다가와서 은장도로 자신의 목을 찌르려고 하자 황제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 제지하고는 말했다.
"그러니 너무 혼내진 말거라."
"망극하옵니다."
이상하게 붉어진 얼굴로 상궁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 다시 한번 사죄하자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 말라하지 않았느냐. 뭐, 되었다. 이만 가보거라."
이런 자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황제는 쓰게 웃으면서도 그들을 돌려보냈다.
사실 자기 잘못이 크니까.
예전이었으면 이렇게 좋은 경험이었구나 하고 넘길 수 있었을까?
아니, 황제는 알고 있었다.
죽였겠지.
그제야 알았다.
예전에 자신은 엄격한 게 아니라 잔인한 거였다는 걸.
이 정도의 융통성도 발휘하지 못하고 참으로 많은 이들을 죽여 왔다는 걸.
이렇게 사람들을 보면서...
황제는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
"...음?"
다시 눈을 뜬 여휘는 어느새 새하얀 한복으로 갈아입은 자신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누가...
킁킁.
"냄새 좋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복에서 나는 향기로운 냄새에 그녀는 금방 생각을 멈추고는 기분 좋게 웃었다.
향이 좋아서 그런지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여기가 황제의 처소구나.'
그녀는 그제야 이곳이 황제의 처소라는 걸 깨닫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웃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삭막해.'
뭔가 생활감이 전혀 느끼지지 않는 방이다.
사람이 자는 곳인데 그럴 수가 있나? 그녀는 그게 참 신기해서 웃음이 나왔다.
'좀 더 둘러볼까...'
계속 앉아 있으면 다시 잠이 들 거 같아서 그녀는 졸린 몸을 움직였다.
늘 그런 식이었다.
그녀는 조금만 가만히 있어도 금방 잠이 오는 사람이었으니까.
'근데 침대 푹신하다. 내 방도 이럴까?'
그녀는 황제의 침대를 만지작거리면서 생각했다.
그러면 좋겠는데... 만약 황제의 방만 이런 거면 그녀는 차라리 평생 이 방에서 살고 싶었다.
드륵.
그때였다.
그녀가 로라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냉장고를 열어 보고 있을 때 황제가 안으로 들어왔다.
"...예쁘다."
그녀는 상대가 누군지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아름다웠다.
그녀가 본 어떤 여인보다도.
그걸 본 황제는 피식 웃었다.
이젠 저런 반응도 제법 익숙할 정도가 되었으니까.
"그런가?"
"아, 혹시... 폐하신가요?"
그제야 상대가 황제라는 걸 눈치챈 그녀가 슬쩍 눈치를 보았다.
황제는 그녀의 눈을 보고 감탄했다.
시시각각 그 색을 바꿔 가는 그녀의 눈동자는 신비함을 자아냈으니까.
"아름다운 눈이구나."
"네? 아, 그, 그런가요..."
그런 칭찬은 처음 들어서...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는 볼을 긁적였다.
"...왜 그리 보느냐?"
일단 그녀가 열어둔 냉장고를 닫으면서 황제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는 물었다.
이렇게 집요할 정도의 시선은 익숙했지만, 그래도 그 이유는 궁금했으니까.
"그게... 신기해서요. 저 남자는 아버지 말고는 처음 봐요."
그녀는 강족의 보물로 인생의 대부분을 방에서 보냈다.
무엇보다도 그 어떤 사고도 막기 위해서 그녀 주변에 남자는 일절 없었다.
그녀를 경호하는 이들도 전부 여성이었고, 그녀를 도와주는 인물도 전부 여성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그녀가 본 유일한 남성이라고는 지금까지 아버지 한 명뿐이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처음 본 남성이 황제가 너무나 신기했다.
"그렇구나."
"아버지하고는 같은 남자인데 좀 다르네요."
그녀는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뭔가 좀 커요."
"그래."
아버지보다 우선 키가 훨씬 컸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목소리가 굵네요."
그녀는 남자의 목소리는 원래 이렇게 굵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신기했다.
"그리고."
황제가 재미있다는 듯이 반응하며 묻자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음..."
그녀는 황제에게 다가와서는 갑자기 코를 들이댔다.
그리고는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냄새가 조금... 다른 거 같기도."
"그렇구나."
스윽.
그녀는 황제의 몸에 손을 대고는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단단해요. 신기하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른 손으로는 자기 가슴을 만져 보았다.
봉긋하게 솟은 가슴은 만지면 손가락이 푹 들어갈 정도로 부드러웠다.
"이렇게 다르구나..."
그녀는 그런 생각하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남자는 이렇게나 다른 생물이었구나.
