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사유우이는 궁녀들의 안내받아 도착한 황제의 처소를 살펴보며 작게 떨었다.
그녀는 이제 정말 황제를 마주할 때가 다가왔다는 것이 두려웠다.
곱게 땋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면서 고개를 저은 사유우이는 가볍게 자신의 뺨을 때렸다.
짝!
붉게 달아오른 뺨을 차가운 손으로 식히면서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정신 차리자.'
여기서 공포에 질려 있을 시간은 없다.
애초에 황제에게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이는 결례를 범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녀는 정신을 바로잡으려고 애썼다.
조금 차분해진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 안을 살펴보았다.
'이게 황제의...'
그녀는 황제의 방을 둘러보면서 감탄했다.
황제의 방은 넓고, 침대는 푹신하며 각국에서 온 진귀한 장신구들이 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특히 이질적으로 생긴 냉장고를 보고 사유우이는 바로 관심을 보였다.
'차가워. 안에는... 물?'
냉장고를 열어 보고 안이 시원한 것에 놀라던 사유우이는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정말 신기한 게 많았다.
'이건 뜨거운 바람이... 후후, 따뜻하네.'
벽에 걸려 달려 있는 단추를 누르니까 따뜻한 바람이 나왔다.
'저건 검? 저건 상아인가?'
대충 둘러봐도 진귀한 물건도 참 많았다.
그런 생각하면서 일단 바람을 끈 그녀는 자기 옷을 살펴보았다.
일단 궁녀가 입히는 대로 입었는데 프릴이 잔뜩 달린 검은 원피스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사유우이는 신기하다는 듯이 한참 그렇게 옷을 구경했다.
'이런 옷도 있구나.'
이런 옷은 처음 봤다.
물론 사유우이 취향에 맞는 옷은 아니었다.
아파리는 잘 어울린다고 말해줬는데...
정작 사유우이는 이렇게 화려한 옷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옷을 갈아입고 싶을 정...
'약한 소리를 해선 안 되는데.'
그것도 잠시 다시 사유우이는 정신을 바로잡았다.
자꾸만 약해지려고 한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당장 궁녀들이 입혔으니 그 이유가 있을 텐데.
그녀는 자꾸만 이런 약한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저벅. 저벅.
'온다.'
그때 처소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사유우이는 마치 놀란 토끼처럼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무거운 발소리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똑똑.
"들어가마."
가벼운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언제 들어도 참으로 듣기 좋은 저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들은 목소리는 조금 달랐다.
뭔가...
'다정해.'
그때 들었던 목소리와 다르게 참으로 다정했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던 목소리와 달랐다.
그래서...
"들어오세요..."
기대하게 되어 버린다.
사유우이는 약간의 기대를 담아서 안으로 들어온 황제의 얼굴을 보았다.
제대로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다.
그녀는 황제의 얼굴을 멀리에서만 봤으니까.
다만... 그 멀리에서도 참으로 슬픈 얼굴이란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분명 그녀가 봤을 때 황제는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이 참으로 슬펐던 걸로 기억했으니까.
그 얼굴은...
'이런 얼굴이었구나...'
이리도 말끔한 얼굴이었구나.
그렇게 많은 이들을 죽인 공포스러운 존재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겉으로 보기엔 두려울 요소가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래... 그 오고파이의 딸이라고."
덜덜.
막상 황제가 다가와서 말을 걸자 사유우이는 온몸이 덜덜 떨리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두려웠다.
황제의 입에서 증오의 말이 나올까봐 두려웠다.
사실은 아직 우리들을 용서하고 못했다고 말할 것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멈칫.
애처로울 정도로 덜덜 떠는 그녀를 보면서 다가가던 황제가 멈칫했다.
"...두렵구나. 짐이."
"그, 그것이..."
말해.
그렇지 않다고 말해!
사유우이는 공포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말하려고 했다.
그렇지 않다고, 이건 그저... 추워서 떨리는 거라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제발 용서해달라고.
저희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달라고 빌어야 했는데...
"...두렵습니다."
그런 사유우이의 입에서 나온 건 그런 말이 아닌 전혀 다른 말이었다.
두려웠으니까.
용서를 구하는 것조차 두려웠으니까.
그녀는 황제의 눈을 본 순간 도저히 거짓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
'이게 정상이겠지.'
황제는 자신을 보면서 애처롭게 떨고 있는 사유우이의 모습에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그녀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봐온 자신은... 그야말로 피에 미친 괴물이었으니.
황제는 그녀의 두려움을 이해했고, 공감했으며...
그렇기에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을 뻗어도, 말을 걸어도, 그 무엇을 해도 그녀가 두려워할 거 같았으니까.
"폐하는... 어떠신가요?"
덜덜 떨고 있던 그녀의 질문에 황제는 그대로 침묵했다.
