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미천한 종이 만물을 굽어 살피시는 제국의 위대한 하늘을 알현합니다."
황제가 수희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열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수하들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던 거북대신이 바로 예를 올렸다.
"폐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기다리고 있던 거북대신은 황제의 손짓에 몸을 일으키고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끔 드는 생각인데 말이다. 해왕국엔 그대 말고는 인물이 없느냐?"
그런 거북대신을 보면서 황제는 순수한 의문을 품었다. 황제가 볼 때마다 늘 이 거북이가 자신을 맞이했으니까.
거북대신은 그 질문에 움찔하더니 대답했다.
"아르켄 전하를 위해서 체제 전환 중입니다."
'하긴 지금이라도 준비해야겠지.'
그 대답에 황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인의 피가 많이 희석된 후계자이다.
제대로 정리 해두지 않으면 골치가 아플 테니 미리 정리해 두는 편이 좋겠지.
"우와! 거북이다. 말하는 거북이는 처음 봐요!"
그때 수희가 거북대신에게 다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거북대신은 그 말에 순간 당황했으나 황제의 옆에 있으니 보통은 아닐 거란 생각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공주님이십니까?"
이번 황제의 딸이... 10명이 넘으니 그 중 한 명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황제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금위대장의 아해지."
그 말에 거북대신은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금위대장의 딸이면 사실 이 무례를 꾸짖어야 함이 옳으나 그 금위대장과 황제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건 거북대신의 입장에선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가 선택하기에 옳은 것은...
"허허, 밝은 아이로군요. 장래가 기대가 되는 분이십니다."
웃으면서 넘어가는 것.
거북대신은 자신과 어인의 자존심을 챙기기보단 아이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택했다.
"저자는 어인이란다. 그러니 그 말은 제법 무례한 말이구나. 사과하거라."
"죄송합니다!"
수희가 그제야 눈앞에 있는 거북이 어인이라는 걸 깨닫고는 재빨리 사과했고, 거북대신은 그 사과를 받아주었다.
"어린아이가 참으로 영특한 거 같습니다."
"그렇지. 고작 4살인 아해가 벌써 존대를 할 줄 아는 거부터가 참으로 대견하더구나."
황제는 수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리 말했다.
참으로 영특한 아이다.
황제는 이런 점은 부모를 안 닮아서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바로 모시겠습니다."
황제는 원래라면 물 안에서 활동하기 위해 필요한 옷 대신 팔찌를 건네는 거북대신을 보고는 그 팔찌를 받았다.
"기술이 많이 발전했구나."
"감사합니다."
이젠 팔찌 하나로 해결인가?
편리해졌군.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팔찌를 차고는 수희의 팔에도 팔찌를 채워주었다.
그러자 수희는 자기 팔에 자리 잡은 팔찌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늘 고래를 데려오더니 이번엔 제법 신기한 놈을 데려왔구나."
해왕국으로 가기 위해 바다에 도착한 황제는 늘 타던 고래가 아닌 기다린 몸체를 가진 뱀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자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바다 이무기입니다. 해신의 왕관을 이용해 간신히 복종시킨 녀석이지요."
"흐음..."
이무기였나.
세간에는 용이 되지 못한 뱀이라는 말도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무기는 용과 비슷하지만 확실히 다르다. 대충 인간과 침팬치 정도의 관계라고 해야 하나?
즉 그런 세간의 소문은 침팬치가 인간이 되지 못한 원숭이라는 말이랑 다를 바가 없는 헛소리...
"용이 되지 못한 뱀이죠? 아빠한테 들었어요."
"..."
수희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면서 말하자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네 아버지는 조만간 이 아저씨와 면담을 좀 해야겠구나."
"?"
수희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자 황제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애도 아니고 아직도 그런 낭설을 믿고 있다니... 아무래도 금위대장은 상식을 배워야 할 거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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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옷 진짜 예쁘다! 잘 어울려. 어때? 마음에 들어?"
오르테가가 팔랑거리는 흰색 원피스를 아린에게 입히고는 묻자 아린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새하얀 순백의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오르테가가 보기엔 영상 마도구가 있다면 찍어두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그게 저한테 이런 예쁜 옷은 안 어울리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아린은 부끄러워하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살면서 이런 옷을 입어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다.
"예뻐."
시아는 그런 아린을 보면서 솔직하게 말했다.
그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아린은 이내 붉어진 얼굴로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 그런가요? 어머니께서도 그러시다면..."
제가 이런 옷을 입어도 될까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린 아린은 고개를 푹 숙였고, 오르테가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런 아린을 꼬옥 안아주었다.
"귀여워! 명이도 이런 귀여움이 있으면 좋을 텐데! 요샌 머리가 커졌다고 자꾸만 나한테 쌀쌀맞게 구는 거 있지? 이래서 딸을 낳아야 하나 봐."
'수, 숨 막혀.'
오르테가의 가슴에 압박을 당하면서도 밀어내면 다칠까 봐 밀어내지도 못한 아린은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오르테가의 가슴에 파묻혀 있었다.
"앗! 미안. 미안."
