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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230화 (230/235)

추운 곳이라서 그런가? 난방기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열차 안에서 태자는 식당칸에서 식사를 하던 중에 밖을 내다보았다.

열차 밖을 내다 보면 빠르게 변하는 풍경이 참으로 새롭다.

태자는 푹신한 열차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가볍게 식사를 이어갔다.

"열차 내부 식당도 썩 괜찮은데?"

열차 내부에 있는 식당이라고 보기엔 놀라울 정도로 깔끔했고, 의자도 푹신했다.

게다가 관북이 자랑하는 북부 요리도 썩 괜찮았다.

뜨끈뜨끈한 감자 수프, 연어 훈제, 그리고 밀빵. 어느 하나도 태자의 입맛에 안 맞는 게 없었다.

"전하께서 드시기엔 영... 변변찮은 것입니다만.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그런 태자의 옆에 앉아 있던 검은 머리의 여인이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다.

꽤 곱상한 여인이었다.

옆에 놓여 있는 검만 아니었다면 그냥 여행하는 명가의 아가씨로만 보일 거 같은 여인이었으니까.

실제로 태자도 처음 봤을 땐 이 여자가 자신의 새로운 호위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금위대의 백부장이라니. 젊어 보이는데 대단하네.'

하지만 그녀의 실체는 바로 황제가 직접 태자와 그 일행을 지키라고 붙여둔 실력자.

금위대의 백부장 중 한 명인 김이화였다.

그녀가 소중하게 옆에 끼고 있는 저 검은 무려 황제가 전 대장군인 김유선이 사직할 때 하사한 물건으로 지금은 그녀가 주인으로 있었다.

"식사가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그런 태자의 앞에서 식사하고 있던 부드러운 인상의 은발 여인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조그마한 검은 머리의 소년을 무릎에 앉혀두고는 식사하고 있었다.

"비께서는 입에 맞으시는지요?"

식사를 끝낸 태자는 입가를 가볍게 닦으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네, 다행히 입에 맞네요. 그렇지? 카예프."

"응."

카예프라 이름 불린 조그마한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태자에게 말을 걸었다.

"형아."

"왜?"

그런 어린 동생이 귀엽게만 보이는지 태자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물었다.

"나 졸려."

졸린 눈을 비비면서 카예프가 말하자 태자는 웃었다.

"그래? 그럼 잘까?"

태자가 웃는 얼굴로 카예프와 눈을 맞춰주며 묻자 카예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형아랑 잘래."

그렇게 말한 카예프가 안아 달라는 듯이 팔을 내밀자 태자는 피식 웃고는 그대로 카예프를 안아 들었다.

"그럼 같이 잘까?"

태자는 그리 말하고는 카예프를 안아 들고 자기 객실로 향했다.

모처럼이니 그는 동생의 낮잠 시간에 어울려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태자가 떠나자 미르예프는 웃는 얼굴로 자기 객실로 돌아갔다.

"길명."

"알고 있습니다."

이화가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길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자의 뒤를 따랐고 이화는 미르예프를 따라 움직였다.

"너, 뭔가 조심스럽다?"

자신을 따라온 길명을 보면서 태자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화를 대하는 길명의 태도는 조심스럽기 그지없었으니까.

보통은 신경 쓰지 않겠지만... 태자에겐 그런 길명의 태도가 의아하게 여겨졌다.

물론 금위대의 백부장이면 원래 길명의 상관이었겠지만... 지금은 태자의 호위 무사니까 대충 비슷한 급이 아닌가? 그런데도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니 의아할 따름이었다.

"...절대로 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까요."

길명은 그리 말하고는 그녀에 대해선 더 언급하기 싫은 티를 팍팍 냈다.

그럼 저런 태도는 친해지기 싫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걸까?

'그러고 보니 둘이 비슷한 나이던가?'

비슷한 나이에 실력도 비슷하면 아무래도 의식할 수밖에 없긴 하겠지.

태자는 대충 이해하고는 객실로 돌아가 침대에 카예프를 눕히고는 자신도 누웠다.

"이 열차의 객실 침대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태자는 그리 말하면서 그대로 카예프와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길명은 그대로 앞에 앉아서는 조용히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열차는... 그렇게 철곡을 향해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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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여행하는 거 같아서 신난다. 마리아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오르테가는 신난 얼굴로 창밖을 내다 보면서 말했다.

비토바르로 향하는 열차에서도 제일 좋고 큰 객실을 차지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제, 제가 따라와도 되는 걸까요?"

과거와 비교하면 이젠 눈가에 주름이 제법 생긴 주설화가 과자를 집어 먹다가 말고 갑자기 불안해했다.

그녀는 5년 전에 아들을 낳고 빈에서 비가 되었으냐 여전히 자신감이 부족했다.

"그럼요. 그러고 보니 진모가 최근에 무과를 준비 중이라면서요?"

나르타는 자기 그 비단처럼 고운 붉은 머리를 가볍게 뒤로 묶으면서 물었다.

"그래? 대단하네. 그럼 언젠가 대장군이 될 수도 있겠는데?"

"그, 그 정도까지는..."

주설화는 오르테가의 반응에 머뭇거리면서도 싫진 않은 표정을 지었다.

하긴 자식의 칭찬이 싫은 부모는 없을 테니까.