그녀는 신기한 기분이 들어서 황제를 보았다.
두근.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
이것도 혹시...
'달라서 일까?'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일까?
그녀는 그런 생각하면서 황제의 얼굴을 감상했다.
'이상하네.'
그녀는 스스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래 지금쯤이면 잠이 올만도 한데...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잠이 오지 않았다.
--
"시작했겠군."
기무자는 지금쯤이면 합궁을 시작했을 거라는 생각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제와 강족의 보물이 결합하면 과연 무엇이 탄생할까?
물론 그 눈엔 부작용도 있다.
어떤 마법이나 주술이든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마법 치료나 주술 치료도 먹히지 않는다는 이야기니.'
괜히 강족의 보물을 그리 귀중하게 관리한 것이 아니다.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아끼고, 더욱 보호한 것이지.
황제가 그걸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을 거야.'
황제는 강하고 명민하다.
당연히 그 정도는 이해하고 있겠지.
기무자는 걱정되진 않았다.
굳이 걱정되는 것이라면...
'...내가 가르칠 수 있다면 가르쳐보고 싶구만.'
그 아이를 자신이 가르칠 기회가 있을까? 하는 우려.
기무자는 그 둘의 결합으로 탄생한 아이를 자신이 직접 가르쳐보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물론...
"강족의 보물과 결합한 내 제자의 아들이면 당연히 내가 가르쳐야지."
저놈이 끼어들 줄 알았지만.
"허허, 막내야. 강족이면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기무자는 그리 말하면서 지팡이에서 칼을 뽑았다.
애초에 이 녀석이 여기에 왔다는 건...
"그런 건 검으로 정해야지."
강상의 덤덤한 말에 기무자는 피식 웃었다.
역시 이 녀석이 심심한 모양이었다. 이런 억지를 부리는 걸 보니 말이다.
"막내가 심심한가보구나. 하긴 검선이 검을 휘둘러야지. 안 그래?"
딸꾹!
기무자가 취기로 달아오른 얼굴로 그리 물으면서 비틀거렸다.
휘익!
그러자 강상이 휘두른 검이 정확히 기무자가 서 있던 곳을 베고 지나갔다.
'역시나.'
강상은 자기 공격을 피해낸 기무자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늘 이런 남자였다.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 종잡을 수 없는 검.
심지어... 그 실력마저도 종잡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기무자였다.
어떤 날은 천선을 상대로도 압도적으로 이기고, 어떤 날은 음선을 상대로도 허무하게 지고는 했다.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구름.
어떤 의미에선 가장 자유로운 신선이 바로 주선 기무자였으니까.
"막내가 몸이 달았구나. 딸꾹! 기다려보거라 지금 나도 몸을 좀 데울 테니까..."
벌컥.
술을 마시면서 그리 말한 기무자는 비틀거리는 검로를 그렸다.
푸아악!
그리고 그 순간 강상의 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끌끌!"
그걸 보면서 웃은 기무자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끼이이익!
강상은 그 검을 비틀고는 발로 기무자를 걷어찼다.
"아프다. 아파. 껄껄."
'저 망할 영감탱이가...'
능청스럽게 웃는 그가 얄미웠으나 이대로 있다간 기껏 싸움을 걸었는데 질판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검선이 검으로 지다니.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기에 강상의 기세가 변했다.
"어우, 무섭구나. 막내야."
기무자는 웃으면서 강상이 매섭게 휘두르는 검을 전부 피해냈다.
참으로 기묘한 움직임이었다.
스스로 압박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가볍게 모든 것을 벗어나기도 했다.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
주정뱅이를 보고 있는 듯했다.
'난처하군.'
예측이 되지 않는 상대다.
강상은 기무자의 움직임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강상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도전할 가치가 있다.
예전부터 늘 만전 상태인 기무자를 꺾고 싶었으니까.
'하여간...'
기무자는 그런 강상의 마음을 읽었다.
어쩐지 갑자기 찾아왔다 싶더니... 이런 점은 참 어린 애 같았다.
"떨꾹! 그러케 놀고 시프면 어우려 주마."
혀까지 돌아갈 정도로 마신 기무자는 강상의 검을 자연스럽게 흘리고는 가볍게 장저로 턱을 올려 쳤다.
우득!
"끌끌!"
바로 공중에서 자세를 잡은 강상이 기검을 날렸다.
그야말로 비처럼 내리는 기검을 기무자는 흐느적거리며 전부 피하고는 술을 마셨다.
"으하... 끝?"
빠직!
기무자의 도발에 완전히 이성이 날아간 강상이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런 강상의 머리엔 저 기무자의 입을 베어버리고 싶다는 생각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