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부터 눈을 뜬 소년은 이불을 정리하면서 작게 하품했다.
"...흐아암."
참으로 고운 얼굴이었다.
피부는 백옥처럼 희고 고왔으며, 머리카락은 눈부시게 반짝이는 비단같이 고운 금색이었다.
머리에 달린 앙증맞은 크기의 황금색 뿔과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금색의 세로동공 눈동자는 소년에게 용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늘 일정은?"
"네, 아침엔 태자태사의 교육을 받으셔야 하고요. 중식 이후엔 폐하와 면담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 후 석식을 드시고 나면 개인 공부 시간이십니다."
그 말에 기다리고 있던 무사가 바로 대답했다.
"...빡빡하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빡빡한 일정이었다.
소년.
아니 이 천제국의 태자인 진명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입었다.
"길명."
"네."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 무사에게 태자는 말을 걸었다.
"지금이라도 면담은 안 하고 싶다고 하면 폐하께선 뭐라고 하실 거 같아?"
태자는 사실 아버지를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면담이라고 해봐야 사실 잔소리를 듣는 시간이었으니까.
"으음... 직접 찾아오실 거 같은데요."
길명의 대답에 태자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럼 못 피한다는 거네?"
"그렇죠."
길명의 시원한 대답에 태자는 그런 길명을 살짝 노려 봐주었다.
수수한 외모에 얼굴엔 주근깨까지 있는 참 흔하게 생긴 남자였다.
하지만 그 정체는 무려 무과에서 황제의 인정을 받고 금위대에서 초고속으로 승진을 거듭해 차기 백부장으로 거론되던 남자였다.
뭐... 애초에 그런 남자니까 태자의 호위 무사를 하는 거지만.
솔직히 태자도 자신과 이름이 같은 이 신하가 생각 이상으로 마음에 들긴 했다.
아마도 자신이 정말 황제가 된다면... 금위대장을 맡을 녀석은 이 녀석 말고는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오라버니! 공부하러 가시나요?"
그때였다.
양갈래로 묶은 새하얀 은발이 인상적인 귀여운 소녀가 해맑게 웃으면서 태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참으로 특이한 눈동자였다.
오른쪽은 황족의 상징인 금안이었는데... 왼쪽은 자색이었으니까.
물론 태자에겐 꽤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 한나는?"
다름 아닌 자신의 동생이었으니까.
"저도 마법 공부하러 가요! 어마마마가 오늘은 좀 더 어려운 마법을 가르쳐 준다고 해서 기대 중이랍니다."
"그렇구나."
해맑게 웃으면서 오늘 배울 마법에 대해서 떠드는 그녀를 보면서 태자는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다.
'부럽네.'
그녀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태자는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고명한 현자에게 친히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특권인지 그녀는 알고 있을까?
태자도 그렇게 마법을 배워보고 싶었지만 지금 현자께선 자신의 모든 것을 딸에게 전수한다는 이유로 다른 제자는 받지 않고 있었다.
"한나는 마법보단 주술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현자님의 뜻이 그렇게 강하시면 어쩔 수 없지. 그보다 좋은 아침이네. 잘 잤어?"
그때였다.
마법보단 주술이 더 낫다고 확언한 소녀가 당당하게 걸어오면서 말을 걸었다.
뒤로 길게 늘어진 붉은 머리카락은 마치 타오르는 불꽃을 보는 것처럼 강렬했다.
제법 봉긋하게 솟은 가슴과 어른스러운 미형의 얼굴 때문인지 성인 여성으로 착각하기 쉬운 소녀였다.
이제 막 지학을 넘긴 나이인데도 어른스러워서...
태자는 그녀와 살아온 세월은 고작 몇 개월 차이 밖에 안 나는데도 그녀가 누님 같단 생각을 했다.
"아니, 제 얼굴을 보면 모릅니까?"
물론 겉으로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 누님은 걱정이란다. 미래에 제국을 다스릴 태자가 몸 관리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니 말이야."
그 대답에 리타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곱게 모으면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끄시길. 리타나 누님한테 걱정 받을 정도로 나약하진 않습니다."
태자의 까칠한 대답에 리타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흑흑! 누님이 걱정해주는데도 그런 소리를. 이 누님은 서운해서 정말이지 눈물이 나려고 하는구나."
