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아앙!"
갓난아기의 울음소리.
"아가야!!!!!!"
군마에 짓밟히는 어린아이를 보며 비명을 지르는 아낙네.
"목숨을 걸고 전선을 사수헤에엣!"
두려움에 질린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전사.
그리고...
푸아악!
그런 그들을 잔인하게 도륙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앞을 막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죽였다.
그것이 바로 증오로 애써 감추고 있던 그의 업이자...
그의 죄였다.
--
"..."
의자에서 잠이 들었던 황제는 눈을 뜨고는 한 손으로 이마를 가볍게 감쌌다.
"얼마나 잠들었었지?"
대체 언제 잠이 든 거지? 황제는 그런 생각하면서 물었고, 그 말에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사하크가 대답했다.
"한 시진 정도 주무셨습니다."
그렇게 오래 잔 건가?
황제는 조금 놀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 꿈이었구나."
그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황제는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황제는 전장에 서 있었다.
거기서...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참으로 참혹했다.
피가 흐르고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시산혈해(屍山血海). 그 말이 참으로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난...'
그곳에서 황제는 웃고 있었다.
죽이고, 죽이고, 죽여서.
그 피로 온몸을 칠갑한 채 웃고 있었다.
"...걱정이구나."
그런 자신이 지금.
그 크릴라이의 여인과 합궁을 해야 한다.
솔직히 황제는 자신이 없었다.
그들에 대한 증오를 버리자 황제에게 남은 것은 자신이 저지른 학살에 대한 죄책감 뿐이었으니까.
"폐하께서도 걱정이라는 걸 하시는군요."
그 말에 사하크가 오히려 놀라서 물었다.
그는 황제 정도의 남자가 걱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그대가 짐을 어찌 생각하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구나."
대충 반응만 봐도 사하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어서 황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짐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결함투성이에... 형편없는 남자지."
"그, 그러시군요."
사하크는 당신이 결함투성이에 형편없는 남자면 대부분의 남자는 쓸모없는 폐기물입니까? 라고 물어보고 싶은 걸 꾹 참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대의 표정만 봐도 헛소리로 여기고 있다는 게 느껴지긴 하구나."
"그, 그게..."
황제가 사하크의 얼굴을 보고 말하자 그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물론 황제는 그것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을 좋게 평가해주는데 호되게 나무라는 것도 이상한 짓이었으니.
"그래... 자네 같이 짐을 좋게 평가해주는 이도 있으니까."
황제는 눈을 감았다.
오랜 증오를 거두자 그것으로 애써 덮어두었던 자신의 죄가 자꾸만 황제의 눈에 밟혔다.
"짐은 참으로 많은 이들을 죽였지."
"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었습니까?"
사하크도 황제가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건 알고 있다.
권력을 위한 숙청, 크릴라이와의 전쟁...
황제는 그 모든 일에서 늘 선두에 섰고, 가장 많은 피를 묻혔다.
"그들도 죽을 건 각오했겠지요. 애초에 각오하지 않고 그런 짓했다면 미련한 짓이고요."
사하크는 그들이 솔직히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덤빌 상대도 보고 정해야지.
이런 괴물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솔직히 사하크는 그들의 죽음은 그냥 자살이란 생각이 들었다.
크릴라이의 그다음 행보는 뭐...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사하크는 그 정도로 평가해주고 싶었다.
"하긴 구르타는 빠르게 짐에게 충성한 민족이지."
"그렇습니다."
구르타의 왕인 쥘라는 현명한 남자였다.
지금 보면 누구의 편을 들어야 이득이 될지 명확하게 볼 줄 아는 남자였다고 해야 하나?
재상이 득세할 땐 그의 편을 들었다가 지금의 황제, 그러니까 그때의 태자가 성인이 되기 무섭게 빠르게 재상과의 관계를 정리했으며, 황제로 즉위하자 바로 충성을 맹세하고 투르크를 병합하려는 딩키족의 움직임에도 반응했다.
결과적으로 딩키족을 막은 것은 황제였지만, 설령 막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딩키족은 투르크를 병합하고 구르타와 아르크, 루루족, 세 곳의 연합군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 전쟁의 승패가 대륙의 정세를 뒤바꿀 중요한 전쟁이 되었겠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구르타는 영원히 폐하께 충성할 것입니다."
"그래야겠지. 안 그러면 짐이 그대를 곁에 둘 이유가 없으니."
오싹.
황제의 가벼운 대답에 사하크는 괜히 떨었다.
가벼운 이야기였지만 그의 귀엔 전혀 가볍게 들리지 않았으니까.
"그보다 미친왕과 이야기를 나눠보았다면서."
궁녀들에게 들은 소식을 황제가 가볍게 물어보자 사하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분께는 많이 배웠습니다."
"...배우지 말거라."
황제는 사하크의 대답에 질색하면서 말했다.
"네... 네?"
그 말에 당황한 사하크가 놀란 얼굴로 되묻자 황제가 다시 강조했다.
"배우지 말도록. 배울 거 없으니까."
"..."
그가 본 미친왕은 요새 제법 철이 들었다고는 하나 배울 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사하크에게 미친왕이 나쁜 물이 들 걸 걱정하던 황제는 지금은 그 반대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황제는 모처럼 가르치는 맛이 있는 부하한테 이상한 물이 드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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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걱정했잖아. 그럼 그냥 예정대로 진행한 건가?"
