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번에도 너구나."
세월이 지났음에도 전혀 쇠하지 않은 근육을 자랑하는 거구의 여인이 눈앞에 있는 길쭉한 체형의 미인을 응시했다.
"키린."
베베라의 말에 키린은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가볍게 접어서 밖으로 던지고는 웃었다.
"케르도 상대가 나빴네. 하필이면 너를 만나서 말이야."
베베라와 16강전에서 만나 떨어진 케르를 생각하며 키린은 웃었다.
하긴 케르의 실력이면 어차피 결승은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16강은 너무 안타까운 결과였으니까.
"...너는 아닌 것처럼 말하는구나."
베베라의 가벼운 말에 키린은 씨익 웃으면서 우자연체로 섰다.
"당연하지. 난 이길 생각이니까."
"훗."
베베라는 키린을 보면서 웃었다.
저 자신감이 그녀는 싫지 않았으니까.
"그럼..."
휘익!
순식간에 접근한 베베라의 주먹이 키린의 복부에 꽂혔다.
'맞은 느낌이 없는데?'
그러나 맞은 느낌이 없었다.
그제야 베베라는 알아차렸다.
그 짧은 순간에 키린이 자기 주먹을 흘렸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 자세로 그게 가능한가?
베베라는 의문은 뒤로하고 어느새 거리를 벌린 키린이 날린 기탄을 주먹으로 흘렸다.
'순수한 육체로 저런 짓이 가능하다니... 아무리 봐도 괴물이라니까.'
그 모습에 키린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인간의 범주로 넣을 수 없는 물건이다.
저런 여자한테서 태어난 딸은 평범한 걸 보고 키린은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저건... 아무리 봐도 돌연변이라고.
"엄마! 힘내세요!"
당장 관중석에서 응원하는 갈색 피부의 조그마한 소녀는 아무리 봐도 베베라의 딸로 보이진 않았으니까.
"최고의 응원을 받아서 지면 안 되겠는데."
베베라는 그런 소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그리 말했고 키린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관중석을 보았다.
"아들? 그쪽은 뭐 없니?"
"다치지만 마세요. 치료하는 것도 일이니까요."
키린의 말에 안경을 고쳐 쓴 검은 머리의 소년은 그 금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키린은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귀엽지가 않다니까."
누굴 닮아서 저렇게 쌀쌀맞은 거람?
키린은 투덜거리면서도 어느새 다가온 베베라의 팔을 잡고는 그야말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땅에 메다꽂았다.
머리부터 땅에 꽂힌 베베라였으나 베베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일어나서는 다시 달려들었다.
'엄청 단단하다니까.'
이 여자의 몸을 깎아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부웅!
키린이 이번에도 그런 베베라의 달려드는 힘을 역이용해서 그녀를 공중에 띄웠다.
그러고는 다시 호쾌하게 땅에 메다꽂았다.
'이 정도면 좀 쓰러지란 말이야.'
키린은 다시 벌떡 일어나는 베베라를 보면서 질린 표정을 지었다.
보통 사람은 한 번이면 절명할 위력이다.
그런데 기절조차 안 하다니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꽈악.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키린의 집중이 흐트러진 틈을 놓치지 않고 베베라가 키린을 붙잡았다.
"자, 잠..."
꽈악!
순식간에 뒤로 돌아선 슬리퍼 홀드를 건 베베라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키린을 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베베라의 조르기다. 잡힌 순간 이미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으리라.
그런 점에서 키린이 베베라에게 잡힌 순간... 이미 승부는 정해진 거나 다름이 없었다.
추욱.
키린이 의식을 잃고 추욱 늘어지자 베베라는 홀드를 풀었다.
'만만치가 않네.'
베베라는 잠시 비틀거렸다.
아무리 그녀라도 머리부터 몇 번을 떨어졌는데 충격이 없을 수는 없으니까.
"정말이지... 그래도 외상은 없네요."
판정이 내려지자 관중석에서 뚜벅뚜벅 걸어온 소년이 투덜거리면서 키린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으으... 엄마 머리가 어지러운데... 볼에 뽀뽀해주면 좀 기운이 날지도?"
"헛소리는 자면서 해주세요."
키린이 작게 중얼거리자 냉정할 정도로 차갑게 자른 소년은 베베라에게 꾸벅 사과했다.
"어머니가 신세를 졌네요. 치료가 필요하신가요?"