장난스럽게 눈물을 훔치는 리타나를 보면서 태자는 한숨을 쉬었다.
"눈에서 눈물이나 흘리고 말하시죠?"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그러고 보니 테히드가 널 찾던데."
움찔!
테히드가 언급되자 태자는 몸을 움찔했다.
사실 서로 형님 누님 하고 있지만 무엇을 숨길까?
리타나와 태자, 그리고 한나, 테히드는 개월 수만 차이 날 뿐 나이는 차이 나지 않았다.
그나마 셋은 서로 누님, 오라버니 하면서 나름 위계가 잡혀 있었지만...
"셋 다 뭐 해?"
이 녀석은 달랐다.
나이도 같은데 뭐 그렇게 복잡하게 구냐고 주장한 녀석은 공평하게 모두에게 반말하고 있었다.
보기 좋은 구릿빛 피부, 반짝이는 금안.
갈색 머리를 댕기 머리로 묶고 있는 밝은 인상의 소년이 친근하게 태자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태자는 솔직히 녀석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너무 활동적이라고 해야 하나?
솔직히 태자와 그는 성향이 맞지 않았다.
"진명! 오늘 공놀이 어때? 어마마마가 좋은 공을 주셨거든. 이거 봐. 예쁘지?"
손에 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공을 자랑하면서 테히드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자 태자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공놀이라니 피곤하게...
"미안. 오늘은 놀 시간이 없네. 내일은 어때?"
그렇다고 동생과 안 놀아주기도 그랬기에 태자는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그래... 하긴. 넌 태자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오늘은 동생들이랑 놀게. 그럼 내일 놀자!"
테히드는 아쉬워하면서도 그대로 빠르게 사라졌고, 태자는 정신이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여간 정신 없네."
너무 활발해서 부담스러운 녀석이다.
태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테히드의 어머니는 정숙하고, 상냥하신 분인데... 그 아들이란 녀석은 누굴 닮았는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활발한 아이였다.
"공감이야."
리타나도 드물게 동의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저러다가 사고라도 치면 어쩌지? 리타나는 그런 불안을 담아서 한숨을 푸욱 내쉬고 있었고, 한나는 그런 둘을 보면서 해맑게 웃었다.
"제가 눈을 붙여뒀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여차하면 테히드 오라버니는 제가 막을게요."
"저기. 눈이라니? 그거 감시 마법이지? 혹시 나한테도..."
한나의 말에 묘한 불안을 느낀 태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으나 한나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머, 벌써 시간이.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자, 잠깐! 젠장..."
불길한 느낌 밖에 안 들어.
태자는 그런 생각하면서 눈을 빛냈다.
"진짜 붙였잖아! 뭐 이런 동생이..."
자신에게 붙어 있는 감시 마법을 보고 경악한 태자는 감시 마법을 남들도 볼 수 있게 기로 표시하고는 길명에게 명령했다.
"베어버려!"
"네? 아, 예!"
서걱!
길명의 검이 빠르게 뽑히더니 태자에게 붙어 있던 감시 마법을 깔끔하게 베어 버렸다.
"정말이지... 누님은?"
"?"
"...아, 하긴 누님한테는 의미가 없겠네."
리타나의 어리둥절한 반응에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리타나의 화기는 그녀의 어머니인 나르타 비 전하를 넘어선 지 오래다.
어지간한 마법이나 주술은 그녀에게 붙으려는 순간 타버릴 것이다.
"뭔가 날 괴물처럼 보고 있는 거 같은데 착각일까?"
리타나가 그런 태자의 시선을 보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자 태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착각이지요. 착각!"
딱!
그때였다.
태자의 머리를 누군가가 커다란 곰방대로 그대로 후려쳤으니까.
"누가 내 머릴..."
머리를 맞고 화를 내려던 태자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대로 얼어 버리고 말았다.
"쯧. 누구겠니."
태자는 리타나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었지만 리타나는 어느새 도망친 상태였다.
"제자야... 분명 7시 전엔 오라고 누차 이야기했던 거 같은데?"
오싹!
그제야 태자는 벌써 시간이 7시를 넘겼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변명했다.