"리타나도 데려오지 그랬어?"

"그 아이는 주술 공부에 좀 더 매진하고 싶다는데 데려오기도 그랬거든요. 세헤라자드 씨는 그러고 보니 안 오기로 한 건가요?"

나르타의 질문에 오르테가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히드가 너무 떨어서 두고 올 수 없을 거 같다더라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무엇에 겁을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려움에 떨고 있는 테히드를 혼자 둘 수는 없었는지 세헤라자드가 불참을 선언했다.

마리아는 한나를 가르치느라 바빴고, 여화는 아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친다고 불참 선언. 마리프는 아산으로 그녀의 딸인 리프와 여행을 가 버려서 데려오지 못했다.

귀려랑 세이나는 쿠류로 자식들을 데리고 놀려가 버렸고, 이희는 태학정에게 붙잡혀서 교육받고 있었으며, 미르예프는 태자랑 같이 철곡으로 갔으니까...

일행은 결국 이렇게 다섯 명이 되어 버렸다.

'키야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겠고.'

대륙 지도를 만든 그녀는 이번엔 해도를 만들겠다면서 또 훌쩍 떠나버렸다.

이번에도 아마 기약이 없는 여행이지 않을까?

오르테가는 그리 생각하면서 딱딱한 자세로 서 있는 회색 머리의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편히 앉아 있어도 되는데?"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나 임무 중에 긴장을 풀 수는 없는 입장이니 너그러히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황제가 이 일행의 호위로 붙인 금위대의 백부장으로 그 대흘이 눈여겨 보고 있는 자였다.

하긴 그 브레드의 딸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잘 자네요."

나르타는 계속 자는 시아를 보면서 감탄했다.

아무리 마법으로 흔들림을 억제했다고는 해도 열차는 제법 흔들리는데... 저렇게 평온하게 잘 수 있는 시아와 여휘를 보니 참으로 대단했다.

'저게 비결일지도...'

나르타는 슬슬 주름이 생겨 가는 자신과 달리 아직도 그 나이를 먹고도 얼굴에 주름 하나 없는 그녀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녀 둘은 열차에 타고 나서는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자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저런 수면 방식이 외모를 유지하는 비결일지도 모른다.

나르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오르테가가 과자를 집어 먹으면서 말했다.

"그보다 레오니의 대회는 언제였지?"

"3일 후네요. 케르랑 키린 씨, 베베라 씨가 참가하는 박투 대회는 2일 후고요."

"디나카 씨는..."

설화가 디나카를 떠올리며 묻자 나르타가 대답했다.

"궁술 대회에 참가했네요. 그건 내일이랍니다. 가비 씨랑 달리아 씨도 참가했으니까 그것도 보는 편이 낫겠어요."

"볼 거 많네. 재미있을까?"

오르테가는 기대가 되는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위 녀석도 같이 오면 좋았을 텐데...'

그런 걸 좋아하니까.

오르테가는 아쉬웠지만 황제가 쉽게 궁을 비울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깔끔하게 미련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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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은 폐하께서 무사히 다녀오시길 기원하겠습니다!"

황제는 자신을 떠나는 걸 묘하게 기뻐하는 거 같은 재상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가기 싫어지는데 남을까?"

"폐하! 일국의 지존께서 약속을 초개와 같이 여긴다면 그 누가 믿을 수 있겠사옵니까."

재상이 그 말에 비장한 얼굴로 충언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긴 하다만."

황제는 아무래도 영 수상했지만, 그렇다고 일정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이미 해왕국 쪽에도 다 이야기해두었으니까.

"그럼 다녀오마."

황제는 그리 말하고는 기대로 가득 찬 얼굴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희를 안아 들고는 목마를 태워 주었다.

"우와! 높다."

수희는 기뻐하면서 황제의 머리를 꽉 잡았다.

그 모습에 재상을 필두로 황제를 배웅하러 나온 노신들이 모두 움찔하고는 황제의 눈치를 보았으나 황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그런 짓을 한다고 법도대로 손을 자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만...

"어른의 머리는 함부로 잡지 않는 편이 좋단다. 알아두렴."

그래도 가르칠 필요는 있겠지.

황제가 그리 충고하자 수희는 바로 머리에서 손을 떼고는 힘차게 대답했다.

"네!"

시원하게 대답하는 수희의 모습에 피식 웃은 황제는 걸음을 옮겼다.

두 다리가 멀쩡한데 굳이 가마를 탈 필요성을 못 느끼기도 했고, 황제는 모처럼이니 걸어갈 생각이었다.

애초에 그러려고 이렇게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거니까.

어떤 의미에서 이번 여행은 황제에겐 휴가인 셈이었다.

그리고...

"흑흑! 드디어..."

그건 남아 있는 신하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모습이 사라지자 신료들은 눈물을 쏟았다.

그들은 황제가 떠남으로 인해 매일 같이 이어지던 야근에서 해방되었으니까.

"오늘은 정시 퇴궁이니 힘내서 일 합시다."

재상도 완전히 활기를 되찾아서는 그들을 독려 했다.

드디어 찾은 정시 퇴궁은 그들의 기분을 들뜨게 하기엔 충분했다.

황제도 황후도, 태자도 없는 궁에서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기뻐하며 모처럼 얻은 자유를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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