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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도자기를 만들자.
"이야야야~ 이겼다. 우리가 승리했다."
"우아아아~ 만세~ 아나톨리아 만세~"
"만세~ 파이온 영지 만세~"
"만세~ 총독각하 만만세~"
토머스의 돌출행동이 진지했던 분위기를 확 깨버렸지만 중요한 건 아나톨리아군이 승리했다는 점이다.
저 멀리 오크들이 꽁지 빠지게 도망가고 있다. 병사들은 도망가는 오크들에게 가장 큰 함성으로 배웅했다.
언제 다가왔는지 팰리스 주변을 드레이크 남작과 제이콥을 비롯한 지휘관들이 둘러쌌다.
지난 며칠간 그는 가이아 판 이순신이 되어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물론, 그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드레이크님 수고했습니다. 제이콥 경도 고생 많았소. 그리고 로건경과···"
마음의 부담을 털어버린 팰리스는 한사람씩 일일이 손을 잡고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제야 팰리스는 오크를 상대로 이겼다는 느낌이 제대로 다가왔다.
'하아~ 이겼구나. 우리가 이겼어!'
"하하, 으하하하~ 병사들이여! 마침내 우리 인간이 이겼다!"
"만세~ 총독각하 만세~"
팰리스가 승리했다고 선언하자 병사들이 만세를 부르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도 잠시 10분 정도가 지나가자 거대한 함성소리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격렬했던 심장도 어느덧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젠 전후처리와 이번 사태로 소비한 예산 등을 계산하는 행정과 관리자의 시간이 되었다.
일단, 파이온 영지 소유인 수레가 화공작전으로 절반이나 전소되었다.
대표적인 소비 집단인 군대는 숨을 쉬는 것 자체가 유지비를 잡아먹는다. 그런데 이번엔 모든 병력을 출동시켰다.
당연히 전투에 소모된 화살과 식량, 포션 등을 보충해야 한다. 계획에도 없던 막대한 예산이 소모될 것이다.
아나톨리아를 책임진 팰리스는 이것들에 소요되는 예산을 계산하고 집행하는 ‘관리자’임으로 상당한 심력을 투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은 부차적이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업무가 따로 있었다.
"부상자들의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해라."
"부상자와 사체를 수레에 태워라. 빨리 아나톨리아로 호송해야 한다."
몬스터와 싸우다가 죽은 3명의 사체와 부상당한 병사들을 빨리 후방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이런 후속대책은 굳이 팰리스가 신경 쓸 필요까진 없었다.
경험이 풍부한 제이콥과 기사들이 앞장서 처리했다.
그 후에는 병사들에게 오크의 가죽을 벗기고- 몬스터의 심장에서 발견된다는 남자들의 자존심- 마석을 수확하게 했다.
미생물의 개념은 몰랐지만 사체를 함부로 방치하면 전염병이 유행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기사들은 적당한 곳을 골라 마법으로 거대한 구덩이를 파게하고 병사들을 지휘하여 오크의 사체를 매장하게 했다.
워낙 많은 오크들을 죽었고 여러 곳에 흩어진 까닭에 이런 뒤처리에만 꼬박 삼일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자잘한 업무는 기사들이 지휘했지만 팰리스 또한 마냥 쉴 수가 없었다.
그는 토머스와 1개 백인대의 경호아래 그동안 시간이 없어 미뤄둔 숙제를 처리하러 주변을 수색했다.
그것은 바로···
"토머스~ 저곳의 흙도 괜찮은 것 같은데. 나무가 없는 곳 위주로 파라고 해."
"히힛~ 알겠습니다요, 총독각하?"
장난스럽게 대답한 토머스가 멀뚱멀뚱 지켜보는 병사들에게 팰리스가 지적한 산비탈을 파게했다.
그렇다. 팰리스는 지금 도자기를 만들기에 적당한 토질을 조사하고 있었다.
팰리스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가이아에도 불에 구워 만드는 그릇이 존재했다.
다만, 유약(釉藥)을 발명하지 못했는지 토기를 다시(재벌구이) 굽지 않았다. 주로 서민들이 곡식이나 물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한단다.