그런 태자의 앞에는 호랑이를 연상케 하는 무서운 인상의 노인이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스, 스승님? 그게 말이죠. 형제들이 자꾸..."
"변명은 듣지 않겠다. 한 나라의 지존이 될 사람이 스승과의 약속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어찌 천하를 다스리겠느냐."
노인의 말에 태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솔직히 별로 황제가 되고 싶..."
"헛소리를 할 정신이 있으면 책이나 더 읽거라!"
그 말에 바로 소리를 떽 지른 태자태사.
강상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윈래 그가 가르치고 싶었던 아이는 강족의 보물이었지만... 지금은 태자에게 욕심이 났다.
우선 무재가 출중했다.
솔직히 말해서 재능만 놓고 보면 황제 다음이라고 봐도 무방할 무재였다.
근골도 타고났다.
솔직히 지금의 황제는 근골은 타고나지 않았지만 노력으로 극복한 경우라면 이 태자란 놈은 딱히 단련하지도 않았는데 근골이 발달한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용인의 강인한 신체는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주술에 대한 재능?
그 눈에 있는 화안금정 자체가 녀석의 주술에 대한 재능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거늘.
이 녀석은 도대체가...
"주술도 싫다. 검도 싫다. 공부도 싫다. 황제도 싫다. 뭐 하려고 이러느냐!"
이런 재능을 가지고도 의욕도, 목표도 없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음... 숙부처럼 그냥 유유자적 사는 건... 안 되나요?"
빠직!
그 말에 강상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미친왕처럼 난이나 치면서 놀고먹겠다고?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 강상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너에게 필요한 건 교육이 아니라 정신 개조겠구나."
"네? 자, 잠시. 스승님? 스승님!"
태자는 다급하게 스승을 진정시키려고 애썼으나 강상은 그대로 태자의 뿔을 잡고는 질질 끌고 가며 말했다.
"정신부터 고쳐주마. 길명아! 당장 회초리를 가져와라."
"네."
"가져오지 마! 가져오지 마!"
태자가 애원했으나 길명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교육 중에는 태자태사님의 명을 더 우선하라는 폐하의 명이 있으셨기에..."
"배신자!"
태자가 배신감이 깃든 눈으로 길명을 보았으나 길명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는 회초리를 가져 왔다.
궁에서 태자의 비명이 한동안 메아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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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야... 아파."
점심 식사를 하면서... 너무 맞아서 벌겋게 부어오른 엉덩이를 의식하며 태자는 눈물을 글썽였다.
엉덩이를 회초리로 여러 대 맞은 태자는 오늘은 교육 대신 지루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황제가 되기 싫다는 게 그렇게 잘못이야?"
"...어쩔 수 없죠. 장자로 태어나셨으니."
길명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리 말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사시는데 누가 황제가 되고 싶겠냐고..."
황제인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도 황제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없을 거다.
적어도 형제 중에선 아무도 없었다.
태자는 자신이 장자라는 이유로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떠맡아야 한다는 사실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난 그렇게 못 살아."
하루에 업무만 10시간을 넘게 보는데 누가 하고 싶을까? 적어도 일단 태자는 아니었다.
"폐하께 그리 말씀드려보시는 건?"
길명의 제안에 태자는 멈칫했다.
"...그래볼까?"
태자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떼라도 써볼까?
어쩌면...
--
"헛소리를 할 시간이 있으면 글이라도 더 읽거라."
그러나 그런 태자의 바람은 바람처럼 흩어졌다.
황제가 그 부탁을 더 들어 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잘랐으니까.
사각. 사각.
그 부탁을 간단하게 거절한 황제는 수려한 글씨체로 상소에 대한 답장을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태자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감탄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나이가 올해로 블혹에 가까워지고 있거늘.
그 얼굴은 전혀 그 나이 대의 어른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태자는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 아버지만큼 잘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일단 자리에 앉거라. 좀 더 이야기는 들어 줄 테니까."
황제는 답장을 적는 걸 끝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타면서 말했다.
"길명아. 너도 마실 테나?"
"업무 중엔 사양하고 싶습니다."
길명이 황제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자 황제는 피식 웃었다.
"어릴 땐 격식이 없더니 많이 변했구나. 그때처럼 형이라고 불러도 괜찮은데."