"..."
황제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햇볕에 적당히 탄 흰 피부, 작은 체구, 그리 부드러워 보이지 않는 거친 회색 머리카락.
나름 열심히 땋긴 했지만 솔직히 워낙 머리카락이 거칠어서 그런지 그리 어울려보이진 않았다.
옷은 꽤 화려 했는데 특이하게도 양식만 놓고 보면 저기 프리아에서 입을 법한 옷이었다.
참으로 작고, 인형 같은 여인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애처롭게 떠는 그녀의 모습에 황제는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
"참으로 작구나."
그녀를 평가하면서 황제는 그 회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에 그녀가 조용히 눈을 내리 깔았다.
"절...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사유우이의 질문에 황제는 생각했다.
그녀를 보면서 자신은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걸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두렵구나."
두려웠다.
황제는 그녀의 존재가 너무나도 두렵고,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네?"
그 대답에 사유우이가 놀라서 황제를 보았다.
그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으니까. 사유우이는 스스로가 들은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쓰게 웃었다.
"그대에게 하려는 말은 다 정리해 두었거늘. 막상 앞에 서니 이리 두렵구나."
이미 다 정리해 두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대로만 말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바보같이... 그게 그렇게 간단히 정리될 리가 없는데.
마음 같아선 그녀와 이렇게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그냥 도망쳐서...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황제는 자신의 죄를 이렇게 마주 보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으니까.
'그러면 안 되니까.'
그러나 도망쳐선 안 된다.
그게 이 자리니까. 황제는 다시 용기를 내서 그녀를 보았다.
참으로 작고 여린 여인이었다.
예전엔 사실 크릴라이의 여인을 눈앞에 두는 게 다른 이유로 두려웠다.
처음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거 같아서, 그래서 그녀를 헤할 것 같아서. 그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하지만 나중에 증오를 거두고 보니...
황제는 그들에게 지은 죄 때문에 그녀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입을 열어서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아.
황제는 몇 번을 망설였지만... 결국, 힘겹게 입을 열어 그토록 두려워하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미... 미안하구나. 그대들에게. 짐이 저지른 학살에 대해서 사죄하마."
"...!"
그 말을 들은 사유우이의 눈이 이보다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떠졌다.
사유우이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그 황제의 입에서... 설마 사과의 말이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진심... 이신가요?"
솔직히 그녀는 황제가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적어도 그녀의 대에서 늘 먼저 공격해온 것은 크릴라이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당연히...
"사죄는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자신과... 그리고 크릴라이가 황제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려웠다.
황제가 자신들의 사죄를 받아주지 않을 거 같아서 무서웠다.
"그러니까... 크릴라이의 모두를 대표해서 존엄하신 폐하께 지금, 이 자리를 빌어 사죄드립니다."
꾸벅.
그녀는 그대로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과했다.
"감히 제국을 향해 이를 드러낸 점, 폐하께 누를 끼친 점, 그리고... 그런 폐하의 소중한 사람을 앗아간 그 모든 것을 사죄드리고 싶어요."
황제가 먼저 사과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과도 받아주겠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녀는 그런 조금 치사한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하려고 했던 말을 내뱉었다.
"..."
황제는 그녀의 반응에 눈을 감았다.
정말 생각도 못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래, 그대도 같은 생각이었구나."
황제는 그녀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네요."
그녀 역시 마음이 편해졌다.
황제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서 그런 걸까?
그제야 사유우이는 황제를 제대로 마주 볼 수 있었다.
그 슬픈 눈은 여전했지만...
확실히 이젠 그 괴물의 얼굴이 아니었다.
인간의 얼굴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황제의 눈이 왜 슬펐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사람이었으니까.
미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기에 미친 가여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런 슬픈 눈을 하고 있었던 거구나...
사유우이는 그런 생각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앞에 황제를 안아버렸다.
그런 황제가 너무나도 불쌍하고, 그렇기에 안쓰러워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고 말았다.
"...!"
그 행동에 황제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는 그녀를 보았다.
사유우이는 황제를 꼭 껴안은 채 말했다.
속에 상처가 많은 거 같은 황제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이젠... 다 괜찮아요."
다 괜찮다고. 이젠 더 이상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용서해줘도 된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괜찮... 다고."
그런 그녀를 보면서 황제는 작게 중얼거렸다.
뭐가 괜찮다는 걸까?
황제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꼬옥.
황제는 그것에 대한 질문 대신 그녀를 그대로 안아주었다.
그는 이 온기를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그녀에겐 어쩌면 방금 그 말은 정말 의미가 없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황제에겐 다르게 들렸으니까.
그 말은 마치 그녀가 자신을 이해해주고 있는 거 같아서. 그 말이 자신을 위로해 주는 거 같아서...
황제는 그녀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