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부터 눈을 뜬 황제는 옆에 누워 있는 오르테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헤헤... 사랑해. 나도."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거지?'
실실 웃고 있는 오르테가의 얼굴을 보면서 황제는 피식 웃고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어제는 오르테가였고, 오늘은...
'뭐, 아무나 오겠지.'
황제는 상대를 고민하다가 그냥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알아서 잘 정하는 거 같으니까.
옷을 갈아 입고, 나갈 채비를 끝낸 황제는 오르테가가 깨어나지 않게 조용히 밖으로 나와서 걸었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조정에 도착하기 무섭게 황제를 반긴 것은 재상이었다.
이젠 제법 나이가 있어서 은퇴를 원하는 듯하나... 황제는 그런 그의 사직서를 벌써 10번째 반려 중이었다.
"그래, 그보다..."
"네, 태자 전하께선 오늘 출발하셨습니다."
벌써 가 버린 건가?
조정에서 태자를 찾던 황제는 아쉬움을 느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태자를 밖으로 보낸 것은 본인이었으니까.
서서히 다른 대관들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황제는 슬슬 회의를 시작했다.
벌써 사직서가 3번 반려된 대장군 브레드는 조금 피곤한 얼굴로 보고를 이어 나갔고, 다른 대관들 역시 초췌한 얼굴로 회의를 진행했다.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건 황제였다.
황제는 그들의 안건을 주의 깊게 듣고는 결정을 내렸고, 추가 근무를 지시했다.
그럴 때마다 그 지시를 들은 부서의 장관들은 사색이 되고는 했다.
"그럼 금일 회의는 이쯤에서 끝내고..."
황제는 회의를 끝내고는 바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회의가 끝났으니 이젠 늘 하던 단련을 할 시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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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봐도 멋있으세요."
황제는 단련을 끝내고는 바로 여화와 하루 단련을 마무리 짓는 대련하고 있었다.
그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은발의 여인이 그 색이 다른 두 눈을 반짝이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당장 이곳에 있는 여인 중에서 가장 눈에 뛸 정도로.
여화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지친 얼굴로 말했다.
"여전히 행복해 보이네. 아네스."
잰 나이를 안 먹나? 여화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전히 주름 하나 없는 아네스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요. 폐하를 늘 곁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어찌나 행복한지..."
아네스는 그리 말하면서 황제에게 바로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고맙구나."
수건을 받아 든 황제는 흐르는 땀을 닦고는 쓰러져 있는 여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쁘지 않구나."
"...전혀 위로되지 않는데요."
여화는 툴툴거렸지만 그래도 황제의 손을 외면하지 않고 잡았다.
그녀는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싫지 않았다.
"그럼 더욱 정진하거라."
황제는 베베라와 키린, 가비도 없어서 비어 있는 운동 기구가 가득 들어찬 곳을 한 번 봐주고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물을 마셨다.
최근 비토바르에서는 종목을 확장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었고, 최근엔 궁술과 격투 분야에서의 대회도 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현재 그 대회에 초청을 받고는 비토바르로 향한 상태였다.
"그럼 오늘 밤은 기대할게요? 오늘은 저랑 사유우이, 그리고 엘리자베르랍니다."
아네스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 밤에 보자꾸나."
황제는 아네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예전과 딱히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 외모는 더욱... 아름다워진 거 같기도 했다.
"새삼 반하셨나요?"
그런 황제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네스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묻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황제가 긍정해주자 아네스는 눈에 띄게 기뻐하면서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저도 그렇답니다."
"정말 깨가 쏟아지네요."
그런 둘을 보면서 여화는 조금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런 애정 표현은 조금... 낯부끄럽다고 해야 하나?
"그러는 여화 씨도 침대에선..."
"그, 그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건데요!"
아네스가 작게 중얼거리자 여화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쳤고, 아네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폐하. 정무 시간입니다."
그때 눈가에 살짝 주름이 있긴 했지만 여전히 그 미모를 잃지 않은 안경을 쓴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미인이 황제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 가야지."
