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말이다. 오늘은 일찍 자거라. 내일 바로 이동해야 할 테니."
고기 산적을 집어 먹으면서 황제가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식탁 위에는 생선 구이와 간단한 나물 무침, 고기 산적 등이 올려져 있었는데 황제의 식탁이라고 보기엔 의아할 정도로 소박하였다.
그런 소박한 식단에도 전혀 의문을 품지 않던 태자는 생선의 뼈를 바르면서 황제의 말에 의아함을 표시했다.
"이동이라니요?"
"철곡 지방을 감찰하고, 금년 지원 규모를 정하는 일을 너한테 맡기고 싶구나."
황제의 말에 태자는 깜짝 놀랐다.
감찰이라니.
그런 일을 자신에게 맡길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
"어머니는 알고 계십니까?"
"쯧."
태자의 질문에 작게 혀를 찬 황제가 태연하게 말했다.
"자꾸 태자는 아직 어리니 뭐니 시끄럽게 굴길래. 독단으로 정했다."
"...난리가 나겠네요."
태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또 둘이 싸우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지만...
"아! 저 내일 약속이 있는데요. 테히드랑 놀아주기로..."
"테히드한테는 이 아비가 말해 두마."
'미안. 테히드.'
그 말에 태자가 속으로 테히드에게 사과했다.
테히드가 이 황궁에서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으니까.
내일 그 사실을 전하러 간 아버지를 보는 순간 테히드가 벌벌 떠는 모습이 벌써 눈에 그려질 정도였다.
"아무튼 준비하거라. 호위는... 길명이 혼자서는 부담이겠지. 믿을 수 있는 아이를 붙여줄 테니 둘이서 태자와 그 일행을 잘 보호하거라."
"명을 받습니다."
길명이 바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황제는 태자에게 말했다.
"식사가 끝나면 잠시 걸을까?"
"...네."
마음 같아선 그냥 자러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할 정도로 태자는 담이 크지는 않았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황궁을 가볍게 걸었다.
태자는 그런 황제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철곡으로 갈 때 같이 갈 사람이 있단다."
"...?"
누구지?
말하는 걸 봐서 호위는 아닌 듯했으니까.
"미르예프 비가 같이 가고 싶다기에 그리 하라 했단다. 하긴 모처럼 일족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가니까. "
"아... 그렇군요."
미르예프 비라면 가끔 만나면 과자 같은 걸 잘 주는 사람이었던가? 순한 인상에다가 아름답고 고운 분이라 기억에 남았다.
"카예프도 같이 동행할 거 같으니 동생을 잘 챙겨 주거라."
"그 아이도 가는 겁니까?"
그 말에 태자는 눈을 크게 떴다.
카예프는 올해로 7살이다. 아직 그런 추운 곳으로 가기엔...
"그러니까 호위를 늘린 것이지."
"아..."
하긴 아버지가 고작 자신 한 명을 지키는데 길명 혼자서는 힘들다고 평가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지켜야 할 인원이 늘었다면 호위를 늘리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태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제에게 물었다.
"일정은 어느 정도를 예상하고 계십니까?"
"그건 네가 정하거라. 그보다... 호명 황자가 태자에게 검을 휘둘렀다면서."
움찔!
"그, 그 녀석도 나쁜 뜻이 아니었을 겁니다. 아무래도 거듭된 연패로 민감해져서..."
호명을 걱정하여 태자가 변명하기 시작하자 황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태자에게 검을 휘두르다니... 이 일은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 판단했단다."
'...어쩐지.'
갑자기 걷자고 하더니.
태자는 도착한 곳에 양팔을 묶인 채 꿇어 앉아 있는 호명을 보고는 몸을 떨었다.
"호명아. 짐이 왜 널 여기에 묶어두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느냐?"
"...모르겠습니다."
호명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고, 황제는 그 대답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안타깝구나. 짐이 바라는 것은 그런 대답이 아니었는데."
"끅!"
황제의 기세가 그대로 호명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호명은 황제가 흘리는 기세에 짓눌려 침까지 흘리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무방비한 태자를 향해 검을 휘두르다니. 반역의 죄임을 알고 있느냐? 짐은 가슴이 아프구나. 피가 이어진 자식을 이리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호명은 덜덜 떨면서도 감히 황제에게 대항할 생각조차 품지 못했다.
그만큼 살벌한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황제가 스스로를 아버지가 아닌 짐이라고 칭한 이상 그 판단에 사적인 감정은 배제하겠다는 의미였기에 그 상황은 심각했다.
"폐하!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행동입니다. 부디 자비를..."
그런 황제를 보면서 태자가 무릎까지 꿇으면서 빌었다.
그러나 황제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기강이 서지 않으면 제국이 무너진다. 짐은 아버지 이전에 황제란다. 제국을 무너트릴 행동을 하는 죄인을 혈육이라는 이유로 용서할 수는 없구나."
태자를 무시하는 행동을 황제가 그저 지켜만 본다면 제국의 기강이 어찌 서겠는가?
말로 무시하는 것까지 처벌할 정도로 비정할 생각은 없었으나 비무장인 태자에게 검을 휘두른 일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태자야. 네가 할 것은 비는 것이 아니란다."
황제는 차가운 눈으로 그리 말했고, 태자는 그 눈을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
태자는 그제야 황제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그는 다급하게 길명에게 말했다.
"검!"
"...네?"
"얼른!"
태자가 다급하게 외치자 길명은 바로 검을 넘겨 주었고, 그 순간 어느새 황제의 손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검이 태자를 향해 휘둘러졌다.
카앙!
"그래... 잘 알고 있구나."
후들. 후들.