참고로, 가마를 이용해 구워 판매하는 토기 공방이 있다지만 가장 널리 사용되는 제작방식은 소비자가 직접 흙으로 그릇이나 항아리를 빚어 말린 후에 그냥 불속에 넣어 굽는 방식을 사용한단다.
각설하고, 일전에 말했듯이 칠성의 둘째 아들이 그릇공장을 운영했다고 했다.
아들의 사업을 도왔던 팰리스는 자연스럽게 도자기그릇과 법랑그릇 생산의 전반적인 지식들을 터득했다.
"그런데, 총독···님? 흙 그릇을 왜 만들려는 거야? 아니, 왜 만드는 겁니까?"
토머스는 토기(초벌구이)에 유약을 바르고 다시 구워 만드는 그릇 즉, 도자기를 몰랐다.
당연히 흙으로 그릇을 만들겠다는 팰리스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히 흙 그릇으로 많은 돈을 벌어··· 아~ 드레이크님, 제이콥경. 왔습니까?”
"네, 총독님! 그런데 저 또한 그 점이 궁금합니다."
토머스뿐만이 아니었다.
드레이크와 제이콥도 이유를 몰라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의 로드이자 지배자가 바로 팰리스였다.
오크들의 침입을 미미한 피해로 물리친 천재적인 전략가였고 각궁과 편전을 개발했던 대단한 발명가(?)이기도 했다.
"제이콥 경! 아마도 총독에게 무슨 생각이 있을 것이오. 안 그런가?"
"그렇··· 겠죠? 토기를 만들어 아나톨리아의 예산을 충당한다는 점이 좀 믿기지 않지만요."
"사실 그 문제는 나도 좀 믿기지가 않네. 예산이라는 것이 한두 푼이 아닐 텐데."
"그렇습니다, 남작님. 그렇지만 누구도 아닌 총독각하께서 하시겠다는 사업입니다. 아마도 무슨 이유가 꼭 있을 것 입니다."
"하긴, 누구도 아닌 총독이 하는 일이니."
드레이크와 제이콥은 몬스터 사태를 해결한 팰리스를 크게 신뢰하게 됐다.
이런 분위기는 비단 두 사람만의 사정이 아니었다.
마법사와 병사들도 대략 비슷했다. 그래서 팰리스의 무모한 사업지시(?)가 의아했어도 별다른 불평 없이 충실하게 따랐다.
"기사님! 여깁니다. 이곳의 하얀 흙으로 그릇을 빚으면 구울 때 잘 안 깨집니다."
"여기 찾았습니다. 이 붉은 흙도 토기를 만들기에 아주 좋은 흙입니다."
다행히 토기를 직접 만들어봤던 병사들이 제법 많았다.
그래서 고령토(高嶺土)를 비롯한 도자기 생산에 적당한 여러 흙과 매장량이 풍부한 곳들을 하루 만에 찾아냈다.
천만다행으로 가이아에는 도자기에 가장 좋다는 고령토가 제법 흔했다.
팰리스는 매장지에 일일이 팻말을 세우고 지도에도 그곳의 위치를 표시하게 했다.
"휘유~ 다행이다. 가이아에도 적당한 흙이 있었네?"
도자기를 빚을 흙을 찾았지만 그렇다고 흙문제가 모두 해결된 건 아니다.
'문제는 유약인데. 원시적인 잿물을 받아 쓸 수도 없고···'
전생시절의 도자기공장에서는 전문회사에 전화로 주문하면 끝이었다.
전문회사는 고운 가루형태의 장석, 석회석, 규석, 카올린, 백운석, 지르코늄, 활석, 바륨 등의 원재료를 500kg(0.88루베)짜리 벌크백에 종류별로 담아 용달차로 배달해줬다.
그럼 공장직원이 이것을 받아 일정한 비율에 맞춰 (혼합기로)섞고 이렇게 혼합한 분말을 물에 타고 고운 채에 거르면 이것이 바로 초벌구이를 마친 토기에 바를 유약이 된다.
참고로, 유약에 들어가는 성분의 비율과 도자기를 빚는 흙 그리고 굽는 온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도자기가 만들어진다.
