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 장(1권) (1/54)

혈륜공자 제1권 

서  장

끝없이 돌고 도는 무림(武林)의 역사는 피의 수레바퀴(血輪)로도 비유된다. 

밤 하늘의 숱한 성좌(星座)처럼 무림의 기인고수(奇人高手)와 초강문파(超强門派)들은 풍진에 파묻히며 명멸해 가는 것이다.

점점이 피로 얼룩진 대무림사(大武林史). 

무림 역사상 가장 강한 문파는 어느 문파인가?

이런 질문은 사실 어리석은 질문일 수 있다. 명멸하는 대무림사에서 초강문파를 꼽는다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굳이 꼽아보자면 무림인들은 누구나 세 문파를 꼽을 것이다.

- 기환궁(奇幻宮).

- 금궁지부(禁宮之府).

- 대마성(大魔城).

이 세 문파는 시대연월(時代年月)을 달리하여 나타났지만 한결같이 무림사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단연 이 삼파(三派)야말로 무림사상 가장 강한 문파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기환궁(奇幻宮).

일천 오백 년 전 무림사의 시작과 함께 나타났다가 온갖 신비 속에 파묻혀 사라져간 문파가 바로 기환궁이다. 

기환궁은 고대에서 당금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모든 마공(魔功)의 근원지였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숱한 개세마공들이 기환궁에서 창출되었고 천하무림으로 파생되었다. 

따라서 기환궁이야말로 중원무림의 태두(泰斗)라고 일컫는 소림사가 창건되기 이전부터 뿌리내린 천하마공(天下魔功)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었다.

소녀미향탈심대법(素女迷香奪心大法)

천령투심환원대법(天靈透心還元大法)

만사천절구혼대법(萬邪天絶拘魂大法)

이와 같은 전설적(傳說的)인 희대마공을 탄생시킨 기환궁을 후세인들은 마도제일지(魔道第一地)라고도 불렀다. 뿐만 아니라 기환궁이 마공으로 무림을 평정했을 때, 무림의 역사가는 이렇게 묘사했다.

기환대천하(奇幻大天下)가 도래했노라고.

그러나 하늘의 노함 때문이었을까? 어이없게도 어느날 기환궁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유는 화산(火山)의 대폭발 때문이었다.

대자연의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기환궁은 대별산(大別山)의 한 유곡(幽谷)에 영원히 묻히고 만 것이다. 

그 후 기환궁은 천오백 년의 세월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두고두고 기환궁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불안한 예감을 지녀왔다. 

언젠가는 반드시 기환궁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기환대천하를 다시 이룰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금궁지부(禁宮之府).

금궁지부는 언제,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 알 수 없는 단체였다. 그만큼 절대적인 신비에 감싸인 곳이 바로 금궁지부다. 

오로지 무림인들이 금궁지부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풍문(風聞)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도 확실한 것이 아니라 필히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풍문에 의하면 천하의 온갖 신공절기(神功絶技)가 금궁지부에 모여 있다고 했다.

즉 금궁지부는 기환대천하 이후 다시 도래할지도 모르는 기환궁의 마공을 억제하기 위해 수만의 정도기인(正道奇人)이 세운 전설상의 정도문파라는 것이다.

그런즉 금궁지부의 위치도 말하는 사람들마다 제각각이었다. 

어떤 사람은 태산(泰山)의 한 곳에 있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변방의 으슥한 곳에서 아직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금궁지부를 말할 때 한 가지 통일되는 것이 있었다.

천하가 혼란의 극을 달릴 때 금궁에서 절세신협(絶世神俠)이 나타나 천하의 마풍(魔風)을 쓸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풍문이 한낱 전설이든 헛된 몽상가들의 넋두리에 불과하든, 금궁지부야말로 정도무림의 살아 있는 유일한 힘이자 소망이었다.

대마성(大魔城).

이름 그대로 천하의 모든 마(魔)가 집결된 성(城)이 바로 대마성이다. 대마성이 무림에 나타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五十年) 전이었다.

만마지존(萬魔至尊) 백무웅(白武雄).

그는 온갖 마의 화신이자 천하만마의 지존(至尊)이었다. 

