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되십니까?"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탄 사유우이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손을 만지작거리자 그런 그녀 앞에 앉아 있던 아파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너무 티가 났나요?"
사유우이는 순순히 인정하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거짓말일 것이다.
당장...
그녀는 지금 누가 건드리면 그대로 숨이 멈추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으니까.
일부러 챙겨 입은 전신을 가리는 새하얀 크릴라이의 전통복엔 말이 새겨져 있었다.
말.
거친 황야에서 그토록 강인한 말을 키워내는 능력은 크릴라이의 자부심이었고, 제국이 크릴라이에게 유일하게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만큼 크릴라이에겐 얼마 되지 않는 목초지가 중요했고, 그래서 제국과 크릴라이의 전쟁도 그 목초지를 중심으로 벌어지고는 했다.
제국을 크릴라이가 공격하는 이유는 그곳에 있는 비옥한 땅을 얻어 목초지를 늘리기 위해서.
크릴라이를 제국이 공격하는 이유는 말을 빼앗기 위해서.
둘을 무려 300년이 넘는 역사를 그렇게 싸워왔으나 정작 그 기나긴 분쟁을 끝낸 것은 복수에 미친 황제였다.
그는 스스로 친히 금위대를 이끌고 친정했고 금위대는 제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공격해온 크릴라이의 군세를 순식간에 전멸시키고 오히려 크릴라이로 진군했다.
노도와 같이 치고 들어오는 황제를 크릴라이는 막지 못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그 결과는 황제 앞에 쌓이는 크릴라이의 시체 뿐이었으니까.
그 학살은 확실하게 황제에 대한 공포를 심어 주었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크릴라이는... 결국 제국에게 굴복하기로 결정했다.
'당신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일까요?'
도망치면서... 보았던 황제의 얼굴을 사유우이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피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
피로 축축해진 검은 옷.
그리고... 어딘가 슬퍼 보이던 그 금색의 눈동자.
그녀는 의아했다.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 있으면서, 입은 분명 웃고 있으면서...
그 눈은 왜 그리도 슬퍼 보였는지.
사유우이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
레오니가 옷을 갈아입는 걸 봐주고 돌아온 황제는 집무실에 여전히 쌓여 있는 서류를 보았다.
오늘은 왠지 모르겠지만...
"일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이만 쉬어도 좋다."
"네?"
사하크는 그 황제의 입에서 오늘 일은 여기까지라는 말이 나오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황제가 일을 쉰다고?
"오늘은 뭔가 일하고 싶지 않은 날이구나."
황제는 생각할 게 많아서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지금, 이 상태로 일하는 건 무리였다.
당장 황제는 식사 중에 읽었던 책의 내용도 기억이 가물가물했으니까.
"그럼 가 보겠습니다...?"
진짜 가도 되나? 사하크는 그런 생각하면서도 물러 갔고, 황제는 집무실에 혼자 남아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겼다.
황제가 향한 곳은... 늘 심란할 때 찾던 무덤도, 가장 좋아하는 정자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폐하께서 이곳을 찾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황실에 마련된 천신을 섬기는 신전이었으니까.
그곳을 담당하고 있던 신녀는 그 황제가 이곳을 찾았다는 사실에 꽤 놀란 눈치였다.
하긴... 사직 때를 제외하고는 찾아오는 법이 없던 황제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당장 황제도 스스로 이곳에 왔으면서 왜 이곳으로 향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냥... 신이라도 의존하고 싶은 날이라서."
뭔가 그 이유를 찾지 못한 황제가 대충 변명하자 신녀는 미소를 지었다.
"후후, 그런 불경한 말을... 뭐, 폐하시니까요. 그러면 기도실을 비워드릴까요?"
신녀는 그 말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제안했다.
"...그래 주면 고맙겠구나."
그 제안을 황제가 받아들이자 신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준비가 끝났으니 들어가셔도 됩니다."
황제는 허락이 떨어지자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안쪽에 있는 기도실 문을 보고 황제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다.
새하얀 바닥.
그리고 중앙에 자리하는 신검의 모조품.
진짜인 천지인은 황실에서 따로 관리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도실에 가득한 천기를 느끼면서 황제는 조금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일단 가만히 기도실에 정좌하고 앉았다.
'천신이라...'
황제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다만... 그녀가 정말 신이라면. 황제는 그녀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어째서 저였습니까?'
천무제가 말했다.
그녀가 선택한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고.
그렇다면 어째서...
자신이었던 걸까?
황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하필 이런 잔인하고 볼품없는 남자를 선택한 걸까?
신이라면 어째서...
황제가 그런 생각할 때였다.
[당신이... 가장 저와 닮았기 때문이겠죠.]
"...!"
천기가 모이기 시작하더니 누군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아름다운 금발이 글게 늘어지고, 여성스러운 곡선이 느껴지는 몸이 생겨났다.