황제는 그리 말하고는 그녀의 뒤에서 그녀의 옷자락을 잡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검은 머리를 뒤로 묶어서 정리한 똑똑해 보이는 아이였다.
"민희야. 공부는 잘하고 있느냐?"
"네, 폐하. 지금은 비 전하 옆에서 업무를 배우고 있었사옵니다."
"..."
황제는 그런 어른스러운 대답에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소녀를 보았다.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이 귀여운 소녀는 이제 8살은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 보였다.
실제로는 그보다는 조금 많아서 10살 정도였지만.
"아버지."
황제는 호칭 정정을 요구했고 민희는 그런 황제를 보더니 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폐하를 어찌 그리 가벼이 부르겠습니까?"
"...황명이다."
황제는 딸에게 이런 자리에서도 폐하라 불리기 싫은지 억지를 부렸고, 민희는 그런 황제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말했다.
"설령 소녀의 목을 거두신다고 하여도 그 명을 따를 수 없을 거 같사옵니다."
"...하여간. 누굴 닮아서 이리 고집인지."
그 고집에 황제가 조금 서운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미령은 웃었다.
"그건... 폐하가 아닐지요?"
미령은 그런 황제를 보면서 그리 말하고는 민희에게 말했다.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불러 주거라. 신하의 예를 다 했으면 자식의 예를 다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겠니?"
"네,... 어머니."
민희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제에게 말했다.
"아, 아버지."
막상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부끄러운지 민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고, 황제는 기쁜 듯이 그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그래. 맞다. 테히드는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느냐?"
"테히드 오라버니라면... 아마도 지금은 온실에 있지 않겠습니까?"
민희의 대답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령에게 명했다.
"잠시 테히드와 이야기하고 올 테니 미리 준비해 두고 있거라."
"네, 그럼... 가자. 민희야."
미령이 민희를 데리고 떠나자 황제는 온실을 향해 걸었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자기 뒤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상선을 향해 황제가 가볍게 말을 걸었다.
"짐의 자식 중 눈여겨보고 있는 아이가 있느냐?"
"제가 감히 어찌 그분들을 평가하겠습니까?"
상선이 손사래를 치자 황제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짐은 그대의 의견이 듣고 싶구나."
상선은 황제의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역시 태자 전하가 아닐지요."
"그런가..."
하긴 황제의 마음에 차는 아이도 몇 명 되지 않았다.
태자를 제외하고 굳이 뽑자면 장녀인 리타나? 그리고 헨리 정도일까?
리타나는 모두를 포옹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있었고, 헨리는 누구하고도 쉽게 친해지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성정을 타고 났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황제는 어느덧 자신이 온실에 도착했다는 걸 깨닫고는 온실의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다.
"역시 대단하세요!"
"그래? 세헤라자드 씨의 아들은 착하네."
온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들리는 목소리에 황제는 의문을 느끼면서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자 여전히 전혀 관리가 안 된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타흘라가 아이들 앞에서 주술로 만든 얼음 나비를 춤추게 하고 있었다.
관리를 전혀 하지 않은 것 같음에도 그녀의 미는 여전히 쇠하지 않았고, 몸매도 전혀 무너지지 않은 게 황제 입장에선 참으로 신기하긴 했다.
"아름다운 광경이구나."
"폐하잖아. 여긴 어쩐 일이야?"
타흘라는 황제를 보기 무섭게 반가워하더니 바로 황제에게 다가왔다.
"정말이지. 요새 로라 때문에 쉬질 못한다니까... 당장 오늘도 공방으로 출근하라고..."
안 그래도 로라가 잔소리 해서 오래 쉬진 못한다면서 투덜거린 타흘라는 그대로 황제에게 안겨 왔다.
"로라 좀 어떻게 해주면 안 돼? 난 이제 일하기 싫다고."
자기 품에 안겨서 칭얼거리는 타흘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준 황제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기로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그보다... 테히드."
