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 신은 이제 너무 늙어서 눈조차 침침하옵니다. 허니..."
황제는 눈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직을 요청하는 호부 상서를 보면서 말했다.
"안경을 하사할 테니 쓰고 일하거라."
"하, 하해와 같은 폐하의 은덕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호부 상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는 물러났다.
"폐하! 신은 이제 거동이 불편하여 입궁이 어렵사옵니다. 허니 부디 사직을..."
이젠 제법 나이가 많은 노신들이 모여서 단체로 사직을 원했다.
"그대들에겐 재가를 허하마. 또한 필히 출석해야 할 때엔 그쪽으로 가마를 보낼 터이니 그걸 타고 입궁하거라."
"황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울음까지 터트리는 노신들을 보면서 흐뭇하게 미소 지은 황제는 그들을 돌려보내고는 말했다.
"얼마나 기쁘면 저리 눈물까지 흘리는지. 충성심이 많은 신하가 많아서 참으로 행복하구나."
"..."
미령은 그 말을 듣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 눈물은 단언하건데 절대 기뻐서 흘리는 눈물은 아니었으리라.
"폐하! 부디 사직을 윤허하여 주십시오."
재상은 '이번에야말로!' 라고 생각하면서 사직상소를 제출했고, 황제는 그 상소를 읽어보더니 그대로 찢어 버렸다.
"불가. 재상이 요새 사직서를 제출하는데 재미가 들린 모양이구나. 노는 것은 좋으나 이제 재미가 없으니 슬슬 다른 유흥 거리를 알아보거라."
"..."
재상은 이번에도 윤허하지 않으시는 황제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폐하... 신이 이제 나이가..."
"만년삼을 내려줄 테니 그거 먹고 출근하거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는 재상의 뜻을 잘 알았으나 재상 정도의 유능한 자를 절대 쉬게 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이번에도 재상을 돌려보냈다.
"저러다가 죽으시는 거 아닐까요?"
미령이 완전히 축 처진 어깨로 돌아가는 재상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며 묻자 황제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죽으면 저승에서라도 끌고 올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
황제의 말에 미령은 침묵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황제가 말한 거라서 그런가? 도저히 농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젠 제법 세월이라는 게 흘렀어. 짐도 나이를 먹고. 신하들은 늙어가고 있지."
신하들이 앓는 소리를 하는 것으로 세월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황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얼굴로 그리 말해 봐야 설득력은 없네요."
미령은 황제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여전히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해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 늙어가는데... 폐하께선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게 미령은 늘 마음에 걸렸다.
언젠가...
"제가 더 나이가 들어도 폐하께서는 안아주실건가요?"
그녀의 나이가 어느덧 불혹을 넘긴 지 제법 되었다. 앞으로도 늙을 날만 남았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늙고 추해진 자신을 폐하께선 사랑해주실까? 미령은 자신이 없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황제는 그 질문에 덤덤하게 말하고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춰주고는 다시 서류에 눈을 주었다.
그 덤덤함이 좋았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배려가 참으로 믿음직했다.
어떤 모습이 되어도 사랑해주겠다는 거창한 말 대신. 그 짧고 덤덤한 말과 행동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잠들었구나."
"...그러네요."
황제의 말에 미령은 책을 읽다가 잠들어 버린 민희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전 이 아이를 침대에 눕혀두고 올게요."
미령이 민희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말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지 않아도 된다. 이제 일은 대충 끝났으니까."
그 말대로 오늘은 유독 일이 적은 날이었다.
황제는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지막 서류를 처리하고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식사 시간인가...'
슬슬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원래라면 태자와 식사를 했을 테지만 태자가 없는 지금은 같이 먹을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오르테가는 없을 거고, 다른 비들은 이미 식사를 했을 테고...'
오르테가는 비토바르 토너먼트를 구경한다고 했으니 적어도 오늘 아침엔 출발했을 거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가 같이 식사할 인물로 떠올린 사람은...
"드문 일이네요. 폐하께서 이곳에 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황제는 자기 앞에 앉아서 재잘거리는 여인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이젠 이 녀석도 이립을 넘겼을 텐데 생긴 것만 보면 이제 막 약관을 넘긴 처자 같았다.
"세르나 넌 여전하구나."
그녀를 그리 평가한 황제는 모용가의 저택에 차려진 화려한 식탁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뭔가 엄청나구나."
"네? 폐하께선 더 화려하게 드시지 않나요?"
세르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는 식탁은 황제의 식탁보다도 화려했다.
"짐은 원래 좀 수수하게 먹는 편이라. 그보다... 모용진은?"
"그이는 지금 수희를 데려오고 있어요. 그보다 진짜 오랜만에 뵙네요."