오십 년 전 대마성이 한 젊은 마도인에 의해 무림에 세워졌을 때 정도무림맹에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십 년이 흐른 뒤에 천하 정도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만마지존 백무웅이 세운 대마성은 천하의 만사만마만악인(萬邪萬魔萬惡人)들을 규합하여 무림 역사상 가장 무서운 대혈세군(大血洗軍)으로 성장한 것이다.

마도천하(魔道天下)!

그것은 천오백 년 전의 기환대천하에 비교될 수 있는 엄청난 대마풍(大魔風)이었다. 천하를 휩쓰는 대마풍에 무림협의지사들은 추풍에 갈잎처럼 휩쓸려갔다. 아무도 대마성의 힘을 막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암흑천하가 도래하는 듯 했다.

그러나 정도의 불씨는 영원히 꺼지지 않았다. 

대마성이 최후의 일격을 정도 무림에 퍼부어 암흑천지를 만들려는 순간 구파일방(九派一幇)이 중심이 되어 천하백도인들이 한곳에 모인 것이다.

또한 소림사상 최대의 기재(奇才)라는 한 젊은 기인이 맹주(盟主)로 나섰다.

천무(天武).

법명도 천무요, 이름도 천무요, 별호도 천무였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천하백도인의 맹주가 된 천무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는 대마성에 의해 초토화된 정도백파를 정리하여 수백 개 문파를 통일해 무림맹(武林盟)을 발족했을 뿐만 아니라 전설의 기인(奇人)들을 끌어내기까지 한 것이었다.

무림삼옹(武林三翁).

무림삼옹은 이백 년 전에 정도 무림을 위해서 활약하다가 은퇴한 은자들이었다. 속세를 떠나 사는 그들은 천무의 도움을 거절치 못하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천무의 통솔하에 전열을 재정비한 정도무림맹은 노한 파도와 같이 대마성으로 쳐들어 갔다. 대마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만 명의 마도고수들을 출성시켰다.

무림사 초유의 대혈전이 대마성에서 벌어졌다.

하늘에서 피비가 내리고 죽음의 바람(死風)이 천지를 휩쓸기를 장장 십 주야(十晝夜), 천하가 시체로 뒤덮이고 있었으나 승패의 결말은 요원하기만 했다.

동도(同道)들의 시체를 타넘으며 혈우(血雨) 속에서 공격과 후퇴를 거듭하기를 보름 동안 했으나 대마성은 함락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림맹의 패색이 짙어갈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나 할까? 뜻밖에도 한 신비문파가 무림맹을 도우려고 나타난 것이다.

제마천문(制魔天門).

문주(門主)가 누구인지도, 어디에 적을 두고 있는지도 모르는 신비문파가 나타나 무림맹과 함께 협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움은 호각지세(互角之勢)였다.

대마성의 힘은 너무도 강했다. 특히 천지인삼마(天地人三魔)의 무공은 만마지존과 평수일 정도였다. 만마지존과 천지인삼마의 대살행은 무림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했다.

그칠 새 없이 끈적거리는 피보라를 흩뿌리는 싸움은 보름간을 두고 계속되었다. 수급(首級)이 짤린 무림맹들의 시체가 태산을 이루어갔다.

전세는 차츰 대마성쪽으로 기울었다. 암흑의 마도천하가 도래하기는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정녕 하늘도 마도의 편에 서는 듯했다.

정도무림의 미래는 풍전등화였다. 바로 그때,

꽈르... 릉!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폭발이 한순간에 대마성 전체를 날려 불바다로 만들고 말았다. 정도무림맹의 누군가가 대마성으로 잠입해 들어가 화기(火器) 창고를 폭발시켜 버린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대폭발은 대마성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날려버리고 말았다. 대마성쪽에서 본다면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어 거대한 피의 수레바퀴(大血輪)는 멎었다. 암흑의 마도천하가 종지부를 찍고 만 것이다. 

그것은 무림사의 마지막 장(章)을 장식한 대혈륜지사였다.

그러나 만마지존과 천지인삼마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이 시신도 남기지 못한 채 한 줌 먼지로 산화(散華)한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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