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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226화 (226/235)

"허허, 그러셨군요. 포기하세요."

황제와 면담을 마치고 집무실을 나올 때 금위대장과 마주친 태자는 오늘 있던 일을 이야기했으나 들려오는 대답은 포기하란 말뿐이었다.

"고집이 심하신 분입니다. 절대 뜻을 꺾을 분이 아니죠."

몇 년이 지나도 그 외모가 변할 일이 없어 보이는 금위대장은 태자와 같은 화안금정을 반짝이며 실실 웃었다.

"금위대장이 말해도 안 될까?"

"황태후 폐하의 황후 폐하까지 달려들어서 말해도 안 꺾으실 겁니다."

금위대장의 확답에 태자는 체념해 버렸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무르다는 건 황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다.

그런 어머니가 말해도 의미 없다는 건 적어도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그 뜻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보다 딸 아이가 전하를 보고 싶어 하던데...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우리 귀여운 딸 아이에게 대체 무슨 유혹의 마수를..."

금위대장이 호들갑을 떨면서 말하자 태자는 한숨을 쉬었다.

수희와는 그냥 가끔 만나서 이야기만 나눴을 뿐 딱히 무슨 짓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럴 리가요! 길명아. 사실대로 고하자. 우리 수희가 아빠보다 전하가 더 좋다는데 이게 말이 되니? 뭔가 사술을 쓰신 게 틀림없다고!"

"...사술을 쓰셨으면 대장님이 알아보지 않았겠습니까? 화안금정은 엿 바꿔드신 것도 아닐 텐데요."

하여간 저 팔불출...

길명은 그런 생각 하면서 까칠하게 대답했고 금위대장은 발끈했다.

"그 말은 뭐야! 너 지금 대장한테 어? 집합 한 번..."

"모용진."

움찔.

길길이 날뛰려던 금위대장은 그대로 굳었다.

황제가 있는 집무실에서 금위대장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호들갑 떨지 말 거라. 못난 아비보단 당연히 잘난 친척 오라버니가 더 호감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냐."

밖으로 나온 황제가 그런 금위대장에게 냉정할 정도로 차갑게 말하자 금위대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떨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 수희가 그런 생각할 리가..."

'하여간...'

딸만 관련되면 저렇게 변해 버리는 금위대장을 안쓰럽게 쳐다봐준 태자는 황제가 자신이 잡아둘 때 얼른 가라는 듯이 손짓하자 바로 금위대장을 두고는 떠났다.

"뭔가 피곤하다... 식사 전에 한숨 자도 될까?"

괜히 팔불출한테 말을 걸었다가 피곤한 일을 당했다.

태자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물었다. 일단 다음 일정 전에 한숨 자고 싶었으니까.

"그럼 식사 전에 깨워드리겠습니다."

길명의 대답에 태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뭔가...

엄청 피곤한 하루였다.

--

"으음..."

무언가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태자는 조용히 눈을 떴다.

"어? 일어났다냐."

바로 앞에 들리는 귀여운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을 이미 알고 있는 태자는 피곤한 얼굴로 두 눈을 감싸면서 말했다.

"시르. 이 오라버니 피곤해."

"오늘 놀아주기로 약속했다냐!"

"....그랬니? 내일로 해."

태자의 가슴을 그 앙증맞은 두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시르가 말하자 태자는 귀찮은 얼굴로 대답했다.

"내일은 테히드 오라버니랑 놀기로 한 거 다 알고 있다냐!"

"젠장... 그건 또 어디서 들어서."

작게 투덜거린 태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떴다.

그러자 검은 머리의 작고 귀여운 묘인이 태자를 보면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황족의 상징인 금안은 크게 반짝거렸고, 흰 털로 복슬복슬한 발에 있는 분홍색 볼록살은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말랑해 보였다.

그야말로 작고 귀여운 묘인.

정확히는 혼혈이지만.

아무튼 이 묘인은 태자에겐 두 살 아래인 동생이기도 했다.

"그래, 그래, 뭐하고 놀까?"

"냐! 책 읽어달라냐!"

그 말에 바로 동화책을 들고 온 시르가 눈을 반짝거리자 태자는 졸린 눈으로 작게 하품을 하고는 동화책을 펼쳤다.

그걸 본 시르는 바로 태자의 무릎에 앉아서는 동화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옛날, 옛날에 가난한 농부가 살았어요."

동화의 내용은 참으로 진부했다.

대충 내용만 요약해주자면 가난한 농부가 뱀에게 잡아먹힐 뻔한 까치를 구해주고 보답을 받아서 부자가 되었다는 내용일까?