'유약의 종류가 정말 많고 많은데 어떤 유약부터 만들어 볼까? 역시 가장 많이 사용했던 투명유, 투명한 유약을 만들어야겠지? 투명유를 만들려면···'
워낙 익숙한 까닭에 머릿속의 폴더를 뒤질 필요조차 없었다.
즉각 정답이 떠올랐다.
투명유는 장석 40%, 규석 30%, 석회석 20%, 카올린 10%의 비율로 섞어 만든다.
초벌구이 토기에 유약을 바르고 약 1,250도에 구우면 투명한 유리질이 코팅된 도자기가 만들어진다.
문제는 자연 상태에서는 대부분의 원료들이 (풍화되는 과정에서)혼합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병사들에게 순수한 원재료(흙)가 매장된 곳을 수색하게 했지만 장석과 석회석, 카올린만 겨우 찾아냈다.
유약의 3대 재료라는 규석성분의 흙은 여러 성분이 혼합된 상태로만 존재했다. 이것으로는 제대로 된 유약을 만들 수가 없을 것이다.
팰리스는 남은 이틀을 투자해 규석의 흙을 수색했다.
바위나 돌덩이는 제법 많았다. 그러나 흙 상태의 규석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병사들을 지휘하던 제이콥이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총독님이 말씀하신 흙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총독. 이제 곧 센트럴로 돌아가야 하네. 아무래도 그건 다음 기회에 찾아보게나."
어느새 아나톨리아로 회군할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팰리스는 괜스레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 당장은 원료를 채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 어떤 흙과 원료가 매장되었는지를 꼭 확인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도자기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집어치우고 다른 사업을 시작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아직 찾아내지 못한 성분은 나중으로 미뤄도 문제없다. 그러나 투명유에 필요한 재료만은 꼭 확인해야만 해. 그래야만 사업을 진행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하아~ 제이콥경, 어쨌든 수고했소. 규석성분의 흙이 문제로군요."
"그렇습니다, 각하! 총독님이 말씀하신 성분은 대부분 바위 상태였습니다. 흙 상태로 발견한 건 모두 다른 흙이 섞여 있었습니다."
"아쉽군요. 사람이 일일이 흙을 골라내 사용할 수도 없고, 저기 널리고 널린 하얀 규석바위가 그냥 흙이었다면··· 어? 가만!"
불현듯 팰리스의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규석이 바위 상태로 존재한다면 그것을 깨서 가루(흙)로 빻으면 될 것 아닌가?
유약의 재료를 공급하는 전문회사도 분명 순수한 바위 상태의 규석을 빻고 벌크백에 담아 도자기공장에 납품했을 것이다.
'뭐, 아니면 말고! 아무튼 이것으로 됐네. 휘유~ 정말 다행이다.'
"드레이크님. 제가 좀 생각해 봤는데, 얼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말이오? 규석이란 성분의 흙이 꼭 있어야만 도자기란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잖소."
"맞습니다. 반드시 그것이 필요합니다. 허나, 흙이 없다면 바위를 흙처럼 곱게 빻으면 그만입니다."
팰리스가 해답을 말했다. 순간, 드레이크는 너무도 허탈해졌다.
"흙처럼 곱게··· 빻는다? 허헛~ 그리도 간단한 문제였는데."
"각하!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제가 그런 간단한 문제를 생각하지 못했다니요."
"아니오, 제이콥 경! 나도 이제야 생각하지 않았소? 아무튼 이제 그만 센트럴로 회군합시다."
"알겠습니다, 각하!"
이로써 원재료 문제가 어찌어찌 해결되었다. 팰리스는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센트럴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도자기를 생산할 기반부터 준비하자. 도자기가 만들어지면 모두들 깜짝 놀라겠지?'
* * *
"만세~ 파이온 영지 만세~"
"만세~ 총독님 만세~"
"만세~ 파이온 백작님 만만세~"
팰리스와 아나톨리아군이 센트럴에 입성하려는 순간이었다. 전령을 통해 미리 소식을 접한 주민들이 길거리로 나와 열렬하게 환영했다.
'예전의 그 개새끼들처럼 우릴 착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릴 지켜준 건 확실해!'
'정말로 몬스터로부터 우릴 보호했어. 잘 살수 있다고도 약속했는데 혹시 그말도 사실일까?'