"아니 괜찮아. 조금만 쉬면 낫거든."
뚜둑.
베베라는 가볍게 목을 풀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키무는 똑똑하구나. 좋은 의원이 되겠어."
"아직 주술도 마법도 미숙한 정도입니다. 타흘라 비 전하께 배우고 있는데도 부족한 점이 많네요."
키무가 의원이 되기 위해 주술과 마법 모두 배우겠다고 했을 땐 모두가 반대했지만...
이 조그마한 소년은 지금까지 단 한 명만 성공했던 그 말도 안 되는 길을 걷는데 성공했다.
"그런 거 하지 말고... 이 어머니의 합기를 이어 주면 안 될까?"
키린은 슬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물론 키무의 근골이 무술을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키린은 그런 건 기술로 극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당장 그녀가 쓰는 합기가 바로 그걸 위해서 만들어진 기술이었으니까.
"싫습니다. 그보다 이제 치료도 끝났는데 그만 달라붙고 일어서 주세요."
"싫어. 이 엄마는 아들의 위로가 필요하다고."
원래는 점잖으신 분인데 왜 이렇게 애처럼 구실까...
키무는 그런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년은 정작 자신에게 달라붙는 키린을 밀어내진 않았다.
--
"많이 컸구나."
황제는 적금발을 곱게 땋아 묶은 소년을 보면서 새삼 놀랐다.
기억 속에 있던 아르켄은 딱 수희 정도 또래의 아이였는데... 어느새 이리도 컸을 줄이야.
황제는 뒤에 있던 보물 상자를 의자 삼아 앉으면서 물었다.
"올해로 나이가 어찌 되느냐?"
"이제 막 지학이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벌써... 세월이 참 빠르구나. 세이린은?"
원래라면 누구보다 먼저 찾아올 사람인데... 그녀가 보이지 않자 황제는 의문을 표했다.
"그... 어머니는..."
그때였다.
당황한 표정으로 아르켄이 말을 고르고 있을 때 황제가 앉아 있던 보물 상자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쾅쾅!
"..."
소리를 들은 황제는 슬쩍 일어났고, 그러자 상자가 열리더니 세이린이 환하게 웃으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폐하를 기다리고 있던, 폐하의 사랑스러운 보물이랍니다?"
"...여전하구나."
전에 봤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그녀를 보면서 황제는 웃었다.
10년이 지났음에도 전혀 변하지 않은 거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세이린은 슬퍼요. 폐하께서 자주 찾아오지 않아서요."
슬픈 얼굴로 달라붙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황제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이해할게요. 대신 여기 머무시는 동안 폐하를 독점해도 되는 거겠죠?"
"..."
황제는 그 말에 잠시 멈칫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희는 다른 이들이 잘 돌봐주고 있는 데다가 곧 세르나도 오기로 했으니까...
"그래, 그러거라."
"그럼 음... 아르켄? 잠시 나가 줄래?"
눈이 무서워진 세이린이 싱긋 웃으면서 부탁했다.
"? 네, 어머니. 그럼 소자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꾸벅.
세이린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르켄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순순히 방에서 물러났다.
그걸 본 세이린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이제 둘 뿐이네요?"
"그렇구나."
황제는 어느새 아래에 손을 가져가는 그녀를 보면서 대답했다.
가늘고 긴 그녀의 손가락이 가볍게 옷 위에서 황제의 물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후후. 여전하시네요. 크고 단단해요. 아앙."
"가끔은 닳아서 없어지진 않을까 걱정이 되긴 하는데... 아직은 멀쩡하지."
너무하다보면 그냥 없어지면 좋겠다는 생각할 때도 있지만... 애석하게도 여전히 멀쩡했다.
꾸욱.
황제는 자기 등에 가슴을 밀착해 오는 세이린을 보면서 슬슬 준비했다.
그날부터... 세이린과 황제는 한참을 그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
"이제 돌아가는구나. 즐거웠다면 즐거웠지만... 역시 여행은 시간이 참 빨리 가네."
오르테가는 돌아가는 열차에 몸을 실은 채 중얼거렸다.
마법으로 빠르게 돌아갈 사람은 다 돌아가서... 그녀의 일행은 비토바르로 올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소티보르에게 진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아린은 아직 어리니까요."
이번 비토바르 토너먼트마저 우승하면서 명예의 전당에 현액됨과 동시에 사실상 비토바르 토너먼트를 명예 졸업하게 된 레오니는 우울한 얼굴로 앉아 있는 아린을 위로 했다.