이딴 책의 교훈이 뭘까?

태자는 그런 생각 하면서도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시르를 보고 있자니 대놓고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럼 가 보겠다냐!"

그녀가 원하는 대로 책을 실컷 읽어 주고 나서야 만족하고 떠나는 시르를 보면서 태자는 피곤한 표정으로 누웠다.

"나 이제 잘 수 있어?"

"곧 식사 시간이십니다."

길명의 대답에 태자는 눈물을 훔쳤다.

이럴 거 같더라...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난 태자는 슬픈 눈으로 말했다.

"열차표 끊어 줄래? 갑자기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고 싶은 기분이 되어서."

가출하고 싶다.

태자는 그런 생각이 간절해졌다.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길명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태자는 식사를 위해서 움직였다.

황제는 자식들 중에서 태자를 집중적으로 신경 썼다.

당장 저녁을 늘 같이 먹는 자식도 태자가 유일할 정도였으니까.

"하하! 호명 형님! 그러다간 자세가 무너진다고요!"

태자가 밖으로 나가니 소년 둘이서 치열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호명이라 이름 불린 검은 머리의 소년은 이미 무너진 자세로 앞에서 자기 키만 한 대검을 휘두르는 적금발의 소년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빅토뤼!"

결국 완전히 자세가 무너져 대검에 무기를 잃은 호명은 분한 얼굴로 소년을 올려다보았고, 소년은 씨익 웃으면서 태자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형님! 봤죠? 제 실력? 이야, 할아버지가 칭찬해준 이 검기. 두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 그래. 대단하네."

호들갑을 떠는 소년을 보면서 태자는 대충 칭찬해주었다.

저 무거운 대검을 고작 12살짜리 소년이 젓가락처럼 휘두르는 근력은 확실히 범상치 않았고, 무엇보다...

"헨리. 넌 대체 뭐가 되려고 그렇게 크냐?"

고작 12살짜리 소년이 8척에 가까운 키라니. 다 자라면 얼마나 커질지 가늠이 되지가 않았다.

"헤헤. 할아버지처럼 커지는 게 목표입니다."

헨리는 그나마 그 나이 때 소년처럼 해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잘생긴 얼굴로 저리 웃으니까 보긴 참 좋은데... 가끔 녀석을 보고 있자면 12살짜리 소년이 맞나 의문이 들곤 했다.

"할아버지... 처럼 말이지."

헨리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태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녀석의 할아버지라면... 국경 방위 사령관을 말하는 걸텐데 그 거구를 생각하면 녀석의 목표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젠장!"

그때 호명이 분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째서 못 이기는 거지?"

단련은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어머니에게 검술도 꼬박꼬박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왜 못 이기지?'

호명은 헨리와 시오니를 도저히 이기지 못했다.

그게 호명은 답답했다.

"조급하니까. 그렇지."

그때 둘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백금발의 소녀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차가운 인상의 무뚝뚝한 얼굴.

귀여운 얼굴이었으나 쉽게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였다.

"넌 너무 흥분해. 방금도 자세부터가 무너졌잖아. 여화 비 전하께서 그리 가르치진 않았을 텐데?"

"닥쳐! 우리 어머니에 대해서 뭘 한다고!"

"잘 알걸? 너보단."

찌릿!

둘이 싸우기 시작하자 태자는 한숨을 쉬고는 그대로 개입했다.

"시오니. 너무 그러지 마. 호명이도 다..."

"형은 빠져!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 단련도 안 하는 놈이."

호명이 태자를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그는 태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만한 재능이 있는데... 어째서 검을 잡을 생각을 안 하는 거지?

자신에게 그런 재능이 있었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호명은 태자를 볼 때 마다 그런 부분에선 화가 났다.

"갑자기 나한테 불똥이 튀네... 너 지금 너무 흥분..."

원래 저런 놈이 아닌데 최근 연패를 거듭하다 보니 예민해진 모양이다.

태자가 그런 생각을 하며 호명을 진정시키려고 다가갈 때였다.

"닥쳐! 당장 검을..."

"호명."

사아악...

흥분한 호명이 태자에게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머니."

호명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검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어머니.

그 말에 태자는 그제야 그쪽에 시선을 주었다.

차분한 눈동자로 이곳을 보고 있는 검은 머리의 여인.

잘 단련된 육체, 강자의 기운을 풀풀 풍기는 저 미인이 바로 호명의 어머니이자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무인으로 평가 받고 있는 환여화 비라는 건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여화 비께서 이곳에..."