세르나가 반가워하면서 말하자 황제도 공감했다.
"그래, 그래. 오르페나. 그대도 오랜만이구나."
용인답게 예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는 오르페나를 향해 황제가 말을 걸자 오르페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끄덕.
고개를 끄덕여 준 황제는 모용진을 기다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자, 인사드리거라."
잠시 후, 모용진이 조그마한 꼬마 아이를 데리고 와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는 이 아이가 바로 모용진의 유일한 딸인 수희였다.
"귀엽죠? 올해로 4살이거든요."
그런 그 아이의 어머니인 세르나가 바로 자랑했다.
스윽.
그러나 수희는 세르나 대신 오르페나의 옆에 꼭 붙었다. 그 행동에 세르나가 서운해했으나 오르페나는 그저 웃으면서 그런 수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황제는 그런 수희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제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지 또래에 비해 작은 체구.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확실히... 귀엽다면 귀여운 아이였다.
'반 요괴라...'
물론 겉으로 보기엔 인간처럼 보이는 저 소녀는 실제로는 반은 요괴의 피가 흐르는 존재다.
황제도 실제로는 처음 보는 거라 흥미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몸을 낮춰서 그녀와 눈을 맞추며 인사해주었다.
"만나서 반갑구나."
"...수희입니다."
여전히 황제를 경계하는 눈으로 보며 수희가 인사하자 모용진은 허허 웃었다.
"이 아이가 아무래도 낯가림이 심해서..."
"그래서 아저씨는 누구예요?"
"!"
모용진은 수희의 입에서 나온 아저씨란 말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세르나는 굳어 버렸고, 오르페나는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뒤에 서 있던 하인들이 덜덜 떨기 시작했으나 정작 황제는 그 호칭을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 제국을 다스리는 사람이란다."
"그럼 제일 높은 사람인가요?"
수희가 그제야 조금 관심이 갔는지 슬쩍 황제에게 다가왔다.
황제는 순순히 그런 아이를 안아 들어서는 자기 무릎을 내주었다.
"그러면요. 수희가 원하는 것도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지."
초롱초롱.
그 대답에 수희가 눈을 빛냈다. 모용진은 뒤에서 딸이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수희는 열차를 타보고 싶어요."
"열차라..."
황제가 생각에 잠기자 모용진이 바로 반응했다.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으니까!
"이 아빠가 일해야 하는데 어떻게 열차를 탄다는 이야기니! 아빠랑 같이 가는 거 아니면 허락 안 해준다고 했잖니!"
"흥! 아빠 몰라! 맨날 안 된다고만 하고!"
"타봐도 상관은 없겠지만... 가고 싶은 곳은 있느냐?"
황제는 순수하게 궁금해져서 질문했다.
이 어린 꼬마 아가씨가 대체 어디로 가고 싶기에 열차를 타고 싶은지 말이다.
"해왕국에 가보고 싶어요. 바닷속은 정말 아름답다고 해서요."
수희는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긴 어린아이에게 바다 속에 있는 해왕국 만큼 흥미로운 곳은 없겠지.
황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쁘지 않겠지."
황제는 수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러면 모처럼이니 짐과 같이 가자꾸나. 모처럼 볼 사람도 있고 말이다."
"진짜요? 진짜?"
황제는 뛸듯이 기뻐하는 수희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이러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겠지."
"그야... 뭐. 폐하께서 동행하신다면 그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모용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간다면 금위대장인 모용진이 동행해도 이상할 건 없다.
해왕국엔 세이린 비 전하와 아르켄 황자도 계시니 그분을 만나러 간다는 이유면 딱히 이상한 이유도 아니었다.
"그럼 그런 거로 해 두거라."
황제는 그리 말하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수희는 그런 황제가 마음에 들었는지 황제와 꼭 붙어서 식사를 하며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다.
오늘 있었던 일, 칭찬 받은 일. 친구와 싸운 일 등.
모용진은 식사 중에 이야기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지 좋은 표정은 아니었으나 황제가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고 장단을 맞춰주고 있으니 꾸욱 눌러 참고 있었다.
황제는 오늘 식사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이렇게 떠들썩한 식사가 꽤 즐거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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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도 끝인가...'
황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욕탕에 몸은 담근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황제의 일상은... 요근래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그래서 그런 걸까?
황제는 때로는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괜한 걱정이지.'
평화로운 게 가장 좋은 것이거늘.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괜한 걱정을 지우고는 자신의 몸을 부지런히 닦고 있는 궁녀들에게 말했다.
"그만하면 되었다."
그러자 궁녀가 손을 거두고는 그대로 물러났다.
황제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상선."
"네, 부르셨습니까."
상선이 바로 다가오자 황제가 물었다.
"태자의 소식은?"