"만세~ 총독님 만세~"
팰리스는 주민들에게 최소한 수호하는 자가 되었다.
일부는 자신들의 삶을 구원해줄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자연, 주민들이 팰리스의 귀환을 진정으로 환영했다.
팰리스는 이런 주민들의 성원에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그러다 흠칫 몸을 굳혔다.
"어라? 설마, 영주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파이온 백작과 소영주 레온이 승전을 축하하러 방문했기 때문이다.
백작 일행을 발견한 팰리스와 지휘관들은 급히 전마에서 내려 달려와 부복했다.
'처척~'
"충, 보고합니다! 아나톨리아의 총독, 팰리스 파이온! 몬스터의 침입을 막아내고 지금 복귀했습니다."
"그래, 모두들 일어나라."
백작의 지시에 팰리스와 지휘관들이 일제히 복창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충!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간 고생 많았다. 팰리스, 네가 세운 전략으로 오크들을 막았다고? 게다가 사망자가 3명에 불과했고, 맞나?"
"그렇습니다, 영주님. 저 마법부장 드레이크. 총독이 계획한 전략전술에 크게 개안했습니다. 허허허~"
"호오~ 마법부장, 그 말이 참말인가?"
"그야 당연···"
"아닙니다, 영주님! 드레이크 남작 이하 기사들과 병사들이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어허~ 총독! 이곳은 영주님의 면전이오."
"네, 네?"
"허허허~ 보고는 정확해야 하지요. 영주님~ 이번 승리는 오로지 팰리스 총독 덕분이었습니다."
팰리스와 드레이크의 싸움 아닌 싸움이 잠시 이어졌다.
이 모습을 파이온 백작과 레온이 흐뭇하게 지켜봤다. 입가에도 진정한 미소를 그려냈다.
"으하하핫~ 그만, 그만하라."
"충!"
"팰리스 총독, 드레이크 남작! 그리고 나의 창과 검들이여! 잘했구나, 아주 잘했어! 으하하하핫~"
파이온 백작은 크게 웃으며 기뻐했다.
레온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도 잠시뿐이었다.
슬며시 미소를 지운 레온이 백작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영주님, 이제 그만 영지로 복귀해야할 시간입니다."
"후우~ 그래. 이쯤 출발해야겠지?“
“죄송합니다, 영주님.”
“아니다, 레온. 아참, 팰리스~ 이제 곧 새해구나. 새해 인사는 이것으로 대신한다. 흠흠~"
난데없이 찾아와서는 얼굴만 보고 돌아가겠다고?
게다가 신년 인사도 오지 말란다. 아마도 팰리스의 존재가 탐탁찮은 2부인과 그녀를 따르는 가신들 때문일 것이다.
"···"
이런 사정을 짐작한 팰리스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도 오랜 경륜(?)이 있어 다시금 미소를 지어보였다.
"영주님! 늦기 전에 출발하십시오. 그래야 해지기 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래, 팰리스!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리고···"
마음이 불편한지 파이온 백작이 잠시간 말을 끊었다.
"이번에 고생 많았구나. 잘했다, 아주 잘했어."
"고맙습니다, 영주님."
"그래, 레온. 이제 그만 출발하자꾸나."
"네, 영주님!"
이렇게 파이온 백작의 깜짝 방문이 끝났다.
피할 수 없거든 즐기라는 명언처럼 팰리스는 이 상황을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거기에 가봤자 괜히 눈치만 보이는데, 마침 잘됐네, 뭐! 도자기를 만들려면 이편이 더욱 낫지 않겠어?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솔직히 귀찮을 테고.'
(높이 매달린)포도를 바라보는 여우의 심정이었을까?
팰리스가 이리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지진 않았다.
'쳇~ 그만! 자꾸 헛생각할거야? 팰리스, 이제부터 넌, 도자기를 만드는데 집중해야 해. 그래야만···'
많은 돈(예산)을 벌어들일 것이고 이를 통해 아나톨리아를 정상적인 지역으로 만들 것이다.
그럼 팰리스가 더 이상 2부인을 비롯한 가신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해질 것이다.
"그래! 내일부터는 무조건 도자기부터 만들자! 무조건 도자기부터 만들어야 해!"
불끈 움켜쥔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15. 도자기를 만들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