"네..."
아린은 아쉽게도 8강전에서 베테랑 기사 소티보르 드 비엔나에게 석패했다.
소티보르가 결승까지 진출한 걸 생각하면 엄청난 성과지만... 아린은 전혀 만족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자세는 좋습니다. 패배에 분한 건 당연한 거니까요."
레오니는 그런 아린의 태도를 높게 샀다.
패배에 분하지도 않은 사람은 그만큼 위로 올라갈 수도 없을 테니까.
"이번엔 브리탄에 추천장을 써줄 테니 시오니, 그리고 헨리와 함께 가보도록 하세요. 브리탄에서 오슬로에게 배우면 더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네!"
아린의 대답에 레오니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오르테가는 의문을 표시했다.
"호명은?"
"그쪽은 이쪽과 결이 다르니까요. 호명은 어머니의 검을 이어받고 싶은 거니까 어머니에게 직접 배우는 편이 낫습니다."
레오니의 대답에 오르테가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하긴. 목표가 다르니까."
그저 강해지고 싶은 아린과 시오니, 헨리와 달리 호명은 어머니의 검을 이어받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다.
그런 호명에게 당장 필요한 건 다른 검을 견식하는 것보단 여화에게 검을 제대로 물려 받는 것이었다.
"직행으로 탔으니까 곧 도착하겠네. 정말이지... 우리 셋말고는 아무도 이걸 탈 생각이 없다니 서운하네."
오르테가는 섭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머지는 피곤하다고 전부 마법으로 돌아가 버려서...
이 관도 직행 열차에 탄 인원은 오르테가까지 포함해서 이 셋이 전부였다.
아린은 오르테가 혼자는 걱정된다고, 레오니는 그런 아린에게 오늘 대회를 피드백한다고 남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폐하께선 세이린을 만나러 갔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다더라. 정말이지... 뭐, 어쩔 수 없지. 세이린도 오래 안 보긴 했으니까."
사실상 세이린은 10년이 넘도록 독수공방을 한 셈인데 이건 이해해 줘야겠지.
오르테가는 그리 생각하면서 어느새 창밖으로 보이는 황궁을 쳐다보았다.
"이야... 벌써 황궁이 보이는데?"
"그러게요. 역시 직행은 빠르네요."
레오니도 공감했다.
비토바르에서 관도까지 고작 9시간밖에 걸리지 않다니... 상상 이상이었다.
[곧 관도역에 도착합니다. 승객 분들께 알려드립니다. 곧 관도역에 도착합니다.]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들리자 오르테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내릴 준비할까?"
그렇게 말한 오르테가는 열차가 멈추자 그대로 열차에서 내렸다.
차가운 밤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지고, 관도의 거리는 여전히 낮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르테가는 레오니와 아린과 함께 길을 걸었다.
황궁에 도착하면 일단 씻자.
그리고 한숨 잘까?
그녀가 그런 고민하고 있을 때 궁궐의 문 앞에서 익숙한 얼굴이 그녀를 반겼다.
"아들!"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서 있는 태자를 향해 오르테가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어머니."
태자는 그런 오르테가를 향해 말을 걸면서 살짝 웃었다. 그런 태자의 뒤엔 이화가 마치 장식품처럼 얌전히 서 있었다.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애가 얼굴이 반쪽이 된 거야? 일 힘들어?"
오르테가는 그런 태자를 꽈악 안아주고는 얼굴을 살펴보았다.
피곤에 찌든 것이 참으로 안타까워 보였다.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즐거우셨던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응? 즐거웠지. 봐봐! 이 엄마가 말이지..."
오르테가는 신난 얼굴로 여행길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고, 태자는 가만히 서서 그 긴 이야기를 전부 들어 주었다.
"즐겁게 노셨네요."
"응, 정말이지. 즐거운 여행이었어."
오르테가는 그리 말하면서도 그제야 자기 여행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여행의 끝은 집으로 돌아오는 것.
지금... 오르테가는 이제 자신이 집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곳으로 돌아왔으니까.
"다녀왔어. 아들."
그렇기에 오르테가는 웃으면서 다시 한번 인사했다.
돌아왔다.
"네, 잘 다녀오셨어요. 어머니."
태자의 대답에 오르테가는 웃었다.
황후는 여행을 끝냈다.
사랑하는 아들의 마중을 받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