황제의 장난스러운 말에 길명이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길명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간담이 서늘한 기분이었다.
"그, 그때는... 너무 철이 없었던 겁니다. 제가 어찌 폐하께 그런 무례를..."
덜덜 떠는 그를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은 황제는 태자 앞에 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아쉽구나. 모처럼 형 소리 좀 듣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래, 황제가 되기 싫다고?"
"...네. 폐하."
태자는 조심스럽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황제가 인상을 살짝 찡그리더니 말했다.
"아버지. 지금은 사석이지 않느냐."
호칭 정정을 요구하는 황제를 보면서 식은땀을 흘린 태자는 바로 말을 바꾸었다.
"네, 아버지..."
"그보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
"...?"
황제는 복잡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고, 태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누가 하면 되겠느냐. 널 대신할 아이를 말해 보거라."
"리타나 누님도 있고."
"그 아이는 확실히 뛰어난 주술사이나 황제에 적합하지 않구나."
"...테히드는."
"그 아이에게 제국을 맡기는 게 말이 된다 생각하느냐?"
"호명이도 있고, 사이도 있는데..."
"본인이 말하고도 자신이 없구나."
황제의 덤덤한 말에 태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뭐라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그 아이들 중 황제가 되고 싶다고 한 아이가 있느냐?"
"...없습니다."
알고 있었다.
호명이는 어머니를 뛰어넘는 위대한 무인이 되고 싶다고 했고, 사이는 자기 부족으로 돌아가서 주술사가 되기 위해 쳇코족의 비술을 배우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태자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30명이 넘는 형제 중에서 황제가 되고 싶은 형제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이 아비가 천년만년 제국의 황제로 남을 수는 없지 않느냐."
"어차피 안 늙으시는 거 같은데 그러시는 것도..."
따악.
황제는 태자의 중얼거림을 듣고는 바로 딱밤을 먹여주었다.
"아야야! 아픕니다!"
"다행이구나. 아프라고 때렸는데."
태자의 엄살에 황제는 그리 말하고는 커피를 마셨다.
황제는 솔직히 조금 서운했으니까.
"아버지가 고생하는 걸 보면 얼른 장성하여 그 고생을 덜어 줄 생각해야지... 놀고먹을 생각만 하는 아들을 보니 이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는 아버지를 보니 태자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눈앞에서 신하가 할복 자살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황궁을 그 피로 더럽혔으니 일가족을 유배 보내라 명령하시던 분이 그래 봐야 연기로 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 아비는 네가 태어난 날 산 하나를 무너트릴 정도로 기뻐했는데..."
"그거 농담으로 안 들리니까 그런 말씀 하지 말아 주세요."
다른 사람이 산을 무너트렸다고 하면 농담으로 들리지만 눈앞에 있는 아버지가 말하니 도저히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기에 태자는 진심으로 부탁했다.
"농으로 들렸느냐? 원래 저기에 산이 있었단다. 그 산에 있던 전망대에서 보는 야경이 참으로 보기 좋았는데 너무 기쁜 나머지 실수를 해 버렸지."
"...네?"
저기에 산이... 있었다고요?"
지금은 건물이 들어서 있는 곳을 보면서 태자가 멍한 표정을 짓자 황제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그래서 지금은 상가를 조성해 둔 거란다."
"..."
태자는 실수로 산을 허무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랍고, 그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는 사실이 경악스러웠다.
그런 태자의 얼굴을 보면서 잔잔한 미소를 짓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좋아. 아들아. 황제가 되지 않아도 좋다."
"...! 정말입니까?"
태자가 황제의 말에 놀란 눈으로 묻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검으로 이 아비를 꺾는다면 뜻도 같이 꺾어 주마."
"..."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황제가 내건 조건에 태자는 침몰했다.
누굴... 꺾는다고?
아버지를? 자신이?
그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 그건 말도 안 되잖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다.
그런 생각에 태자가 억울한 얼굴로 항변하자 황제는 커피를 마시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원하면서 왜 말도 안 된다고 하느냐."
"..."
그 말에 태자는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 말에 담긴 뜻은...
자신이 아버지를 검으로 꺾는 것보다 황제가 되지 않는 것이 더 말이 안 된다는 뜻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