그리고... 완전히 형태를 되찾은 날카로운 인상의 여인이 그 신비한 황금색 눈동자로 황제를 친근하게 보고 있었다.
저 모습은...
'나...?'
황제는 놀랐다.
눈앞에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천기를 받아들인 자기 모습이었으니까.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후후, 당신은 닮았으니까요.]
그 의문을 읽은 여인이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애초에 이 아이가 선택받은 이유를 생각하면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당신은 저를 닮았어요. 제국을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할 수 있는 당신이. 그래서 제가 바로 당신을 선택한 거랍니다.]
"당신은...."
그제야 황제는 그녀의 정체를 눈치챘다.
이 여자가 바로...
[천신. 이었다고 해야겠죠? 이젠 그조차도 아니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천신... 이었다.
그녀는 분명하게 과거형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천신은 이제 당신이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그 말을 황제는 부정했다.
"전 신이 아닙니다."
[아뇨. 신이예요. 당신은 오라버니에게 말했지요. 인간에게 이젠 신이란 낡은 존재는 필요가 없다고.]
'듣고 있었던 건가?'
황제는 그녀의 말에 놀랐으나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말이 옳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직 인간에겐 의존할 존재가 필요해요.]
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
[천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나요? 사람들이 의존할 대상을 원했기 때문이예요. 제가 신이 되고 싶다고 해서 신이 된 것이 아니랍니다. 인간이 신을 원했기에 제가 신이 된 것이죠.]
그녀는 신이 되고 싶었지만 그녀가 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신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들이... 그녀를 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은 이미 훌륭한 신이랍니다. 스스로 부정한다고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솔직하게 말했다.
인간들이 신을 만드는 거라면... 자신은 더욱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스윽.
어느새 다가온 그녀의 손이 황제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모르는 척을 하는 걸까요?]
"..."
황제는 침묵했고, 그녀는 그런 황제에게 말했다.
[당신은 과거에 사로잡혀 있군요. 두려운가요? 과거를 마주 보는 것이.]
"...두렵습니다."
황제는 솔직하게 말했다.
신의 앞에서 굳이 속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당신은 마주 보려고 하겠죠.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마치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그리 말한 그녀는 황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천천히 고민하도록 해요. 저는...]
스르륵.
그녀는 서서히 사라지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전 늘 당신 안에 있으니까요.]
사아악.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진 천신이 천기가 되어 황제의 안으로 스며들었다.
"..."
황제는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왜 갑자기 자기 앞에 나타난 거지? 애초에 개념으로 변했다는 그녀가 어떻게 이렇게 이성을 가지고...
"대화는 잘하셨나요?"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거지?"
기도실을 나서자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걸어오는 신녀를 향해 황제가 물었다.
"전 신녀랍니다."
그녀의 대답에 황제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공허한 두 눈.
신의 뜻을 보기 위해서 스스로 빛을 포기한 여인.
신녀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방금 그 대답으로 이거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짐이 이곳에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냐."
바로 그녀가 자신이 이곳에 올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알고 있었습니다."
"..."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황제는 그녀에게 더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신전을 떠날 뿐이었다.
'천신의 뜻이었다고...?'
자신이 오늘 갑자기 신전으로 향한 것부터가 이미 천신의 뜻이었다...?
그렇다는 건...
'천신은...'
다시 존재하게 된 거라고 보면 되는 건가?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겠다.
개념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던 천신이 어떻게 다시 의지를 가지게 된 거지?
황제는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넘어가기로 했다.
우선은...
'과거를 마주 봐야 한다... 인가.'
그녀의 말대로 지금은 과거를 마주 봐야 할 때였으니까.
--
"신기한 일이지 않나?"
설육은 바둑을 두면서 중얼거렸다.
천선이 관리하던 천기가 스스로 안정을 되찾았다.
이게 의미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명확했다.
"누군가..."
"천기를 제어하고 있다. 그리 봐야겠지."
설육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건... 대충 누구인지 짐작이 가능했으니까.
"하여간... 천신께서도 참으로 짓궂으시군."
천신이 깨어났다.
설육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강상도 비슷한 생각인 거 같았다.
"천신께서 돌아오다니... 천선은 이것까지 알고 있었나?"
"모르지... 그 친구가 우리에게 그리 친절한 녀석도 아니었고."
애초에 신선이라는 존재도, 선계도, 모두 천신의 뜻으로 만들어졌으니...
그들은 천신의 뜻도, 의도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천신은 아직 인간에게 신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
설육은 그리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이제 자신들의 역할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으니까.
--
"드디어 도착했네요."
사유우이는 어느새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 황궁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드디어 때가 왔으니까.
사유우이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면서 황궁을 보았다.
"다 잘 될 겁니다."
아파리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위로해주었다.
다 잘 될 거다.
사유우이는 그 말에 웃어 주었다.
"네, 분명 잘 될 거예요."
'적어도 제 목숨 하나로 끝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사유우이는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설령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사유우이는 그와 마주 볼 각오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