엘리자베르는 투덜거리면서도 아네스를 살펴보았다.
한눈에 봐도 얼굴부터가 밝아졌다.
지금의 아네스는 그 어떤 일에도 웃을 거 같이 기분이 좋아 보였으니까.
"어머, 죄송해요. 울보가 제 걱정을 많이 했나 보네요. 울진 않았나요?"
"아, 안 울었거든?"
"울긴 했습니다."
엘리자베르가 바로 부정했으나 레오니는 덤덤하게 사실을 고했다.
실제로 엘리자베르는 어제 아네스를 걱정하면서 눈물을 훔쳤으니까.
"레, 레오니!"
"혹시 아네스한테 무슨 일은 생긴 게 아닌지 걱정했으니까요. 아무튼 합궁 중이었다니 다행입니다."
레오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네스를 보았다.
확실히 그녀는 지금 얼굴에서부터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이제 합궁도 마지막이네요."
아네스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커피를 타고 있었다.
그녀의 폭이 넓은 붉은 드레스가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게 물결쳤다.
가볍고 편해 보이는 물결무늬 원피스를 입은 엘리자베르는 유일하게 이곳에서 바지를 입고 있는 레오니를 보면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레오니는 치마를 안 입네."
"굳이 입을 필요가 없습니다. 애초에 훈련할 때 너무 팔랑거리는 옷은 불편하고요."
실제로 레오니는 오늘 아침도 황제와 대련하고 온 참이었다.
여화는 최근에 뭔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인지 혼자서 명상을 하는 시간이 길어졌으니까.
"뭐... 너답다면 다운데..."
엘리자베르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조금 불만스러워 보였다.
"난 레오니가 이런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은데."
"굳이 볼 필요가 있습니까?"
역시 너무 딱딱하다.
엘리자베르는 그 대답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엄청 예쁠 거 같은데 그런 수수한 옷만 입으니까 뭔가 서운해서 그래. 내가 산 옷이 하나 있거든? 레오니한테 정말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어때? 입어볼래?"
"...제가 그런 옷을 입으면."
폐하께서 좋아하실까요?
뒷말을 삼키면서 레오니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예전에 한 번.
그러니까 합궁을 할 때 레오니는 원피스를 입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폐하께서 칭찬해주신 것은 자기 이 머리색.
그리고 근육이었지 옷차림이 아니었다.
폐하께서 좋아하지 않으시는데 굳이 그런 거추장한 옷을 입을 필요는 없었다.
"제법 잘 어울리긴 하더구나."
"...!"
그때였다.
어느새 뒤에서 나타난 황제가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폐하!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꼬리가 있으면 세차게 흔들 거 같은 기세로 바로 황제에게 달라붙은 아네스가 묻자 황제가 식탁 위에 들고 온 샌드위치를 올려 두었다.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짐이 계속 집무실에서 먹으니까 사하크가 너무 눈치를 보는 거 같더구나."
이대로면 눈치 없는 상관인 거 같아서 황제는 그에게 식사하라고 말하고는 혼자 가볍게 식사할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들이 눈에 보이기에 인사라도 할까 해서 온 것이었고.
"그러셨군요. 그럼 같..."
"그럼 같이 식사해요. 저도 샌드위치 좋아하거든요!"
샌드위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엘리자베르가 아네스의 말을 끊으면서 제안하자 황제는 피식 웃으면서 그대로 그녀 옆에 앉았다.
"그래, 많으니까 얼마든지 먹거라."
"그럼 잘 먹겠습니다!"
엘리자베르가 바로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서 먹기 시작하자 황제는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봐주고는 자신도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사락.
그러고는 다른 손으로 이번 경연을 위해서 읽고 있던 책의 책장을 넘겼다.
"정말이지... 식사할 땐 식사에 집중해주세요."
그걸 보고 아네스가 잔소리를 했으나 황제는 태연했다.
"괜찮다."
"하여간... 아무튼 우리도 먹을까요?"
황제에게 이 이상 잔소리를 해봐야 듣지 않을 게 뻔하기에 체념한 아네스는 손에 묻지 않게 조심스럽게 샌드위치를 집어서는 작게 베어물었고, 레오니는 그런 아네스를 보면서 자신도 샌드위치를 하나 집었다.
"저기... 폐하."
"?"
황제는 레오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덤덤하게 반응했다.
"왜 그러느냐."
"그게... 정말 어울렸습니까?"
레오니는 궁금했다.
그 말대로... 정말 그런 옷이 자신에게 잘 어울렸는지... 레오니는 확인받고 싶었다.
"그래, 잘 어울리더구나."
"그, 그렇군요."
레오니는 시원한 황제의 대답에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한참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그러고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내 엘리자베르에게 말했다.
"그 옷... 입어봐도 될까요?"
"정말? 정말 입어 주는 거야?"
레오니의 말에 엘리자베르가 잔뜩 신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엘리자베르의 반응에 움찔한 레오니가 곧 조금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입어보고 싶습니다. 그때... 그러니까... 그게..."
한참을 머뭇거리던 레오니가 용기를 내서 황제에게 말했다.
"그... 폐하께서도 봐주시면 해서."
"그래, 보도록 하마."
화아악!
그 말에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으로 레오니가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너무 귀엽잖아요.'
저렇게 감정이 눈에 보이다니 너무 귀여운 거 아닌가?
아네스는 그런 생각하면서 생글거리며 커피를 마셨다.
정말이지... 귀여운 친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