태자는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태자는 그녀와는 조금 서먹한 사이였다.

"태자. 제 아들이 너무 무례하게 군 것을 사과드리겠습니다. 부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지요."

"아, 아뇨. 뭐... 상관없습니다."

"참으로 사려가 깊으시군요. 그럼..."

사아악.

여화의 눈이 무서워졌고,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그 눈에 태자는 몸을 떨었고, 헨리는 슬쩍 눈치를 보았다. 시오니조차도 여화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호명은...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여화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이니 일희일비하지 말고 자신을 단련하는데 집중하라 가르치지 않았니? 이 어미의 가르침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거 같아서 참으로 서운하구나."

"그, 그것이... 죄송합니다."

호명은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로 사과했고, 여화는 머쓱하게 서 있는 헨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헨리의 검은 훌륭했단다. 앞으로도 더욱 정진하도록 하렴."

"네! 감사합니다."

여화의 칭찬에 헨리는 기분 좋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시오니. 다 좋은데 남을 도발하는 버릇은 고치는 게 좋겠구나. 싸우고 싶으면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신청하렴."

"죄송합니다..."

시오니는 자기 심리를 읽는 거 같은 여화의 말에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둘이 겨루는 걸 보니 몸이 달아서 괜히 호명을 도발한 게 사실이었으니까.

"태자. 아직도 검을 쥘 생각은 없는 건가요?"

"...네."

태자의 대답에 여화는 노골적으로 아쉬워했고, 호명은 태자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쉽네요. 정말. 레오니도 참으로 아쉬워했답니다."

무인이라면 모두가 가르쳐보고 싶어 할 무재거늘.

베베라도, 키린도 태자를 가르쳐보고 싶어 할 정도의 무재를 타고 났으면서 정작 태자는 무술에 영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 의욕이 없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여화는 아쉬웠지만... 그래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태자의 뜻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태자는 이제 폐하와 식사하러 가시나요?"

"네, 그렇습니다."

"...힘들겠네요. 폐하께서도 다 태자를 아끼기에 그런 말을 한다는 걸 알아주세요."

식사 시간에도 이어지는 잔소리를 생각하면 그 말을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자신을 아낀다는 건 태자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자, 그럼 가볍게 검부터 휘둘러볼까? 자세를 잡아줄 테니까 휘둘러보거라."

여화가 세 명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태자는 그 모습을 잠깐 봐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여화 비께서 가르치시나 보네."

"레오니 비 전하께선 토너먼트 참가를 위해서 이탈리로 가셨으니까요."

태자의 말에 길명은 가볍게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비토바르 토너먼트가 곧이던가?

태자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왜 레오니 비께서 보이지 않았는지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 그러고 보니 너 왜 막을 생각도 안 했냐?"

호명이 검을 휘두르는데도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던 길명을 떠올리며 태자가 묻자 길명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여화 비 전하께서 오고 계셨으니까요."

"근무태만!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말한 그 형 이야기는 뭐야? 난 처음 듣는데?"

태자의 호기심이 가득한 질문에 길명이 움찔했다.

"그, 그건..."

"전부터 아는 사이였나? 아버지랑?"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처음엔 당황했던 길명은 이내 딱히 숨길 이야기는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순순히 입을 열었다.

"혹시 황해 사건을 기억하시는지요? 전하께선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일이긴 합니다만."

황해 사건.

그 말에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인간 크기의 메뚜기들이 관서 지역을 습격했던 그거 말인가? 끔찍했다던데?"

가장 최근에 있던 황해 사건은 태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던 일로 무려 인간 크기의 황충이 창궐하여 한동안 관서 지방이 기아에 허덕일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황제가 복구에 총력을 다 했음에도 전부 복구하는데 5년이 걸릴 정도였다고 하니...

그 피해 규모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폐하께서 절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꿈을 주셨지요."

그때부터였다.

길명은 그 강함을 동경하게 되었고, 그 강함에 이끌려서 무인의 길을 택했다.

평민이 무과에 급제해 성까지 받으면서 태자의 호위 무사가 된 것은 모두 폐하의 은덕 덕분이었다.

"그러니 전하께서 위험하시면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드리겠습니다. 제 목숨은 폐하께서 주신 거니까요."

"부담스럽다야."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 주겠다니.

그런 충성을 기대한 건 아니었기에 태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괜히 분위기만 무거워졌네. 미안하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느낀 태자가 그리 말하고는 빠르게 걸어 나갔다.

'자신이 없네...'

솔직히 태자는 자신이 없었다.

자신은 저런 인물이 목숨을 바쳐서 지킬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태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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