움찔!
황제를 보자마자 도망치려던 테히드는 황제가 그를 부르자 그대로 멈칫했다.
"아, 아버... 아니 폐하 그게..."
"태자는 철곡으로 보냈으니 미안하지만 오늘 약속은 못 지킬 거 같구나. 여차하면 이 아버지가 대신 놀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
"아하하하! 폐하! 까였네."
테히드가 바로 도망쳐 버리자 타흘라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고, 황제는 들고 있던 공을 내려놓고는 자신을 보고 있던 조그마한 소년한테 물었다.
"디무란. 이 아버지가 혹시 무서우냐?"
"...?"
디무란이라 이름 불린 금색이 섞인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검은 머리의 귀여운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서워하는 건 일부지 않을까? 적어도 디무란은 아닐 거 같은데. 이 엄마를 닮아서 말이야. 그렇지?"
"...?"
타흘라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웃는 얼굴로 말하자 디무란은 다시 고개를 갸웃했고, 타흘라는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내 아들이지만 나도 잘 모르겠네."
속을 알 수 없는 아이라고 해야 하나? 저 천안으로 대체 무엇을 보고 있을지 참으로 궁금한 아이였다.
타흘라는 그렇기에 자기 아들을 뭐라고 평가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뭐, 무서워하진 않는 거 같긴 하구나."
황제는 자기 손길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디무란을 보면서 그리 말하고는 온실에서 나왔다.
"아버지! 아버지! 이거 보세요! 멋지죠!"
그때였다.
새하얀 은발이 인상적인 잘생긴 소년이 황제의 품으로 뛰어들더니 그림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런 소년의 커다란 금안은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튀르에. 음..."
황제는 엉망진창인 인물화를 보고는 잠시 할 말을 골랐다.
머리는 일단... 검은 거 같긴 한데. 눈. 저건 눈인가? 아무튼 금색이고...
일단 생명체를 그린 거 같긴 한데... 대체 무얼 그린 건지 짐작이 가지 않는 참으로 개성적인 그림이었다.
"개성적인 그림이구나. 누굴 그린 거니?"
"아버지요! 멋지죠?"
"...그래, 멋지구나. 어머니한테도 자랑하렴."
황제는 차마 못 그렸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고 튀르에는 아버지의 그 말에 기쁜 듯이 뺨을 비벼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자랑할게요!"
자식 중에서 황제를 가장 따르는 편인 튀르에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제의 볼에 입을 맞춘 뒤에 떠났다.
'아네스가 어떤 평가를 내릴지는...'
뭐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 그린 그림에 혹평을 하진 않겠지.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집무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미령이 서류를 정리해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이게..."
"네, 화류 상단에서 요구하는 이번 계약 조건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리사 비와 니사 비가 이미 조율을 끝내두었으니 폐하께선..."
"그래, 도장만 찍으란 이야기겠지."
황제는 일단 세부 사항을 전부 확인하고는 직인을 찍었다.
"사하크가 없으니 허전하구나."
원래라면 이런 건 사하크가 해야 했으나... 그는 2년 전에 왕위를 잇기 위해서 돌아갔다.
그 빈자리를 지금은 미령이 대신 채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저로는 부족하신가요?"
미령이 섭섭한 얼굴로 묻자 황제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대는 너무 유능해서 짐이 할 일이 줄어들지 않느냐."
황제는 솔직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원래라면 12시간은 일해야 하는데 그녀와 일하고 나서부터 10시간만 일해도 할 일이 끝나버린다.
그게 황제는 불만스러웠다.
"잘 보았니? 저런 분이란다. 그러니 걱정되는 거야."
미령은 그런 황제를 가리키면서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던 민희에게 말했다.
"그... 폐하는 혹시 일 중독이신가요?"
그 말을 들은 민희가 책을 덮더니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
사랑하는 딸의 걱정이 가득 담긴 질문에 황제는 순간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그 말을 부정하기가 힘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