"열차를 타고 이동해. 지금 관북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마 내일쯤 열차를 갈아 타고 철곡에 도착할 거 같습니다."
하긴... 철곡까지 가려면 갈아 타는 과정은 필요하겠지.
"누굴 닮아서 고집이 쌘 건지..."
황제는 작게 혀를 찼다.
사실 이동 마법을 이용하면 하루면 도착할 텐데... 기어코 열차를 타고 가겠다고 떼를 쓰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표를 마련해 줘야 했으니까.
촤아악.
물에서 나온 황제는 궁녀가 자기 몸에 물기를 닦는 것을 보면서 얌전히 서 있었다.
물기를 닦는 작업이 끝나자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은 황제는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황제에겐 마지막 일정만이 남아 있었으니까.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황제를 반긴 것은 검은 네글리제를 입고 있던 아네스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복장을 하는 것부터가 그녀의 자신감을 증명하는 듯했다.
뒤를 보니 당당한 아네스와 달리 사유우이와 엘리자베르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는 얌전히 침대에 읹아 있었다.
이제 보니까...
"옷이 똑같구나."
둘은 아네스와 똑같은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검은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다.
"똑같죠? 같은 옷을 입어보기로 했거든요."
아네스의 말에 사유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러는 편이 재미있을 거 같다고... 아네스 씨가."
우물쭈물하면서 얼굴을 붉히는 사유우이의 모습을 보면서 황제는 생각했다.
제법 세월이 흘렀음에도 사유우이나 엘리자베르 모두 크게 변한 거 같지 않았다. 당장 지금 몸매가 거의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음에도 전혀 처진 곳이 없었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물론 그녀들이 그런 몸매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뒤에서 많은 노력해왔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당연히 황제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그대들은 여전히 변한 거 같지가 않구나."
"가장 안 변하신 분이 그렇게 말해 봐야 설득력이 없는데..."
엘리자베르가 그런 황제의 말에 작게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자신들은 조금이라도 노력을 게을리하면 늙어가는 게 확 체감이 날 텐데... 폐하께서는 외모를 가꾸는데 딱히 노력하지 않는데도 전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튀르에가 그림을 그려왔답니다. 너어무 잘 그린 거 있죠? 그래서 지금 그 그림을 장식할 액자를 주문해 둔 상태랍니다."
아네스가 신난 얼굴로 재잘거리자 황제는 표정 관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잘... 그렸다라...
"뭐... 개, 개성적이긴 하더라."
엘리자베르도 황제와 비슷한 생각인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로반이 가르쳐 줬다면서? 고마워. 튀르에랑 잘 놀아줘서."
엘리자베르의 아들이자 지금은 하연 비 밑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는 로반이 언급되자 엘리자베르는 서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림 배운다고 잘 찾아오지도 않는 못된 아들인데 말이지..."
참 기묘한 일이었다.
엘리자베르의 아들인 로반은 하연 밑에서 그림을 배운다고 정작 그녀와는 서먹한 사이였고, 하연의 딸인 서윤은 엘리자베르 밑에서 악기를 배우느라 하연과는 영 사이가 어색했다.
"애초에 저는 아들하고 자주 보지도 못 하는데요..."
사유우이는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아들인 시르크는 차기 칸으로 교육 받기 위해서 저기 먼 크릴라이에 가 있는 상태였다.
사유우이의 입장에선 이렇게 자식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 그녀들이 부러운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그래, 그래. 다 할 이야기가 많은 거 같으니 오늘은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마무리..."
10년이 넘는 세월을 쉬지 않고 잠자리를 가졌다.
하루 정도는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황제가 그런 기대를 품고 말할 때였다.
"폐하. 헛소리 하지 마시고 슬슬 벗어 주세요. 아니면 벗겨드릴까요?"
아네스가 황제의 말에 싱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그녀의 눈은 차가웠다.
애초에 그녀가 황제에게 헛소리하지 말라는 심한 말까지 할 정도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였지만.
"...그래."
황제는 시무룩한 얼굴로 옷을 벗었다.
오늘 하루 정도는 쉬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으니까.
"후후, 누가 먼저 할까요?"
"전 일단은 구경하고 싶네요."
아네스가 그걸 보며 웃고는 다른 사람에게 묻자 사유우이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나, 난 상관없는데."
엘리자베르가 여전히 옷차림이 부끄러운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아네스는 고민했다.
"흐음, 폐하께선 어느 쪽이 먼저인 게 좋으신가요? 아니면 같이?"
"...마음대로 하거라."
황제는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었다.
매일. 매일. 이렇게 반복되는 하루가 싫은 것도 아니다.
황제는 지금의 일상을 사랑했고, 앞으로도 이러한 나날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