그제야 그 사실을 눈치챈 오르테가가 바로 사과하면서 그녀를 놓아주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흉기로 살해당할 뻔했던 아린은 숨을 들이키고는 애써 웃었다.
"괘, 괜찮아요."
"착하기도 하지. 그보다 딸이라... 좋았어! 돌아가면 폐하한테 노력해 달라고 부탁해야지."
오르테가는 황제가 들었다면 공포로 온몸을 떨었을 말을 태연하게 하고는 혼자서 가방을 고르고 있던 나르타에게 말을 걸었다.
"그쪽은 다 골랐어?"
"음, 고민되네요. 역시 이게... 하지만..."
'좀 오래 걸리겠네.'
가방 두 개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나르타를 보면서 오르테가는 생각했다.
그냥 둘 다 사면 될 텐데... 나르타의 성품이 그런 낭비는 생각 못 하는 모양이었다.
"먼저 가서 기다려주세요. 전 가방을 사고 바로 합류할게요."
"그래? 알았어."
나르타의 말에 오르테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점원에게 오늘 산 옷에 대한 계산을 끝냈다.
산 물건은 당장 들고 갈 수 없으니 숙소로 배달해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잊지 않은 오르테가는 그대로 나르타를 두고 거리로 나왔다.
그녀를 혼자 두는 것이 불안하진 않았다.
호위가 없어도 나르타 정도의 화염술사를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뿐더러... 황제의 여인을 건드릴 간 큰 사람은 적어도 이 대륙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좋은 거리네.'
오르테가는 비토바르의 거리를 걸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축제가 한창이라서 그런가?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얼굴엔 활기가 넘쳤다.
"예약해 둔 자리로 갈까?"
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시아를 보면서 웃어준 오르테가는 일단 간단하게 먹을 길거리 음식을 사고는 그것들을 든 채로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오르테가의 발걸음은 한 없이 가벼웠다.
오늘 하루도 즐거울 거 같았으니까.
-
"...으아아아! 쉬면 된다면서요!"
황궁으로 돌아와서 일단 아버지의 집무실로 출근한 태자는 가득 쌓인 자기 결재해야 할 서류와 안 건들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그래, 해서 조정으로 출근할 필요가 없다고 언질을 주지 않았느냐. 그냥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면서 쉬면 되는 건데?]
황제의 태연한 목소리에 태자는 바로 짜증을 부렸다.
"서류를 처리하는 순간 이미 쉬는 게 아니잖아요!"
[....?]
영상 속에 황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황제는 태자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하는 눈치였다.
[왜?]
"아니..."
결국 태자는 설명을 포기했다.
저 일에 미친 일 중독자에게 백날 설명해 봐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사실은 좀 더 느긋하게 돌아오게 해주고 싶었지만... 마리아의 말도 일리는 있더구나.]
그런 태자를 보면서 황제는 솔직하게 말했다.
황제는 사실 태자를 바로 부를 생각은 없었다.
실제로 아네스와 이야기할 때만 해도 느긋하게 기다릴 생각이었고... 허나 뒤에 마리아와 이야기해보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이건 나름대로 기회였으니까.
[대리청정을 경험할 좋은 기회가 아니냐. 어차피 내년부터 할 거 미리 경험한다 생각하면...]
"잠깐만요! 전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요?"
대리청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태자가 당황해서 따지자 황제가 당당하게 말했다.
[말을 안 했으니까. 못 들을 만도 하지.]
"아버지... 저 이제 16세인데요?"
태자가 당황한 얼굴로 묻자 황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이 제국의 황제가 되기까지도 4년이 남았지. 그러니 대리청정은 절대 늦은 게 아니란다. 오히려 미리 배운다는 마음으로 하면...]
"...네?"
태자는 자신이 들은 것을 믿지 못해서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4년... 4년이라고?
그렇다는 건...
"저보고... 고작 약관의 나이로 황제가 되란 이야기인가요?"
20세에 황제가 되라는 이야기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태자는 생각 이상으로 이른 시기에 당황하고 있었다.
[겨우라니. 이 아버지도 그때 황위에 올랐단다.]
그러나 황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실 황제는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선위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태자는 뭐라 반박하지도 못했다.
실제로 태자의 아버지는 약관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으니까.
이미 선례가 있는데 시기를 가지고 뭐라 하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전 아직 황제가 된다고는..."
태자가 억울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황제는 웃었다.
[후후, 이 아버지도 그랬단다. 직전까지도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고 외치고 다녔지.]
그러나 그 결과가 어땠지?
황제는 알고 있었다.
태자가 백날 되기 싫다고 말해 봐야... 딱히 달라지는 건 없다는 것을.
그리고 사실 태자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해봐야 아버지는 뜻을 꺾지 않을 것이고, 자신도 그 뜻을 완전히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것을.
[마음에 준비는 해 두거라.]
결국 황제의 말에 태자는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태자의 대답을 들은 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통신을 끊었고, 태자는 의자에 그대로 기대면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4년... 인가.'
진짜 얼마 남지 않았구나.
태자는 그제야 실감이 되었다.
자신이 황제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