태자는 그 검을 양손으로 막아낸 채 팔을 덜덜 떨었다.
저리 가볍게 휘두른 검을 막았는데도 온몸이 덜덜 떨린다.
태자는 눈앞에 선 아버지가 얼마나 강한지 실감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눈을 보면서 황제가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태자. 자비는 강자만이 베풀 수 있는 것이란다. 자비를 베풀고 싶으면..."
어느새 회수된 황제의 검이 그대로 태자의 목을 노렸다.
끼이익!
태자는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검로를 비틀어서 흘러냈다.
길명과 호명은 그 말도 안 되는 기예에 눈을 크게 떴고 황제는 그런 태자의 반응에 웃었다.
"그래, 그렇게 힘을 증명해야지."
덜덜.
떨고 있는 태자를 보면서 황제는 검을 거뒀다.
"짐의 검도 이렇게 쉽게 막을 정도면 동생이 휘두른 검 정도야 장난이었겠지. 형제들의 장난을 처벌할 수는 없으니 이번은 넘어가도록 하마."
어느새 깔끔하게 잘려 있는 호명의 포박을 보면서... 태자는 정말이지 아버지가 성격이 참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이건 그냥 보여주기식 처벌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황제가 원한 것은 감히 태자에게 검을 휘두른 자식을 용서할 수 있는 명분이었다는 것을.
태자는 알아버렸으니까.
"허억... 허억..."
"괜찮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호명을 보며 태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고마워."
호명은 그런 태자를 보면서 작게 감사를 표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귀까지 붉어질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호명을 보면서 어깨를 두드려 준 태자는 사람을 시켜서 호명을 돌려보냈다.
"악질이십니다. 꼭 그렇게까지..."
연기였던 뭐던, 호명은 오늘 아버지가 했던 일을 늘 떠올리고 두려워하게 될 거다.
그런 생각에 태자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하자 황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해야지 뒷말이 안 나오지. 이 아비의 의도를 잘 읽고 따라줘서 고맙구나."
황제는 검을 뒤에 있던 무사에게 넘겨 주고는 태자에게 말했다.
"참으로 아까운 무재구나."
황제는 자기 검을 막아 내던 태자를 떠올리면서 말했다.
태자가 아니었다면 분명 무인으로 키웠을 거다.
그만한 재능이 태자에겐 분명 있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고작 그거 막았다고 벌써 팔이 후들거린다고요."
그러나 태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아버지가 휘두른 검을 흘리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실력으로 검을 쥐어봐야...
"고작이라..."
황제는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저 아이는 알까?
방금 황제가 휘두른 검은 어지간한 무사는 제대로 반응하기조차 힘든 검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걸 제대로 단련하지도 않은 소년이 막아 놓고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다니.
저 검을 고작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이미 태자의 재능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장 그 헛소리를 듣고 있던 길명은 태자의 재능에 욕이 나올 거 같았으니까.
"그럼 들어가서 공부하고 쉬거라."
아무튼 할 일은 끝났으니 이제 쉬어도 좋다.
황제는 그리 말하고는 떠났고 태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무사해서 다행이다."
오늘은 왜 이렇게 일이 많은 거 같은 기분이지? 태자는 피곤한 얼굴로 방으로 돌아가서 공부하기 위해서 책을 펼쳤다.
"...안에 있니?"
그때였다.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태자는 책을 덮고는 대답했다.
"네, 어머니."
태자는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갔기에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열자 보인 것은 화려한 금색의 뿔을 자랑하는 여인이었다.
편한 옷차림에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이 사람이 바로... 태자의 어머니인 황후였다.
예전과 비교해도 전혀 나이를 먹지 않은 그 얼굴은 용인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지만...
태자는 어머니의 얼굴에 담긴 걱정을 읽어내고는 말했다.
"내일 떠난다면서? 괜찮니? 싫으면 싫다고 말하렴! 이 엄마가 어떻게든 해볼게!"
"아, 아뇨 그건 딱히 상관없는데요."
솔직히 가고 싶은 쪽에 가까웠다.
"황궁 안에만 있으면 따분하잖아요."
태자는 황궁에서 벗어나 다른 경험을 하고 싶었으니까.
"그, 그래... 다행이다. 그이가 억지로 보내는 거라면 절대 허락할 생각 없었거든."
황후는 그 말에 진심으로 안도하면서 그 커다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황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태자를 꼬옥 끌어안았다.
"이렇게 어린아이를 자꾸만 엄하게 가르치니까. 이 엄마는 늘 걱정이야."
"...아니, 이젠 마냥 어린아이는 아닌데요."
태자는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이 나이 먹고 어머니 품에 안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창피했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믿어 줘야겠지. 잘 다녀오렴. 길명. 태자를 잘 부탁해요."
황후가 진심을 담아서 길명에게 부탁하자 길명은 덤덤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목숨을 걸고 전하를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그 대답에 황후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시간만 뺏은 거 같아서 미안하네. 그럼 공부 열심히 하렴!"
언제 걱정했냐는 듯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 황후가 사라지자 태자는 피곤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버렸다.
"아... 오늘 뭔가 엄청 피곤한데?"
완전히 지쳐버린 태자는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을 거 같았다.
잠깐이었는데도 어머니를 상대하는 건 어떤 의미에선 아버지 이상으로 피곤했으니까.
"그럼 주무십쇼."
그런 태자의 모습에 오늘 공부는 무리라 판단했는지 책에 책갈피를 꽂고 덮어둔 길명이 등불을 끄면서 말했다.
"응... 고마워. 길명."
태자는 자신을 제대로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 주는 길명을 보면서 감사 인사하고는 잠이 들었다.
그렇게...
태자의 고된 하루도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